사회연대전략으로 계급형성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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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12일 10: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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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창우 동지의 주장에는 쉽게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 특히 “진보진영 내 당연한 가치 또는 목표로 자리잡아야 할 ‘사회연대’라는 개념”을 굳이 ‘전략’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포장”한 것이 문제라는 주장은 합리적인 문제의식이다.

또, 시장임금뿐 아니라 사회임금 투쟁도 엄연히 “사회적 이윤을 둘러싼 계급투쟁”이라는 지적은 오건호 동지의 이분론과 달리 들린다. ‘사회임금’도 ‘시장임금’과 마찬가지로 어느 계급이 손해를 보고 어느 계급이 이익을 볼 것인지를 둘러싼 계급투쟁이며, 여기서 필요한 것도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인 것이다.

구창우 동지의 지적처럼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공적연금 급여율을 깎는다고 하면 총파업의 홍역을 겪는다. 실업자들이 실업수당을 넘어 보너스를 달라고 시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창우 동지는 세금 문제에서 갑자기 샛길로 빠진다. “사회임금에 대한 투쟁은 우리가 그 재원에 당당히 참여했을 때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또,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면 노동자의 60% 이상이 세금 내는 것을 아까워한다. 물론 과세의 투명성이나 공정성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은 요인으로 작용했겠지만, 세금에 대한 기피는 가진 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라며 노동자들에 조세 불만을 부자들의 그것과 동렬에 놓으려 한다.

하지만, 지금 노동자들이 그 재원에 ‘당당히’ 참여하고 있지 않은 게 문제인가? 오히려 매달 월급에서 세금을 ‘원천징수’ 당하는 노동자들이 기업주, 부자들에 비해 과다 ‘참여’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물론 부자들의 세금을 늘리고 누진세를 적용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조세 체계에서는 누진율을 적용하면 고소득 정규직 노동자들의 상당수도 누진율을 적용받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근로소득세와 연금보험료 모두에서 누진율 적용 하한선을 대폭 높여 대부분의 노동자들을 제외시키고 대신 누진율 자체를 대폭 높이면 된다.

예를 들어 월 360만 원 이상을 버는 노동자들에게도 일괄적으로 보험료 누진율을 적용할 것이 아니라 월 7백만 원 이상 소득자에게만 더 높은 누진율을 적용하면 된다. 증세, 감세 논쟁에서 핵심은 어느 계급에게 세금을 부과해서 어느 계급을 위해 쓸 것인가 이다.

진정한 대안은 오건호 동지 식으로 현행 제도를 그대로 둔 채 모든 사람들에게 증세 아니면 모든 사람들에게 감세 둘 중 하나만 결정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주와 부자들에게는 증세를 노동자들에게는 감세를 해서 진정한 평등과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부자 증세, 노동자 감세

구창우 동지의 지적대로 공적 연금 제도는 우리가 지키고 개선시켜야 할 중요한 복지제도다. 그러나 “국민연금 같은 공적연금 제도의 본질은 … 세대내 연대가 아니라 세대간 연대에 있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가 되더라도, 혹은 ‘덜 내고 더 받는’ 연금이 되더라도 사회 전체에서 한 세대의 노동자들이 나머지 비노동인구(노인, 어린이, 환자 등)를 부양해야 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연금이 줄어들면 그만큼 개별 가정과 노동자가 부담해야 할 노인 부양비가 늘어난다. 현 세대가 부담을 조금 더 질 것이냐, 미래 세대에게 떠 넘길거냐 하는 것은 진정한 쟁점이 아니다. 지금이든 앞으로든 부양비를 사회적으로 부담할 지 아니면 개별 가정과 노동자가 떠 안아야 할 지가 진정한 쟁점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든 미래의 어느 시점이든 결국 그 사회적 비용을 부유층과 기업주들이 지불해야 할지 아니면 평범한 노동자들이 지불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명백히 계급 역관계에 달려있다. 정말이지 구창우 동지 자신의 지적대로 공적 연금 제도를 비롯한 “사회임금 투쟁은 계급투쟁이다.”

무엇보다 구창우 동지는 “사용자와 저소득층 노동자간의 잘못된 동거를 균열내”야 한다고 옳게 지적했지만 세대간 부담론으로는 이룰 수 없는 과제다. 노무현 정부가 ‘더 내고 덜 받는’ 연금 개악을 추진할 때 내세운 주요 논리가 바로 세대간 형평성 문제였다.

그러나 기업주들이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의 보험료를 내고 그들에게는 별 필요도 없는 많은 연금을 받는 반면 노동자들은 과다한 보험료를 내고 형편없는 연금을 받는다. 이런 현실의 계급 격차를 무시하고 미래 세대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당장 현 세대가 부담을 늘려야 한다면 ‘더 내고 덜 받는’ 연금 개악에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는가?

공적 보험이 ‘세대간 문제’가 아니라 계급 간의 재분배 문제라는 점을 일관되게 지적할 때만 이 “동거”에 균열을 낼 수 있다.

잘못된 동거

구창우 동지는 “저소득층 보험료 지원사업에 국가와 자본은 강력하게 반발할 것이다”라고 했지만 국회에서 현애자 의원의 이 제안에 총리 한명숙은 “기본 원칙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다. ≪이론과 실천≫에 따르면 보건복지위 소속 열우당, 한나라당 의원들도 “현실적인 안을 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한다.

왜냐하면 ‘사회연대전략’이 국가와 자본에 요구하는 것은 그리 크지도 않을뿐더러 언제든 약속을 깰 수 있는 어음인 반면 노동자들의 미래 연금을 삭감하는 것은 당장에 노동자들이 양보해야 할 ‘현찰’이기 때문이다. 그 자들이 보기에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닌 것이다.

‘사회연대전략’은 정규직, 고소득 노동자들이 미래에 받을 연금 5년 치를 깨끗이 포기해서 그 돈으로 비정규직 저소득 노동자들의 연금 보험료를 내 주자는 안이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먼저 양보할테니 정부와 기업주들도 양보하라는 얘기다.

그러나 오건호 동지도 가입자의 특혜를 이유로 정규직 고소득 노동자들의 양보를 요구하는 반면 지배자들의 양보를 이끌어내진 못할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사회연대전략’을 통한 계급형성이라는 오건호 동지의 논리는 이처럼 현실에서는 노동자들의 ‘양보’와 ‘나눔’을 이끌어내긴 해도 “사회임금 강화를 위한 계급투쟁”을 이끌어내진 못한다.

이처럼 “계급투쟁”의 전장에서 저들의 양보를 이끌어내지도 못하고 우리 것을 내놓는 ‘사회연대전략’은 구창우 동지가 말한 “사회 임금 강화라는 공통의 목표”와 완전히 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공적 복지 제도는 항상 양날의 칼이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삶을 일정정도 개선시키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현재의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안정시키는 데 이바지한다.

그러나 북유럽의 복지 국가들뿐 아니라 당장 이 나라에서도 그런 것처럼 특히 경제 위기 시기에 복지의 양과 그 부담을 누가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계급 간 갈등이 고조되면 이런 모순은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다.

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가 양보하더라도 “사회적 연대”를 위해 덜 가난한 노동자와 더 가난한 노동자가 나누자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둬 노동자 전체를 위한 복지 재원을 마련하자고 해야 할까? ‘사회연대전략’은 전자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연대전략’은 “진군의 나팔소리”가 아니라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패배의 북소리”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의 2007년 사업 계획에서 삭제된 사회연대전략이 고스란히 의원단 사업계획에 반영돼 있는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사회연대전략은 완전히 폐기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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