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더지 게임을 아십니까
    [엽편소설②] '어떤' 공동체와 시험
        2023년 02월 28일 02:4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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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소리, 텔레비전 소리 같은 게 전혀 안 들려요. 혜진이 월세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동안 집주인이 중얼거렸다. 층간 소음 그런 게 없는 집은 드뭅니다. 요즘은 그런 일로 살인도 일어나잖아요. 부동산 중개업자의 그 말속에 친절과 불안과 비열함이 섞여 있는 듯했다. 급한 이사였다. 직급 시험을 몇 주 안 남기고 있었는데, 전에 살던 집주인이 집을 급하게 파는 바람에 쫓기듯 이사를 한 혜진과 혜진의 딸이었다. 2층. 마지막 층이라 딸아이가 뛰어놀아도 괜찮을 거라고 부동산 중개업자가 덧붙였다. 딸아이는 13살, 더 이상 뛰어놀지 않는다. 딸아이 방이 한 칸 생긴다면 그걸로 됐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는 소음이란 “사람이 내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사 온 지 일주일이 채 안 돼 사람 목소리 대신 사람들이 쓰는 물소리가 매일 들렸다. 마치 폭포수 옆에서 잠을 자는 기분이었다. 7층 맨 위층에서부터 쓰는 물들이 내려와 만나고 만나 2층 배관으로 한데 모여 한 관을 타고 2층에 모여 하수구로 내려간다. 혜진이 검색해 본 인터넷에 그런 설명들이 가득했다. 게다가 변기에서 한 번씩 물이 부글부글 끓어 변기 밖으로 솟구치기도 했다. 정수기 기사가 정수기를 설치하는 동안 요즘 이 집처럼 배관설비를 엉망으로 해놓은 집이 제법 많다고 했다. 혜진은 불안했다.

    엄마 변기 속에 괴물이 사나 봐. 하수구에 숨어있다가 이따금씩 포효하는 거 아니야? 혜진은 딸애가 그런 농담을 할 때마다 웃지 않았다. 한강 밑에 숨어있던 괴물이 하수구에 딸을 잡아먹으려고 숨겨둔 영화 속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벽을 타고 내려오는 물소리는 빗소리와 달랐다. 혜진은 무지 알 수 없는 복잡한 배관들이 어떤 물길을 따라 모였다가 웅숭깊게 섞여 혜진의 집으로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물소리, 사람이 물 없이 살 수 없지, 살 수 없어, 그래 살 수 없고야 말 거야. 혜진은 밤마다 천둥처럼 내리는 물소리에 자주 깼다. 다행히 혜진의 딸애는 잘 잤다. 그래 이런 것쯤은 그냥 견디는 것이 일상이라고 생각했다.

    직급 전환 시험을 하루 앞둔 날, 혜진은 딸과 간단히 저녁을 차려 먹었다. 설거지를 하는데 발바닥이 축축했다. 어디서 쏟아진 물인지 몰라, 혜진은 양말을 벗고 수건으로 바닥의 물을 훔쳐냈다. 수건은 단숨에 척척해졌다. 바닥은 흥건했다. 싱크대 밑으로 흘러나온 맞은편 벽 쪽까지 거품 물이 흘러나왔다.

    혜진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싱크대 덮개를 뜯어냈다. 싱크대 배관과 연결된 아래 관에서 오물이 울컥울컥 올라오고 있었다. 위로 솟구쳐 올라오는 오물은 파장을 일으키며, 계속 작은 원에서 수십 개의 원을 그리며 넘쳐흘렀다. 혜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깊숙이 넣어 배관을 움켜쥐었다. 하수구를 통해 역류한 오물은 혜진의 손을 비집고 필사적으로 흘러내렸다. 손 사이로 구정물이 쉴 새 없이 나왔다. 혜진은 행주를 움켜쥐고 배관 구멍에 깊숙이 넣었다. 하수구 물은 행주를 밀어내며 계속 위로 오물을 올려보냈다. 토사물 같은 건더기까지. 방에 있던 딸애가 거실에 나오더니 얕은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정전. 바닥에 붙은 각종 전자제품 콘센트가 물에 닿아 합선이 된 것이다. 엄마 불이 다 꺼졌어. 엄마 어딨어? 혜진은 어두컴컴한 거실 바닥을 더듬으며 손과 몸에 달라붙는 음식물 찌꺼기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 계속 배관에 행주며 수건을 잡히는 대로 밀어 넣어 막았다. 형체를 알 수 없게 으깨진 건더기들이 혜진의 얼굴에 닿았다. 숨을 들이마실수록 악취 때문에 숨쉬기가 어려웠다.

