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우선주의에 대한
    착각을 버릴 수 있을까?
    [기고]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을 보며-2
        2023년 02월 15일 03: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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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된 앞의 기고 글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우리는 돈(행복)에 대해 착각을 하고 있다. 행복은 어떤 목표가 아니다. 행복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 주게 되는 의미이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소위 일류대학에 못 갔다고 구박하는 부모들은 나중에 자식이 늙어 그때 가서 후회해보아도 이미 늦다. 또는 아들이나 딸이 결혼 상대를 만나고 있을 때 그 상대가 어떤 기준(목표)에 못 이른다고 반대해서 결혼을 못하고 자식이 외롭게 늙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주위에서 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잘 살고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기준만을 고수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을 깔보고 업신여기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인 위계서열과 차별을 없애는 것도 도덕적으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상투적인 말로는 백년이 지나도 해결하지 못한다. 앞에서 얘기한 착각에서 벗어나면 된다.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은 무슨 얘기인지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젊은 여성들도 이해할 것이다.

    현재 우리사회가 난방비 때문에 난리인데 이에 비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는 전기 값 같은 것도 차이를 두어 혜택을 준다. 그러면 금방 많은 사람들이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언급하듯이 포퓰리즘도 나름의 정치적 논리(이성)를 지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GDP 숫자, 부동산 투자(?)를 통한 큰 아파트 평수, 외제 고급차등 가시적인 목표를 달성하면 행복할 것으로 착각한다. 현대에 그런 대중심리를 최대한 부추기는 정책을 펴서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조국 근대화”를 정치적 구호로 내세운 경제우선주의를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중심국가인 미국의 구미에 맞추고 근대성을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신앙처럼 만든 사람이 박정희이다. 이를 위해 새마을 운동 등 다양한 전략을 가히 천재(?)적으로 만들어냈다. 아니 박정희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열렬하게 신봉한 김대중 등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친미적 자유민주주의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중요한 맥락중의 하나는 일제 강점기부터 조국의 해방이후 우리사회가 순수한 마음으로 진보와 번영으로 나아가길 꿈꾼 사상가([사상계] 잡지를 포함하여), 지식인들이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은 (교활한)근대성과 세계체제에 대해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보다 순진한 것 같다. 라틴아메리카의 인문학과 사회과학 대학원에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단어가 ‘정체성’인데 이는 곧 근대성과 세계체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근대성은 앞으로 직진하는 성향을 보인다. 발전, 개발, 진보 등등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도 근대성의 대표적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근대성은 개인, 자아, 사유재산을 신앙처럼 받든다. 기독교가 물론 뒤를 받쳐주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타자를 배제한다. 그러므로 유럽에서 인종주의가 출현한 것이다. 역사발전의 일직선의 흐름에서 뒷전에 밀린 국가를 과거에 후진국이라고 불렀고 요즘에는 개발도상국이라고 한다. 그게 그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1960년대 초반에 우리 사회에 열광적으로 도입한 계기가 로스토우의 단계발전이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1950년대에 트루먼 대통령의 후진국(특히 라틴아메리카 등)에 대한 미국의 헤게모니를 위한 정치경제 전략이었다.

    결국 우리는 행복에 대해 도착적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그 좋은 증거가 2021년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 결과이다. 조사대상 17개 국가 중 우리만이 유일하게 물질적 행복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선택했다.

    같은 아시아의 4마리용들 중 하나로 우리처럼 장개석이라는 독재자를 가졌던 나라이고 최근에는 우리처럼 세계적 반도체 강국으로 주목받는 대만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경제 성장방식,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배울 점이 많다. 특히 저 출산 문제가 아주 심각한 우리로서는 애기 출산이후 남녀 모두 우리보다 훨씬 유급 휴가가 발달하였고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도 다르고 그리고 대기업만이 아니라 중소기업의 위계도 높고 등등. 하지만 1960년대 이래 수십 년 동안의 경제 성장 경로가 다르기 때문에 이제 와서 바꾸려고 해도 진통이 크다. 왜냐하면 그동안의 경로에 의해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레토릭)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에 대한 착각의 근원은 일제 강점기부터 아니 오랜 옛날부터의 샤머니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제 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옛날에도 춥고 배고픈 자연의 환경에서 생명 유지 자체가 힘들었던 그런 체험 말이다. 해방 후에도 전쟁을 치렀고 그 전에도 전쟁 못지않은 대규모 학살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의 대중의 마음속은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못 벗어났다. 어떤 역사적 원체험 또는 무의식으로 작동하는지도 모르겠다. 믿을 것은 돈밖에 없고 빌 곳은 무당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부터 서낭당, 마을 굿은 미신으로 치부되어 억압받았다. 그러나 마을에서 굿을 하면 누구를 위해 빌 수밖에 없나? 마을의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마을의 약자를 위한 공동체 의식은 점차로 왜곡되어왔다.

