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헨티나 5월 광장 어머니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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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08일 08: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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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의 인권말살을 전 세계에 고발한 5월 광장 어머니회는 매주 목요일 오후 3시에 집회를 갖는다. 하얀 머릿수건을 두르고 침묵시위를 하는 어머니들의 강렬한 눈빛과 갑옷처럼 단단해 보이는 몸짓은 오랫동안 고통을 이겨내며 투쟁해온 역사를 말해준다.

    1977년 4월 13일 오후, 어머니 14명이 5월 광장 동편에 앉아 있었다. 강제 실종된 자식의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해봤으나 도무지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 궁에서 훤히 내다보이는 ‘5월 광장’에 모인 것이다. 오후 3시 15분이 되자 어머니들은 가방에서 하얀 머릿수건을 두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창한 구호도, 요란한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원을 그리며 걷고 또 걸었다 한다.

    1977년 말, 5월 어머니회의 부회장이 납치되고, 며칠 뒤에 프랑스 수녀 둘이 연행되었다.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이들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매주 목요일 정기적으로 5월 광장에 나타나 아기 기저귀 천으로 만든 흰색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침묵시위를 함으로써 아르헨티나 민주와 인권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 5월 광장 어머니들의 목요집회 모습. 왼쪽이 설립자노선인 5월 광장 어머니회(Madres de Plaza de Mayo), 오른쪽이 5월 광장 어머니 협회(Asociacion Madres de Plaza de Mayo).
     

    우리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던 2006년 9월 19일, 5월 광장 어머니 협회에서 활동하시던 분이 돌아가셨다. 우리는 준비해간 공연을 하지 못했고 조용히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장례식 역시 목요집회의 침묵시위처럼 소박하고 조용하게 치러졌다.

    30여 년간 실종당한 아들을 가슴에 품고 아픈 기억을 증언해왔던 어머니의 뼛가루는 그녀가 매주 목요일마다 밟아온 5월 광장에 뿌려졌다. "나는 죽어서도 학살의 역사가 이 땅에 재현되는 일이 없도록 이 광장을 지킬 것이다"라는 곧은 의지를 나타내듯, 5월 광장 나무 아래에 뿌려지고 있는 어머니의 뼈는 고운 가루라기보다는 단단한 돌멩이들처럼 다부지면서도 거칠어 보였다.

    광장에서 장례식을 지켜보던 시민들과 젊은 활동가들은 눈물을 닦고 있었다. 하지만 5월 광장의 어머님들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눈물을 참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지 않아!” 바로 전날, 5월 광장 어머니 협회(Asociacion Madres de Plaza de Mayo)의 사무실에 방문했을 때 어머니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5월 광장 어머니 협회는 죽은 자식의 사체 발굴을 거부하고 있다. “내 자식은 죽지 않았다. 산 채로 데려갔으니 산 채로 돌려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로부터 자식들의 실종과 죽음에 대해 어떠한 금전적인 보상도 받지 않는다. 우리 힘으로 대학과 방송국을 운영하고, 서점과 까페도 운영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교육하고 정치 활동하고 있다.”

       
    ▲ 5월 광장 어머니회 사무실. 뒤 쪽에 카스트로, 차베스, 사빠띠스타 등과 함께 연대한 사진들이 걸려있다.
     

    사람들은 끔찍한 사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에 대해서는 하루 빨리 잊고 싶고, 자발적으로 침묵하려는 경향이 있다. 기억을 억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끔찍한 사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에 대해서는 하루 빨리 잊고 싶고, 자발적으로 침묵하려는 경향이 있다. 기억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러나 5월 광장 어머니들에게 있어서 ‘기억’은 깨어있는 일이고, 정치ㆍ문화적인 실천 행위가 되고 있다. 불행한 과거이므로 더욱더 기억해야 하고, 공권력에 의한 학살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교육해야한다는 것이 5월 어머니들의 입장이다.

    그들은 당신들의 혈육 문제에만 갇히지 않고 부조리한 역사를 알리고 저항의 역사를 계승하기 위한 노력, 국가로부터의 보상이나 기념비 건립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을 세워서 사회 활동가들을 양성하고 자신들의 방송국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가며 자존심과 품위를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목요집회에서 또 다른 어머니들의 행렬을 보았다..이 분들은 강제 실종당한 자식들의 초상화를 들고 걸었는데, ‘5월 광장 어머니회의-창립자 노선(Madres de Plaza de Mayo-Linea Fundadora)’의 회원들이었다.  5월 광장 어머니 단체는 1977년에 함께 출발했지만 ‘강제 실종자 사체 발굴’에 대한 입장이 달라지자 1986년에 분리 되었다.