    합선이 되었나 봐, 휴대폰 가져와. 밤 10시. 음식물 찌꺼기, 오물은 계속 혜진의 거실 바닥으로 역류하고 있었다. 엄마 어떡해야 해. 수건 가져와. 두꺼운 수선을 돌돌 말아서 배관에 쑤셔 넣고 틀어막았다. 혜진은 대야를 가져와 쓰레 바지와 빗자루로 물을 쓸어 담아 화장실 변기에 버렸다. 자꾸 큰 동그라미를 그리며 퍼져나가는 물의 경계를 막으려고 수건 띠를 둘러 카펫이 깔린 거실 바닥까지 가지 않도록 흘러내리는 물길을 막았다. 혜진은 주인에게 전화했다. 주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동반장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동반장은 혜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저희 집 하수구가 역류하고 있어요. 계속 하수구 오물이 우리 집 거실 바닥으로 흘러 내려오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동영상을 찍어 보내주실래요? 혜진은 다급하게 다시 전화를 걸어 영상통화를 눌렀다. 동반장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혜진은 어둠 속에서 딸에게 동영상을 찍어달라 하고, 오물을 퍼냈다. 음식물 쓰레기가 고인 곳에 잠시 물이 고였다가 쓸어 담자 오물은 혜진의 거실을 덮치듯 흘러내렸다.

    혜진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갈린 생선 찌꺼기 음식물 잔해가 마치 토막 난 시체처럼 바닥에 떠다녔다. 혜진은 새 수건으로 다시 배관을 막고 흘러내린 오물을 담고 수건으로 훔치고 변기에 버리기를 무한 반복 했다.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딸애가 어둠 속에서 그런 혜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왜 우는 거야, 엄마 너무 어두워서 눈물이 나.

    날이 밝아오면 시험장으로 가야 했다. 혜진은 H은행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올해 직급 전환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사력을 다해 준비해온 시험이었다. 최저시급으로 월세도 감당하지 못해 늦저녁 파트타임 알바를 했고, 주말 낮에도 알바를 했다. 혜진이 전에 살던 집 아래층에서 혼자 고독사한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파지를 주었는데, 한여름 변기 위에서 죽었고, 그 악취 때문에 십오일 만에 발견되었다. 혜진은 출근할 때마다 노인의 파지를 담던 수레를 보았다. 노인이고 남기고 간 것은 수레뿐이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물으며 정규직 시험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합격만 한다면 딸애와 마주 앉아 저녁을 먹거나 딸애가 잠든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때부터 혜진이 믿는 것은 오로지 정규직 전환 시험뿐이었다. 정규직 비정규직 똑같이 시험을 봐도 3년째 비정규직은 단 한 명의 합격자가 없는 이상한 시험이었다. 혜진은 그럼에도 시험 준비를 포기할 수 없었다. 혜진은 변기 위에서 혼자 죽지 않는다면, 악취를 풍기며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는다면, 지금 생에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느꼈다. 새벽녘 모두가 잠든 시간이었는지, 물소리가 잠시 멈췄다. 딸애는 인상을 잔뜩 쓴 채 제 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불을 잘 덮어주며 엄마 시험 얼른 보고 올 게 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공동현관에 로켓 프레시 새벽 배송 신선한 아침 식사 재료들이 공동현관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누군가 오늘 저 신선한 식재료로 식사를 해 먹고 버린 물이 다시 혜진의 집 거실로 역류할 것이다. 혜진은 벽을 타고 울컥거리며 내려오는 물소리를 들었다. 이미 집 근처를 떠나 멀리서 버스를 탔는데도 물이 역류하는 소리가 귓가에 고여 있었다. 차라리 딸애를 깨우고 왔어야 했다. 그 애가 눈떴을 때 오물과 음식물 쓰레기로 뒤덮인 흥건한 거실 바닥을 보고 또 울면 어쩌나.

    시험장 공중화장실은 사람들로 붐볐다. 손 씻는 세면대는 막혀 있었고 거기도 물이 빠지지 않은 채 누군가 침이 떠다녔다. 사람들은 상관없다는 듯 자기 손만 씻고 그 안에 물을 더 채운 채 밖으로 재빨리 나갔다.

    혜진은 수험 표를 꺼냈다. 시험지를 받았는데 귓가에서 쏴아아- 쏴아아- 물 내려가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시험지의 글자들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혜진은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손이 떨려왔고, 자꾸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엄마를 찾는 딸애의 비명소리 같은 것이 뒤섞여 들려왔다. 혜진은 무심코 손을 들었다.

    화장실에 누가 물을 틀어놓고 온 것 같습니다. 감독관님 여기까지 소리가 들려요.

    모두가 일제히 혜진을 바라보았다. 감독관은 시험장 앞문을 열고 복도 쪽을 바라보곤 다시 혜진을 번갈아 보았다.

    화장실은 같은 층에 없어요, 자 집중하시길.

