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이니치와 함께 걸어온 반세기
    [신간]『공생을 향하여』(다나카 히로시 외/생각의힘)
        2023년 02월 18일 08: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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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늦게나마 알아야 할 이름들이 가득 담긴 책이 출간되었다. 지난 반세기에 걸친 자이니치 투쟁사와 각각의 현장을 뜨겁고 날카롭게 증언하는 《공생을 향하여》이다. 무엇보다 먼저 붙잡아야 할 이름은 저자 다나카 히로시다. 한국 사회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경제학자이자 현재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로 있는 그의 전문 분야는 일본-아시아 관계사, 포스트 식민지 문제, 재일 외국인 문제, 일본의 전후 보상 문제 등이다. 그가 걸어온 궤적 자체가 차별과 편견을 깨부수는 투쟁의 역사였고, 그 중심에는 자이니치가 있었다. 손진두, 송두회, 박종석, 최창화, 김경득, 강부중, 정향균 등 수많은 자이니치가 그와 함께 걸었다.

    다나카 히로시는 주로 자이니치 2세 이후 세대가 짊어진 대부분의 권리 운동에 깊이 관여했고, 함께 달려왔다. 문자 그대로 자이니치 인권 투쟁의 살아 있는 증인이다. 그 숱한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책의 또 다른 저자인 나카무라 일성이 함께했다. 그들은 2016년을 시작으로 오래고 긴 인터뷰를 거듭하며 ‘투쟁의 철칙’을 묻고, ‘양보할 수 없는 선’을 말하며, 이다음을 살아가는 데 기준이 될 반석을 지면에 적었다. 이후 잡지 연재를 거쳐 추가 인터뷰를 더한 단행본이 2019년 일본 사회에 출간되었고, 2023년 한국 사회에 도착했다. 진정으로 타자와 ‘공생’하기 위해 분노하면서도 끝내 희망을 놓지 않았던 여러 목소리를 담은 이 값진 작업물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한겨레〉 길윤형 기자가 맡았다.

    “내가 만나고 겪은 자이니치들은 『파친코』의 등장인물들과 닮았으면서도 크게 달랐다. 이들은 일본 사회의 차별과 편견 속에서 시름하면서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필요한 경우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따금 앞뒤가 꽉 막힌 것처럼 보였던 절망 속에서 값진 승리를 얻어냈다. (중략) 지금도 수많은 자이니치가 일본 사회 내에서 크고 작은 차별과 편견과 맞서 싸우고 있다. 이들이 택한 것은 차별과 편견에 분노와 증오로 맞서는 폭력의 길이 아니었다. 민족적 자긍심을 지키면서도 일본 사회 속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고 평범하고 안온하게 살려는 ‘공생’의 길이었다.” _‘옮긴이의 말’ 중에서

    천 엔 지폐, 잊혀진 황군, 대동아전쟁 긍정론
    1960년대 일본은 어떤 시대였는가

    다나카 히로시가 제도화된 인종주의를 상대로 투쟁의 삶을 결의하게 된 것은 1960년대 유학생들과의 만남이 계기였다. 당시 일본 사회는 안보 투쟁이 한창이었다. 변혁의 움직임과 여러 혼란으로 이글대던 시기였다. 그와 동시에 경제적으로는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여러 허구와 기만의 얼굴을 하고 ‘전후사’를 써나가기 시작하는데, 저자들은 바로 이 대목에 주목한다. 그들은 1960년대 일본 사회를 두고 “‘역사 인식’과 ‘반차별’이라는 타자와 공생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반을 확립하는 데 완전히 실패해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15쪽)고 평가한다. 다나카 히로시는 특히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이 시기를 바라본다. ‘천 엔 지폐’, ‘잊혀진 황군’, ‘대동아전쟁 긍정론’이 그것이다(51쪽).