       
    ▲ 5월 광장 어머니 협회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사회과학 서점과 까페가 있어서 누구나 드나들며 5월 광장 어머니들의 존재를 알게 한다.
     

    5월 광장 어머니회의 사무실은 협회와는 달리 광장 뒤편의 골목, 어느 빌딩의 3층에 사무실을 조촐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이 분들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간디와 체 게바라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실종자들의 사체가 발굴된 지역이 표시된 아르헨티나 지도도 보이고, 빈민지역 어린들과 주민들의 문화예술교육을 지원하는 활동사진들도 볼 수 있었다.

    5월 광장 어머니회의 간사와 어머님 두 분이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셨고, 자신들이 발행하고 있는 신문을 꺼내주시면서 군부 쿠데타에 의해 8년간 자행된 ‘추악한 전쟁’에 대해, 현재 진행 중인 문제들에 대해 설명 해주셨다. 

    이날, 들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끔찍했던 일은 수용소에 있는 임산부의 아기들을 ‘전리품’처럼 장교들에게 나누어줬다는 것이다. 그렇게 장교들에게 선물로 들어간 아이들은 자신의 모태를 제거한 학살자들의 손에서 길러졌다는 것이다. 도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 걸까…

    육군 참모총장 비델라를 총사령관 겸 대통령으로 추대한 군부는 ‘국가 개조’라는 미명하에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게릴라 소탕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희생된 자들은 노조지도자, 노동자, 정당지도자, 정당인, 임신부, 학생, 작가, 어린아이, 외국인 등 각계각층에서 속출했다고 한다. 강제 연행된 용의자들은 전국의 340여 개의 비밀 수용소에 수감한 후 정보를 캐내기 위해 고문을 했으며 대부분이 사망했다.

    이 추악한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은 강제 실종 3만명, 강제 입양 500명, 정치범 1만명, 정치적 망명자 또한 30만명에 달한다. *(‘사이버 민주ㆍ인권 국제관’ 참고)

       
    ▲ 강제 실종자들의 초상화를 들고 목요 집회에 참가한 5월 광장 어머니회
     

    5월 광장 어머니회는 군정 피해자 가족들과 함께 실종자 발굴 작업을 함과 동시에 군부 쿠데타 세력들을 처벌하는 정치투쟁을 한다고 했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책임자 처벌이 우선이며, 가족을 강제로 실종당한 피해자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사과와 보상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1983년 군부독재가 물러나고 민주화가 되고 1984년, 인권단체와 개인들의 소송으로 비델라를 포함한 군사평의회 의원들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군부의 반발이 거세지자 알폰신 정부는 인권범죄에 대한 기소에 60일의 법적 시한을 두는 ‘최종 기소 중지법’을 제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5월 광장의 어머니들과 아르헨티나 인권단체들은 이에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한 결과, 마침내 작년 9월, 비델라를 석방토록 해준 사면령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목요일 오후 3시, 부에노스아이레스 5월 광장에 가면 두 개의 어머니회가 과거를 현실로 불러오는 방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전쟁의 인권유린에 대한 공통의 기억을 폭로하며 변함없이 그 곳을 함께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가 더 눈여겨 봐야할 것은 느리고도 조용히 걷고 또 걷는 어머니들을 존경하며 뒤 따라 걷고 있는 젊은이들이다.

    돌아오는 길에 제주 4.3과 광주 5.18이 떠올랐다. 오랜 기간 제도적으로 망각을 강요당했던 사건들이 이제는 정부 차원에서 기념되고 있다. 광주 망월동 묘지는 깨끗하게 단장되어있고, 제주도 역시, 4.3으로 무고하게 죽어간 이들을 위한 기념공원이 마련되었다.

    나는 그곳의 하얀 기념탑과 콘크리트 바닥, 일률적으로 재단해놓은 묘지들을 볼 때마다 현기증이 밀려온다. 게다가 정부의 기금을 받고 치러지는 기념행사는 그 아픈 역사로부터 상처 입은 민중은 멀찌감치 밀려나있고, 정치인, 유명인사, 연예인들이 주 무대를 차지하고 있다. 알맹이는 보이지 않고 껍데기만 남아있는, 이러한 방식의 기념은 또 다시 망각을 강요하는 게 아닐까?

    한국은 올해,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2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을 한다며 여기저기서 분주한데 나는 우리가 아르헨티나의 5월 광장 어머니들의 모습 속에서 배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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