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주의의 '난폭한 적법성'과 압류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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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10일 08: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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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석제의 소설을 읽는 일은 갑자기 즐거워진다.” 이것은 『홀림』(문학과지성사)의 해설을 썼던 문학평론가 김만수의 이야기이다. 삶의 사소한 조각들을 요절복통의 이야기로 되살려내는 그의 입담 앞에서 무장해제당하지 않고 버틸 재간은 없다.

    허나 이 ‘즐거운 독서’에는 단서가 있다. ‘갑자기’라는 부사는 괜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김만수가 쓴 온전한 문장은 이것이다.

    “베케트의 부조리 연극이 그랬던 것처럼, 성석제의 소설에는 느끼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비극성, 생각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희극성이 뒤섞여 있다. 그 양면성을 볼 수 있을 때, 성석제의 소설을 읽는 일은 갑자기 즐거워진다.” 말하자면 농담과 해학으로 비극을 날렵하게 다루는 솜씨 앞에서 우리는 이야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언어가 사나워졌다

       
     

    그런데 신작 『참말로 좋은 날』에 이르러 우리는 성석제의 소설 속에서 ‘큰 웃음’을 얻지 못한다. 현실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을 비극적인 이야기만으로는 거의 드러내지 않던 작가가 ‘살벌한 삶’을 ‘살벌한 쓰기’로 고스란히 가져온 탓이다. 웃지 못하는 작가 앞에서 독자 역시 웃음을 거두고, 현실의 살풍경으로 덜컥 끌려들어가게 된다. 성석제의 언어는 사나워졌다. 곧, 사나운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서고 있다.

    『참말로 좋은 날』에는 같은 제목의 표제작이 없다. 다만 「환한 하루의 어느 한때」의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날씨 참 좋구먼, 좋아”라거나 “아이고마, 오늘 날씨 참말로 좋을세”라고 짧게 감탄사를 말하게 할 따름이다. 물론 「환한 하루의 어느 한때」 정도만 하더라도 우리는 작가의 사투리 정서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그기 그런 기 아이라. 넙추이 어머이가 넙추이 전에 딸만 다섯을 낳고, 또 넙추이를 뱄다가 이번에는 백분 아들이지 했는데 낳다보이 또 딸이네. 그래서 저 어머이가 도로 들어가라, 나중에 나오라고 막 밀어넣었다 카대. 그래 늦게 나오라고 해서 늦추이라.”(p.59) 넙춘이로 알았던 이름이 사실은 ‘넙추이’도 아니고, ‘늦추이’도 아니고 ‘늦출이’였다는 식의 작명 비화는 성석제의 작품에서 기대하는 재미에 부응한다.

    늦출이가 넙춘이로 미끄러지는 것과 같이 영빈관(迎賓館)은 인빈간(人貧間)으로, 사직단(社稷壇)은 사지땅(死地)으로 미끄러지는데, 하나의 이름과 또 다른 이름 사이에서 성석제는 그 특유의 사람 사는 이야기를 빚는다. 이것은 사투리와 억양이 만들어내는 말놀이이면서, 각각의 독음을 통해서 삶의 정서까지 환기하게 만들어준다.

    가령, ‘사직단’은 과연 ‘사지땅’답다. “사지땅 뒷산은 무덤 천지였다. 사지땅이 아니라 묘지땅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 여우가 사람을 홀려 간을 빼가고 늑대가 아기 울음을 흉내내어 여자들을 꼬여낸 뒤 잡아먹는 곳. 그래서 무덤이 더 불어나는 악순환의 공동묘지, 사지땅.”(p.47) 요컨대, 성석제 특유의 말놀이는 ‘이야기의 유희’가 가능한 하나의 텃밭인 셈이다.

    그는 더 이상 능청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 텃밭에서 태어나야 할 것은 아마도 희극과 비극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뒤섞는 능청스러운 솜씨일 터. 헌데 어찌된 일인지 작가는 더 이상의 능청을 보여주지 않는다. 「환한 하루의 어느 한때」에서도 역시 성석제의 유머는 ‘날씨가 참말로 좋다’는 발화 앞에서 멈추어 서고 만다.

