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회의 ‘좌파’는 결단해야
    [기고]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을 보며-3
        2023년 02월 24일 04:2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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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글(관련 글 링크)에서 어느 정도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이 질적으로 변화(이념 지향에서 일상생활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했음을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19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가 도입되면서 무조건 저항, 투쟁하는 것(중요한 변화는 이들이 1960년대-70년대식 현실을 대하는 사고방식 또는 해석 방식이 바뀌었음을 인식하여 마르크스주의적 접근 방식이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여)이 아니라, 대중 스스로 실험 또는 실천하면서 기회를 엿보는 식으로 즉 전략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리할 수 있는 계기는 여건이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복잡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 변화를 실천한 라틴아메리카 대중에게서 엘리트가 겸허하게 배웠기 때문이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 같지만 사회를 변혁하는 데는 대중과 엘리트가 거의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이것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지식인인 주디스 버틀러는

    권력은 안정적이거나 정태적이지 않으며 일상생활 내부의 다양한 국면에서 개조된다. 권력은 상식에 대한 우리의 희미한 감각을 구성하며 한 문화의 지배적 인식소(에피스테메)로 위장된다. 나아가 사회변혁은 단지 어떤 대의를 지지하는 다수 대중을 결집한다고 일어나는 게 아니라 바로 일상의 사회적 관계들이 재접합되고 파격적인 또는 전복적인 실천들에 의해 새로운 개념적 지평이 열리는 방식을 통해 일어난다(버틀러외 2009,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31).

    우리의 경우는 여유가 있는 상층 중간계급이 너무 막강하게 현재의 여러 현실적 조건을 즐기면서 변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에 비해 라틴아메리카(특히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의 경우)에서는 중간계급과 대중계급이 서로 연대하여 비록 쉽지 않지만 비자본주의적 대안적 공동체성을 나름대로 실천했다.

    그렇게 된 맥락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동네의 총회 운동과 다른 하나는 가톨릭교회의 공동체성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브라질의 경우, 미국식 복음주의 개신교회가 아주 가난한 대중 속으로 파고 든 것이 보우소나루 극우 정권의 출현에 일조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경우, 과거에는 가난한 대중계급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금 낫게 살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이게 거의 완전히 불가능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응에 있어 대중 스스로의 실천은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 미약했고 대중이 기존의 엘리트에게 의존했다. 하지만 이미 엘리트들은 아무리 좌파이고 민주주의를 신봉하더라도 사회경제적 여건이 과거와 달라져 대중과 같이 연대하여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김대중을 시작으로 민주당 정부들은 신자유주의를 긍정하면서 여기서 강자가 되는 전략을 효율적으로 구사하여(예를 들어, IT산업, 반도체 등) 경제는 그런대로 잘나갔지만 역설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대중과 엘리트 사이의 갭이 오히려 커져 현재는 국가와 사회가 도저히 지속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대중과 엘리트 모두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응에 실패한 셈이다.

    반면 저들의 경우, 난제는 예를 들어, 차베스와 마두로 정부가 담론 차원에서 신자유주의를 반대하지만 구체적인 경제정책은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프레임에 들어있는 모순에 처해 있었다. 이런 모순과 동시에 미국의 제재 조치가 2017년, 2019년을 지나면서 더욱 가혹하게 되고 국제적인 미디어 전쟁에서 불리하여 여러 가지로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대안인 공동체성(꼬무나스 운동)의 실천이 우리는 잘 모르지만 뚜렷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이런 흐름에 대한 우리 국내의 보도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근 그동안 앙숙이던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가 양국 사이의 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가까워졌는데 이렇게 된 동력은 콜롬비아에서 대중의 꼬무나스 운동에 기반한 사회운동이 구스타보 페트로라는 좌파대통령을 선출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우리와 달리 저들은 원래 경제체제가 과거나 지금이나 “불로소득 자본주의”(이병천 교수)또는 “지대 자본주의”(16세기부터 시작되어 지금도 석유, 가스, 구리, 금, 은을 추출하여 유럽으로 수출하는 구조로서 지금도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모두 고속으로 성장하는 중국에 사료용 작물을 수출하기 위해 열심이다. 그리하여 아마존 밀림까지도 파헤칠 수밖에 없다)로서 1980년대에 도입된 신자유주의가 가지는 불로소득 자본주의의 ‘약탈적’ 속성을 대중도 정확하게 꿰뚫어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우리는 아직도 과거 신자유주의 이전의 구조(예를 들어, 자동차, 조선 산업 등)에 대중이 익숙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노동 생산성도 저들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게 높고 자본가의 투자로 인한 모험성도 훨씬 높다. 저들은 과거 오랜 세월 동안 물가를 상쇄한 실질 경제성장률이 평균적으로 약 0.5 % 정도에 그친다는 점이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새로운 우파인 윤석열 정부가 아주 많은 어설픈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몇 가지 정책은 아주 날카롭고 예리하여 싱크탱크의 지식인들의 도움이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제 각설하고 우리 사회 좌파의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믿을 것이 하나 있다는 생각이다. 다름 아니라 젊은이들 특히 여성들이 기후위기에 대해 막강하고 창의적인 운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들은 기본적으로 중간계급적이다. 여기에 대해 노동운동세력(지금 신나게 얻어맞고 있는 민주노총 등)이 서로 연대하면 된다. 좌파정당은 기후위기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관습적으로 사회주의 운운이 아니라 자본주의 안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유토피아적 비전을 지금보다 훨씬 과감하게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전략은 바로 기후위기 운동세력(젊은 여성들)과 전통적 노동운동세력(아저씨들)이 시위를 하더라도 어깨를 같이하는 실천을 해야 한다. 이것을 좌파 정당이 견인해야 한다. 지난 정부 5년처럼 말만하고 행동은 안하는 어정쩡하게 어물어물하다가는 완전 박살날 수 있다.

    필자소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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