    여기서 우리 사회와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집단의식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곳에서는 잉카시대 이전부터 원주민들은 공동생산의 수확물의 1/3을 사회의 장애인, 노인, 병자, 예술가를 위해 썼다고 한다. 어느 사회든지 엘리트 중의 엘리트는 예술가인데 라틴아메리카는 이미 1960년대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근대성과 자본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해왔다. 예를 들자면 시인인 세사르 바예호(페루)와 소설가인 훌리오 꼬르타사르(아르헨티나)는 근대성의 상징도시인 프랑스 빠리에서 굶어 죽었다. 물론 가르시아 마르께스(콜롬비아) 같이 세속적으로 출세한 사람도 있지만. 이에 비해 우리의 어느 시인과 원로시인의 행태는 매우 징후적이다.

    이들은 이런 독특한, 노동능력이 약한 사람들에게 그냥 선물을 주는 공동체성의 삶의 의미를 약 500년 이상 묵묵히 가져왔다. 단절되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진 것이다. 구체적으로 안데스 지역의 경우, 아이유(Ayllu) 공동체를 들 수 있다. 현재에도 많은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에서 ‘꼬무나스(Comunas)’는 실존한다. 이를 영어로 번역하면 ‘커먼스’가 되지만 맥락과 뉘앙스가 다르다. 이상하게도 원주민들은 서구식 근대교육, 근대적 개발 정책 등을 거부했다. 특이한 에피소드들도 많다. 참 놀랄만하고 어떻게 보면 매우 이상하다.

    흥미로운 것은 식민 초기인 16세기에 스페인 왕실은 가톨릭 전교에만 진심이었고 정복자들에 의한 지나친 원주민 착취와 학살도 반대했고 심지어는 분리주의적인 “두개의 공화국”정책을 통해 원주민의 자율적 문화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원래 식민 초기 스페인 식민정부는 효과적인 식민화를 위해 스페인인과 원주민의 결혼을 장려했다. 그러나 곧 혼혈정책에서 인종분리정책으로 선회했다. 혼혈인인 메스티소인구의 증가에 의한 반란세력화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17세기와 18세기는 스페인이 퇴락한 시기였고 현지의 백인 후손인 끄리오요 들은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위해 스페인과 거리를 두는 정책을 시행했고 이런 충동이 19세기 초에 식민지 독립으로까지 이끈 것이다.

    현재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기후위기 등의 이유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 사이의 사회관계에서도 대변혁의 비전을 얘기하게 된 맥락에서 원주민의 “좋은 삶”(부엔 비비르) 철학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좋은 삶이란 무조건 도덕적 가치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냐와 직접 연결된다.

    그러나 이런 원주민의 독특한 ‘관계’중심의 철학과 비전을 무조건 고집 또는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적 자본주의, 근대성의 철학과 대등하게 병행하고 대화하자는 것이 바로 2009년 볼리비아의 헌법에 규정된 “복수국민 국가“의 주장이다. 즉 인종주의를 단절하자는 얘기이다. 다시 말해 서구적 가치관에 근거한 더 많은 소유와 ‘폼 나는’ 소비주의도 다양한 삶의 방식 중의 하나로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원주민적 공동체성에 근거한 인간사이(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도 포함하여)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자는 유토피아적 비전도 인정하자는 것이다.

    쉽지 않은 얘기이다. 왜냐하면 거의 천년동안 유지되어온 서구우위의 보편적 가치관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서히 조금씩 변화하자는 점진성이 중요한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서구보다도 더 서구적인 근대성의 첨단 국가가 된 셈이다. 그런데 행복은 어디 있는가?

    필자소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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