    먼저 ‘천 엔 지폐’ 사건은 이렇다. 1963년 11월 다나카 히로시는 ‘아시아문화회관’에서 근무하며 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들과 관련한 일에 몸을 담고 있었다. 어느 날 도쿄에 유학을 와 있던 동남아시아 화교 유학생이 그를 찾아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다나카 씨, 일본인은 역사를 어떻게 배우고 있는 거냐. 전쟁 전의 일본이라면 모르겠지만, 전후에 새로 태어난 일본에서 왜 굳이 이토 히로부미를 지폐에 끄집어내나. 이토는 조선 민족에게 원한을 사 하얼빈에서 살해당한 사람이 아닌가. 일본에 가장 많이 사는 외국인인 조선인도 같은 천 엔짜리 지폐로 매일 물건을 사야 하는데 몹시 잔혹한 일이 아닌가. 게다가 매일같이 정부를 비판하는 문화인· 지식인이 그렇게 많아도 누구 하나 이토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비판하지 않는다. 1억 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쩐지 섬뜩하다.”(335쪽) 당시는 천 엔 지폐의 인물이 쇼토쿠 태자에서 이토 히로부미로 바뀐 시점이었다. ‘진주만에서 시작해 원자폭탄으로 끝나는’ 역사적 사실 안에 있던 다나카 히로시에게 이 일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잊혀진 황군’은 마찬가지로 1963년에 방영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제목이다. 식민지 시대 일본군으로서 출정해 회복할 수 없는 장애를 입었지만,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보상받지 못한 자이니치 상이군인들의 모습을 추적한 작품이다. 일본 보훈제도부터 살펴보자면 전상병자 전몰자 등 지원법안이 1952년 국회에 제출된다. 전몰자 유족 단체인 일본유족회의 정치적 영향력에 따라 전몰자 유족에 대한 원호가 강화되던 시기가 바로 1960년대다. 그리고 이때 ‘국적 조항’이 발목을 잡으며 옛 식민지 출신자를 대상으로 철저한 배제 체계가 만들어진다. 이 문제는 20여 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논의가 시작되고, 다나카 히로시는 1988년 10월 ‘자이니치 옛 식민지 출신자에 관한 전후 보상 및 인권보장법’ 초안을 발표한다. 법정에서 다큐멘터리 〈잊혀진 황군〉을 상영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사법 투쟁에서는 끝내 패소하고 만다. 그러나 이후 정치와 시민이 움직이며 ‘잊혀진 황군’들은 일본을 상대로 각지에서 전후 보상 재판을 일으키는데, 다나카 히로시는 이 싸움에도 연대했다.

    마지막으로 ‘대동아전쟁 긍정론’은 작가이자 평론가인 하야시 후사오가 1963년 9월부터 1965년 6월까지 〈주오코론〉에 연재한 원고 제목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일본이 대항해 아시아의 독립을 지키려던 싸움이었지만 그 이념이 왜곡된 비극이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으며, 도쿄재판을 전면 부정하는 글이다. 연재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일본은 100년 동안 아시아를 위해 싸워왔기 때문에 조금 쉬는 게 좋다”는 주장도 적혀 있다. 자극적인 ‘긍정론’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우익 잡지가 아니라 일본 사회의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발행하는 〈주오코론〉에 연재가 되었다는 점에서, 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위기감을 건네기에 충분했다. 베트남전쟁이 한참 진행 중이었고 히비야 공원에서는 ‘베트남 반전 운동’(베헤련)이 매일같이 벌어지던 때였다. 이렇듯 1960년대에 다른 아시아인들과 어긋난 감각을 경험한 일이 다나카 히로시의 원점이 되어 이후 투쟁의 길로 그를 이끌었다. 책은 그로테스크한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나라’의 성립과 현상 그리고 향후의 과제를 논하는 데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히타치 취업 차별 재판부터
    고교무상화 재판에 이르기까지