    어쩌면 “날씨가 참말로 좋다”는 간투사야 말로 성석제의 능청인지 모른다. 말하자면 날씨 운운하며 이쯤에서 화제를 돌려 진짜 속내를 드러내려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고귀한 신세」의 주인공 박희제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는가. 대학병원에서 ‘조화로운 삶’에 관해 강연을 해야 하는 박희제는 강의 주제가 주제인 만큼, 걷기운동의 전령사인 만큼 일부러 차를 두고 길을 나섰으며, 지금 병원을 코앞에 두고 횡단보도 건너편에 서 있다.

    박희제가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모습에서 소설은 시작하지만 살아서 병원에 도착하지는 못한다. 신호가 바뀌는 순간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를 일으킨 트럭 운전사의 말을 빌자면 “아이고마, 신세 조짔네!”가 된 것이다.

    4,200cc 8기통 외제차, 걷기운동, 유기농 허브와 와인, 규칙적인 성생활 등이 박희제의 삶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조화로운 삶’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안전한 삶’에 대한 번역어라고 해두자. 그런 삶이 과속 트럭이 빗길에 미끄러지는 사고를 피하지 못했다.

    성석제는 이 우연한 사고로 지금-이곳의 삶의 양태와 풍속을 날렵하게 스케치한다. 이때 그의 스케치는 ‘참말로 좋은 날’이라는 간투사와 겹쳐지면서 우리 시대의 씁쓸하고 아이러니한 풍경의 단면을 드러낸다.

    무능한 가장의 극단적 추락

    「고귀한 신세」가 자본주의적 삶에 제어당하는 중산층의 허위를 여유 있게 발가벗기고는 있다면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는 그 반대편에서 분노에 가까운 정서를 폭발시킨다. 예기치 않은 성석제의 소설적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작품이라 할 만한다.

    작품은 “구상과 현대성이 마주치는”, “민중미술의 메시지와도 상관없는 원론적이고 순수한 차원의”(p.204) 극사실주의 화가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경매와 압류로 인해 한 가정이 극단적인 파국을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에게는 가진 돈이라고는 사이버머니가 전부였으므로 경매에 넘어간 아파트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그는 화가이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능한 가장인 것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빈곤한 현실을 다만 곤란해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극단적 추락을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성석제는 자신의 작중 인물에게 극사실주의 작품을 그리게 하는 대신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를 극사실주의적으로 만들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미리 말하건대, 여기에는 웃음의 서사가 들어설 틈이 없다.

    “엄마는 보청기 갖고도 안 들리고 수술을 해야 된대. 수술을 해도 나을 가능성이 반도 안 된대. 우리 엄마 이제 못 들으면 어떡해. 엄마, 엄마, 불쌍해서 어떡해, 우리 엄마. 돈 내놔, 아빠. 엄마가 귀 다 닳아가면서 전화기에 매달려가지고 이때까지 벌어준 돈 내놓으란 말야. 돈! 돈!”(p.246)

    현실의 살풍경과 언어적 좌절

    중학생 딸이 제 아버지를 향해 퍼붓는 소리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절대적인 무력함과 절대적인 침묵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아내는 현실의 살풍경을 고스란히 응축하고 있다.

    수도료를 연체했고, 보일러의 기름이 떨어졌으며, 동네 구멍가게에서는 외상으로 라면 한 박스조차 살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남자는 끝내 아내를 향해 내지른다. “그런데 정말 말을 안 할 거야? 입은 뒀다 어따가 써! 왜 만사 손가락질이야! 병신처럼! 말을 해! 말을!”(p.272) 텔레마케터였던 아내는 더 이상 듣지 못하며, 듣지 못하므로 말하지 못한다.

    말을 말로서 되돌려주지 않는 현실을 향한 일방적인 윽박지르기. 상황은 악화일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장면(p.275);
    “왜 아니꼽숑? 꼬우면 찢어지자고. 애 데리고 장모한테 가.”
    그의 아내는 대꾸하지 않는다.
    “세미야, 가방 싸라.”
    그의 딸도 말하지 않는다.
    “장모님, 저 목석하고 못 살겠어서 택배로 보냅니다.”
    전화기에는 신호음도 응답도 없다.
    “아, 이것들이 다 짰나. 왜 전부 다 말을 안 하는 거야.”
    그는 취해서 중얼거렸다.