    혜진은 시험지를 다시 보았다. 쏴아아- 쏴아아 혜진은 귀를 틀어막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나왔다. 한 글자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내려왔다. 혜진은 엎드렸다. 백지를 낼 순 없다. 어떻게 준비한 시험인데, 현기증이 몰려왔다. 차라리 이대로 자신도, 수험생들과 감독관도 이 건물 모든 것이 한꺼번에 오물에 덮여 쓸려 내려가길, 이 세계가 어떤 거대한 구멍으로 회오리치며 빨려 들어가길.

    현관문을 열자마자 하수구 냄새가 진동했다. 딸애는 변기통을 부여잡고 구역질을 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자꾸 이런다며 딸애가 화장실에 들어앉아 나오지 못했다. 혜진이 딸애의 작은 등을 두드려주는 와중에도 오물은 거실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혜진은 딸애를 친구 집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찰박거리는 거실 바닥의 물이 뜨겁다는 것을 느꼈다. 혜진은 곧바로 3층으로 올라가 벨을 눌렀다. 3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혜진은 다시 4층으로 올라갔다. 4층 벨을 누르는 것도 잊은 체 거세게 문들 두드렸다. 4층에 사는 남자가 문을 열었다.

    뭐요?

    방금 싱크대에 뜨거운 물 버렸죠, 무슨 라면 국물 버렸잖습니까. 그거 201호 바닥으로 다 역류했어요. 심지어 식지도 않은 채로 부글부글 끓는 물이 그대로 역류합니다. 싱크대 쓰지 마세요, 밤새 오수를 퍼냈습니다.

    그게 지금 내 잘못이란 거요? 아니 내 집 싱크대도 나보고 쓰지 말라는 거요?

    공사를 하든 원인을 찾을 때까지 쓰지 말아 주세요. 한 동에 살고 위에서 쓴 물이 내 집 바닥으로 다 올라온다고, 제발,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혜진은 아찔했다.

    무슨 상관? 한 동에 살고 물이 한데 모이고 그 물이 201호 바닥으로 역류한다고, 우리가 한 동에 살고 있다고요.

    4층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하여튼 빨리 해결하라, 아주 안 쓸 순 없다며 문을 재빨리 닫았다. 혜진은 내려가다 계단에 주저앉았다. 한 동에 사는 사람이 숨을 쉴 수도 없고 역류하는 오물을 퍼내느라 일상이 무너졌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을 버젓이 쓰는 일. 그건 마치 악취가 날 때까지 한 동에 사는 노인의 고지서가 다 쌓일 때까지 아무도 찾지 않는 일 같은 거였을까. 동반장도 연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싱크대를 지금 쓰지 말자는 거냐고 혜진에게 되물었다. 혜진은 동반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혜진은 전화기에다 대고 소리쳤다. 당장 싱크대 사용을 모두 멈추라고 연락을 해달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냐고 정말? 공동체 당신들은 그런 단어를 들어 본 적 없느냐고.

    혜진은 그대로 철물점으로 향했다. 배관 같은 것, 철을 끊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달라고 했다. 집에 오는 길 신축 공사장이 있었고 아무도 없어 어두컴컴한 공사장 안전 펜스를 열고 들어갔다. 거기서 가장 두꺼워 보이는 대리석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혜진은 곧장 자기 방 거실로 들어가 제 싱크대와 연결된 배관을 안감힘을 다해 잘라냈다. 그리고 바닥에 난 구멍을 대리석으로 덮었다. 그리고 나서 한참 그 대리석을 보고 있었다. 대리석은 들썩이는가 싶더니 이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 우리 집으로 괴물이 토해내는 오물을 막은 것뿐이다. 아무도 상관하지도, 아무도 찾아와 보지 않는 내 집에서 나는 악취를 풍겨가며 죽기 싫다고 혜진은 침묵 속에서 외치고 있었다.

    10분도 안 돼 복도가 시끄러웠다. 202호 옆집 여자가 자기 집 바닥으로 끔찍하고 더러운 물이 역류하고 있다고 소리쳤다. 그래 그 오물은 그렇게 끔찍한 것이었다. 혜진의 집 문 벨을 눌러대고, 나와보라고 무슨 짓을 한 것이냐고 소리치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혜진은 방구석에 틀어박혀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람이 내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대리석으로 배관을 아예 막아버리자 다른 집으로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옆 집 사람이 막으면 다시 위층, 위층 사람이 막으면 그 위층 사람의 집으로 오물이 새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제야 누군가 혜진의 집을 찾기 시작했다. 혜진은 헛웃음이 났다. 새벽 1시까지 윗집에서 쿵쿵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혜진의 전화기가 울려댔다. 동반장이었다. 혜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혜진은 어두운 방 천장을 보고 있다가 쏟아지는 피곤을 이기지 못해 잠시 누워 눈을 감았다. 그때 후드득 후드득 혜진의 얼굴 위로 걸쭉한 토사물이 떨어졌다. 혜진의 천정에 금이 짜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갈라진 틈새로 오물이 혜진의 몸 위로 쏟아졌다. 마치 살아있는 혜진을 산 채로 매장하듯 누군가 오물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혜진은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일으켰다. 꿈이었다. 그새 잠이 든 것이었다. 새벽 2시. 부재중 전화 13통. 모두 동반장이었다. 혜진이 싱크대 밑을 열어 보았을 때 대리석은 완강했다. 그제야 혜진은 오늘 오전에 내고 온 백지로 된 답안지 생각이 났다.