    총 16장으로 구성된 책은 ‘배제’와의 오랜 투쟁을 구석구석 꼼꼼히 돌아본다. 피폭 치료를 위해 일본에 밀항한 뒤 치료받을 권리를 주장하며 일본 사회를 상대로 법정 투쟁에 나선 손진두의 싸움을 시작으로, 자이니치 권리 신장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박종석의 히타치 취업 차별 재판, 한국 국적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일본인에게만 입소를 허용했던 사법연수소의 문을 열어젖힌 김경득, 1980년대 일본 사회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지문날인 거부운동, ‘잊혀진 황군’이라 알려진 자이니치들의 전후 보상 운동, 제도적 인종주의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는 공무원·교사 임용의 국적 조항 철폐 투쟁, 외국인 참정권 운동, 나아가 식민지 지배로 인해 빼앗긴 언어와 문화와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공간으로 만들어진 민족학교에의 탄압에 맞선 움직임 등 굵직굵직한 싸움의 역사가 다나카 히로시 특유의 시원시원한 말씨로 종횡무진 이어진다. 그와 함께 지금보다 엄혹했던 시기에 자신의 정체성에 우뚝 서 투쟁해왔던 자이니치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또렷이 살아 한국 사회를 찾는다.

    시대가 낳은 투쟁, 히타치 취업 차별 재판의 원고인 1951년생 박종석의 이야기는 이렇다. 1970년 히타치제작소 입사 이력서에 ‘통명’(자이니치가 본명인 조선 이름 대신 사용하는 일본식 이름)을 써서 합격하는데,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입사 결정이 취소된다. 박종석은 그해 12월 민사소송을 제기한다. 그는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이 재판에 이기든 지든 자신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히타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77쪽)라는 발언을 남긴다. 차별에 맞닥뜨리고 대항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 것이고, 이는 이후 많은 자이니치에게도 뒤따르는 순간이었다. 거대 기업 히타치와의 싸움에서 본명을 공개하는 결단을 내리며 긴 여정을 이어간 재판은 승소를 거머쥐는데, 이 역사적 승리로 불붙은 반차별·권리 획득 운동의 물결은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인권 투쟁으로 발전한다.

    또 하나의 획기적인 투쟁의 주역, 1949년생 김경득은 1976년 외국 국적을 가진 채로 변호사가 되겠다면서 일본 최고재판소에 임용을 요구한다. 최고재판소는 연수소 입소 자격에 국적 조항을 두고 외국 국적자를 배제해왔다. 신청 단계에서 ‘귀화’를 약속하면 가입소가 인정되기에, 김경득 이전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던 자이니치 열두 명은 모두 귀화를 선택한 바 있었다. 김경득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사실과 논리로 일관했고, 최고재판소는 ‘맥없이’ 문호를 개방한다. 이토록 근거 없는 국적 조항이 오랜 시간 사람들을 배제해온 것이다. 자이니치 한국인 변호사 제1호 김경득은 이 일을 계기로 여러 권리 투쟁에 함께하며 힘을 싣는다. 다나카 히로시는 그가 개척한 길을 대신하여 열거하며 그 의미를 전한다.

    책의 중반부를 지나면, 에다가와 재판(도쿄조선제2초급학교)이나 조선학교 고교무상화 배제를 둘러싼 법정 투쟁 등 2000년대의 움직임이 언급된다.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자이니치 집단 거주 지역인 도쿄도 고토구 에다가와. 이곳에는 1945년에 설립된 에다가와 조선학교가 있다. 2003년 12월 도쿄도가 재판으로 ‘퇴거’를 압박해온다. 도쿄도와 임대계약이 끝난 땅에서 조선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불법 점거’라고 주장하는 구민들이 주민 감사를 청구한 게 계기였다. 다나카 히로시는 “식민지 지배로 조선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빼앗은 일본은 이를 회복하기 위한 장소, 즉 조선학교를 지킬 의무가 있다”는 주장으로 맞선다. 여러 시민단체와 함께 투쟁을 이어가던 중 조선학교 지원단체인 ‘몽당연필’의 사무총장으로 당시 홋카이도의 조선학교를 촬영 중이었던 김명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가 2006년 한국에서 개봉되면서 연대의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에다가와 재판은 2009년 도쿄간이재판소에서 ‘즉결 화해’가 성립되며 실질적 승소를 거둔다. 에다가와에서 함께했던 자이니치 변호사들은 이후 (아베 신조 전 총리 시절인 2013년 일본 정부가 고교무상화 정책 대상에서 조선학교를 배제한) 고교무상화 재판의 대리인이 되는데, 다나카 히로시는 이 연대의 계승을 목소리 높여 강조한다.