    어쩌면 작가는 이런 현실의 살풍경 앞에서 언어적으로 좌절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의 한 남자는 “왜 전부 다 말을 안 하는 거야”라며 중얼대고, 소설을 쓰는 또 다른 한 남자는 이들이 직면한 하루하루를 유려한 이야기로 도저히 풀어갈 수가 없다는 듯 두어 문장으로 끊어버린다.

    “말을 해, 말을 해! 말을 해요!”

    그는 그 하루하루의 이야기를 늘여 쓰는 대신에, “화분이 하나도 남김없이 말라 죽는다”(p.278)고 선언해 버린다. 말라 죽는 화분처럼 이들 가족의 처소인 아파트 역시 퍽퍽하게 말라 죽어가는 중이다. 때문에 문장들 역시 그 삶을 능청 떨며 드러내지 못한다. 예의 성석제에게서 기대하는 장광설이 없다는 것이다. 현실의 참혹함 앞에서 말도 말라 죽는다. 그러므로 한 번 말하건대, 여기에는 웃음의 서사가 들어설 틈이 없다.

    “말을 해, 말을 해! 말을 해요!”(p.283) 새로운 낙찰자와 법원의 집행관들이 들이닥친 날, 아파트 베란다 아래로 추락한 아내를 끌어안고 남자는 허둥댄다. 아내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하는 것 같았으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으며, 남자는 “말을 해!”라고 울부짖지만, 실은 “생각일 뿐”이다.

    “눈물도 소리도 나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없는 세상에 들어온 것 같다.”(〃) 자본주의의 강퍅한 현실과 그것의 난폭한 ‘적법성’ 앞에서 누구도 의미를 가진 ‘소리’를 생산하지 못한다. 다만 모두들 귀가 멀고 입이 닫힐 따름이다.

    “말을 해, 말을 해! 말을 해요!”라는 남자의 울부짖음에서 성석제의 목소리가 들린다. 스스로 나서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말의 향연을 펼쳐왔던 성석제는 이제 세상을 향해서 말을 생산하는 것의 지독한 통증을 호소하는 중이다.

    들을 수 없음으로 말을 잃은 아내 곧 세상의 안주인. 내지인과 외부인에게 들려줌으로써 이야기의 힘을 발하는 장광설이 삭제된 소설. 이것은 성석제의 소설에서 사실상 같은 것을 의미한다. 성석제는 비정한 세상에 말로써, 그리고 웃음으로써 모욕을 안겨주지 않고 있으며, 저 무력한 남자와 여자와 아이를 말로써, 그리고 웃음으로써 껴안아주지 못하고 있다.

    현실은 언제나 소설을 호명한다

    압류에 처해진 것은 비단 아파트만이 아니라 바로 삶과 말인 것이다. 해학의 언어를 통해 세상의 적과 맞설 때, 세상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기는 할지언정 비극 그 자체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아내의 죽음은 곧 말의 죽음이며 그것은 그 자체로 비극을 의미한다.

    생각해보라. 비록 웃음과 풍자일지언정 웃음과 풍자로 복수할 수 없는 세상은 그야말로 야만이다. 「저만치 멀리 피어 있네」에서 성석제는 세상에 대한 복수를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웃음의 복수’는 전적으로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죽음’을 통한 복수는 또한 노골적으로 비극이다.

    소설집의 말미에서 성석제는 “내가 바뀐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바뀌는 게 당연한가. 그럴지도 모른다”고 낮게 고백한다. 『참말로 좋은 날』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아프다. 하나는 그의 고백 자체이다. 그는 자신이 바뀌었다는 말로 자기가 처한, 소설로는 가닿을 수 없는 당대의 ‘포스’를 고백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그 포스에 맞서는 농담과 해학과 웃음의 서사가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이곳에서 ‘황만근’이 사라졌고 소설의 그 어떤 유효한 전략이 폐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성석제의 ‘패배’를 서둘러 말하거나 혹은 ‘풍자냐 자살이냐’라고 지레 가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선택은 여전히 작가의 몫이다. 현실은 언제나 소설을 호명한다. 작가는 자신의 현실에서 숨을 곳이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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