    혜진은 휴대폰을 열고 직급 전환이라는 말을 부질없이 검색했을 때, 뉴스 메인에 ‘불공정 능력주의에 지배당한 대한민국’이라는 기사가 보였다. 혜진이 무심코 누르자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반대라고 쓰인 피켓을 든 사람들 사진이 보였다. 그 밑 연관 기사로 ‘정규직 되려고 4년간 노량진 컵밥만..’ 제목의 글도 보였다. 그 바로 밑에 ‘비정규직 노동자 A 공항에서 20년 청소 노동했는데’ 등 기사들이 나열돼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자신이 하청으로 근무하는 H은행 기사도 보였다. ‘H은행 차별 없애기 위해 정규직 전환 시험 실시, 시험에 통과한 비정규직 0명’이라는 리드를 읽다 창을 닫았다. 결국 누군가가 시험에서 떨어져야 누군가가 합격한다.

    새벽 2시. 혜진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가방을 메고 공사장으로 갔다. 거기서 벽돌 몇 장을 훔쳐 가방에 쑤셔 넣었다. 가방은 말할 수 없이 무거웠다. 하지만 혜진 끊어질 듯한 어깨 통증을 참아가며 집으로 기어가듯 갔다. 빌라 주변에 철망이 씌워진 맨홀을 열어젖혔다. 담배꽁초와 온갖 음식물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그 배관 입구에 벽돌을 쌓아서 블록 놀이를 하듯 구멍을 다 막았다. 주어온 작은 돌멩이까지 동원해 꼼꼼히 배관을 막았다. 고양이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혜진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혜진은 그날 밤 비로소 아무 꿈도 꾸지 않고 단잠에 빠졌다.

    새벽부터 빌라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전체 배관이 막히자 3층도 4층도 5층도 모두 한 번씩 위에서 쓴 하수 물이 자기 집 배관으로 역류한 것이다. 밤새 한곳이 막히면 다른 곳으로, 그 다른 곳을 막으면 다시 다른 뚫린 곳으로 오물이 역류했던 것이다. 밤새 누가 물을 썼냐는 말부터, 음식물 쓰레기 가는 기계를 누가 쓰고 있냐부터 오물로 뒤덮여 바닥재가 다 망가졌다며 서로 원망과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창문 틈으로 내려다보니 작업복 입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동반장 옆에 서 있던 경찰관이 옆에서 무언갈 받아 적고 있었다. 드디어 소리의 흔적, 잡음들. 그것이 이 빌라 주변과 이 세계를 상시적으로 메우고 있었다.

    혜진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사람들이 잠시 흩어진 틈을 타, 빨리 버스 정류장 쪽으로 달렸다. 가방 안에는 어제 미처 털어내지 못한 돌들이 달그락거렸다. 혜진은 이상할리 만큼 침착해졌다. 버스 차창에 기대자 햇볕이 혜진의 얼굴을 향해 직사로 쏟아지고 있었다. 아무 상관 없다는 세계에 부글부글 끓는 오물을 한껏 부어놓고 나온 기분이었다. 그때 혜진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기 성북서인데요, 혹시 김혜진 씨죠?

    사건이 접수되었는데요, 김혜진 씨가 헤븐빌 빌라 맨홀 뚜껑을 열고 무엇을 하는 장면이 CCTV에 찍혔습니다. 재물손괴 혐의로 고발된 사건이라서 성북서로 오셔야겠습니다.

    혜진은 전화를 끊었다. 혜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버스에서 내렸다. 혜진은 택시를 잡고 성북서로 가달라고 했다.

    조사관은 혜진의 인적 사항을 물었다. 혜진이 사회부적응자, 혹은 고질적인 정신질환이 있길 바라는 듯한 질문들이었다. 조사관은 혜진의 신상만 캐내고 있었다. 혜진은 조서라고 내민 종이를 보고 침착하게 펜을 그러쥐었다.

    두더지 게임을 아십니까. 혜진은 첫 문장을 그렇게 시작했다.

    * [엽편소설-1] ‘피해는 누가 입는 겁니까’

    필자소개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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