    한편 고교무상화 재판은 2013년 1월 아이치와 오사카를 시작으로 도쿄, 후쿠오카, 히로시마 등 다섯 개 지역에서 민사소송이 시작되는데 오랜 공방 끝에 2021년 7월에 이르러 다섯 건 모두 원고 패소로 종결한다. 이에 대항하는 집회 ‘금요행동’이 여전히 도쿄 문부과학성 앞에서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 연구 제1인자라 할 수 있는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이제 식민지는 없어졌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식민지가 사라졌어도 이렇듯 문제는 남아 있다. 다나카 히로시는 ‘부정적인 역사’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에 관해 고민한다. 그리고 지난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단계에서, 조선학교는 가장 중요한 존재이자 일본 사회에 귀중한 자산이라고 제안한다. “내 의견을 묻는다면 조선학교는 솔직히 말해 자이니치들에게 보물이지만, 동시에 일본 사회에도 보물이라고 생각합니다.”(322쪽)

    공생으로 가는 길을 향해
    한국 사회에 도착한 메시지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운동에 참여한 당사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경험에서 빚어낸 구체적인 언어로 지난 역사를 회고한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각 투쟁이 진행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핵심 쟁점, 운동에 함께한 이들의 생각, 일본 사회와 이후 운동에 끼친 영향 등이 일목요연하면서도 생생하게 활개를 치며 독자를 향해 달려든다. 196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인권 투쟁의 역사를 듣는 매우 행복한 시간을 홀로 독점할 수 없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한 나카무라 일성의 결심이 빛이 발하는 대목이다.

    여러 투쟁기가 펼쳐지지만, 모두 하나의 거대한 질문 아래 모인다. 책은 “국적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관절 국적이란 무어길래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자”라는 열 글자에 그토록 무시무시한 힘을 부여하는지, 차별을 합리화하는 마법의 장치가 되어 배제와 감시를 정당화하는지 책은 묻는다. 국적 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이 모든 행위는 차별임이 명확해진다. 그런데도 ‘국적 조항’이나 ‘국적에 의한 차별’은 재판에서 이긴 적이 없다. 법 아래 평등에 반한다는 판결이 나올 수 있는 사안인데도 사법은 절대 구제하지 않는다. 다나카 히로시의 표현에 따르면, “정말로 엉망진창”이고, “법치국가가 아닌 것”이며, “이 나라가 법의 지배나 법치주의라는 것에서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 알 수 있”다(116쪽). 그러나 앞서 세상을 살아간 이들의 투쟁은 “법을 부수고 악법을 저격하는 투쟁”이었다. 운동으로 길을 열어젖힐 수 있고, 권리를 신장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가능했던 일이다.

    도쿄에서 보건사로 일하던 정향균(1950년생)은 외국 국적을 이유로 관리직 시험을 거부당한 후 진행한 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차별에 지고 싶지 않다. 굴복하고 싶지 않다. 문제에 부딪힌 인간이 거기에서 멈칫하면, 또 다음 사람이 같은 일을 당한다. 역시 처음 부딪힌 인간이 결심하고 나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음을 굳히게 됐다.”(215쪽) 자신의 존엄을 위해, 다음 세대를 짊어지게 될 동포들이 같은 차별을 맛보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차별 가운데 살아갔던 앞선 이들에게 정의를 되돌려주기 위해 그들은 투쟁했다.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현장을 지키는 실천적 지식인 그리고 자이니치 투쟁사에 뜨거운 한 획을 그은 수많은 자이니치가 걸어온 삶의 궤적이 우리 사회에 묻는다. ‘공생’이란 진정 무엇이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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