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의 빈민가에서 운명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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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07일 04: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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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에서 4년 반을 지내는 동안 네 번의 이사를 했다. 그렇다고 집 때문에 특별히 고생을 했던 것은 아니고 집에 관해선 오히려 운이 좋았던 편에 속한다. 처음 살았던 17구의 다락방은 파리 도착 다음날 찾아내, 바로 계약을 하기도 했다.

    집을 못 구해서 몇 달씩 민박집 신세를 지는 사례가 흔한 걸 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도 수십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고층아파트가 없는 파리는 주택난이 심각해 세입 희망자들은 주인과의 면접을 통과해야 하는데 당연히 재정조건이 탄탄한 사람이 유리하다. 가난한 외국학생인 내가 높은 경쟁률을 매번 뚫었다는 건 참 미스테리다) 주인의 선택을 받는 행운을 연속으로 누리다보니 “집을 잘 구하는” 숨겨진 재능이라도 발견한 듯했다.

    가난한 이방인들의 동네에 살다, 그리고 운명의 서곡

    희완을 만날 무렵 내가 살고 있던 동네는 벨빌이란 곳이었다. 선생이던 프랑스인 친구를 꼬드겨, 지루한 일상을 박차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라며, 서초동 서래마을의 프랑스 학교로 등 떠밀어 놓고 – 이후로도 이 친구는 일본, 남미 등지로 옮겨 다니며 계속 새로운 인생을 개척 중이다 – 그 친구가 살던, 겉보기엔 한남동 빌라같이 생긴 벨빌의 임대주택을 내가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벨빌(belleville)은 ‘아름다운 동네’란 뜻인데 실상은 그런 고운 이름이 차라리 애잔하게 느껴지는 동네였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쓴 소설 <자기 앞의 생>의 배경이 되는 빈민가이자, 바에서 노래하던 시절의 에디트 삐아프가 살던 동네이기도 하다. 그녀의 생가가 있는 길은 에디트 삐아프 가(街)로 명명되어 있기도 하다.

    중국인들과 아랍인들, 그리고 가난한 유태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 동네는 하루 종일 시장통처럼 북적거린다. 거리엔 걸인들과 섹시한 것과는 거리가 먼, 생존을 위해 거리에 나서는 중국인 창녀들, 그리고 그녀들의 주된 고객인 나이 든 아랍아저씨들이 풍경처럼 늘 서성인다.

    나와 나의 룸메이트는 그 동네에 사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가능한 한 (거기에서도) 세느강 아래 동네, ‘강남’에 살기를 원했다. 나는 워낙 ‘안전’에 대해 별 취향이 없는데다,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안전한 동네’ 지향에 담긴 이데올로기가 달갑지 않아, 네 번 이사하는 동안 강 아래쪽으론 시선을 두지 않았다.

    소위 한국 사람들 사이에 ‘무서운 동네’로 통하는 동네 위주로 이사를 다니며, 무섭기보단 인간적인 그 동네들의 역동적 에너지를 흡입하느라 새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 속에 동네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골목 끝에서 마주칠지도 모르는 새로운 발견을 고대하며.

    그가 갑자기 일어서서 말을 걸었다, 그리고 1%의 가능성

       
      ▲ 희완이 직접 찍은 자화상
     

    희완을 만났던 그날은 진도 안 나가는 논문을 주물럭거리다, 포도 한 송이를 사서 생기를 충전하러 거리로 나서던 길이었다.

    까페 테라스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던 희완이 갑자기 나를 보자 벌떡 일어서서 이야기를 나눌 것을 청했는데, 거리의 모든 아시아 여자를 잠재적 창녀로 취급하는 벨빌에서 내가 처음 보는 남자의 청에, 흔쾌히 마주앉아 맥주잔을 기울일 확률은? 한 1% 정도. 암튼 2년간 벨빌에 살며 처음이자 마지막 있는 일이었다.

    내가 그의 말을 경청하며 순순히 앞자리에 앉아 맥주잔을 기울게 된 건, 아마도 그가 나에게 미사여구를 동원해 환심을 사려하지 않고, “세상이 가하는 억압에 고통 받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말했던 탓이 클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난 그 때 몹시 말이 고프기도 했다.

    그가 찍고 싶어 한 나의 초상이 어떤 작품에 들어갈 것인지를 설명한 초반의 10분을 제외하고, 줄곧 말을 한 사람은 나였다. 한국의 문화정책과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 시작된 나의 이야기는 나의 논문과 그 논문쓰기의 가장 괴로운 지점인 지도교수에 대한 성토로 끝이 났다.

    그는 프랑스 교수들의 독선과 무성의에 대해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문화를 어떻게 도구화 시키는지,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자신의 문화로부터 어떻게 소외되어 가는지를 들으면서 격분하기도 했다.

    나와 그의 어깨 위에 날아와 앉았던 ‘우연의 새들’

    오후 5시경에 시작된 대화의 봇물은 쉴 새 없이 이어졌고, 이제 그만 일어서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시간은 1시 15분.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날의 풍경은 서로 만난지 5년째가 되고, 함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요즘도 자주 반복되는 일상이기도 하다. 그날 대화의 주제는 의미심장하거나 심란한 것들이었으나, 그날의 만남 이후 가장 강하게 남은 그에 대한 잔상은 대화 내내 그가 자주 보여주었던 ‘냉소로 쪼개지지 않는 1백%의 웃음’이었다.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은 85% 만큼만 웃었다. 모든 상황에서 15% 정도의 판단은 유보해 놓으려는 듯한 실존적 고집이었다. 혹시라도 파안대소를 하게 되면 바로 입꼬리를 조금 일그러트려 표정을 수습하는 프랑스인들의 이러한 태도는 자아를 지켜주는 것이 언제나 날선 비판력에서 온다고 믿는 이 나라 사람들이 무기처럼 지니고 다니는 ‘겉멋’이기도 했다.

    7살만 되면, 아이들도 냉소를 15% 머금은 프랑스적인 웃음을 입가에 달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 면밀한 관찰의 결과에 예외로 기록될 이 1백%의 웃음의 주인공은 단박에 분석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란 쿤데라는 사랑이 시작될 때, 얼마나 많은 우연의 새가 어깨 위에 날아와 앉는지가 앞으로 펼쳐질 사랑의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고 적고 있다.

       
     ▲ 희완의 집안에 있는 그의 작품
     

    나와 희완과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언제쯤부터 어깨 위에 날아와 앉는 우연의 새들을 헤아려 보게 되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시내 중심가인 바스티유에 살던 그가 중국 친구를 만나러 벨빌에 와 친구한테 바람을 맞고도 줄곧 그 자리에 앉아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스펙타클을 지켜보고, 그 때 마침 포도가 먹고 싶었고 대화에 굶주렸던 내가 1%의 확률을 뚫고 그의 청을 받아들여 평소에도 안 마시던 맥주를 같이 마시기까지 두 사람의 어깨에는 이미 수많은 우연의 새가 날아와 앉아 있었다.

    이 기이한 인간을 이해하게 만든 결정적 단서들

    일주일쯤 뒤, 두 번째로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양손에는 커다란 ‘비닐 봉다리’ 가득, 프랑스 문화부가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수년간의 소식지가 담겨 있었다.

    “80년대 미테랑의 사회당 정권 하의 문화정책(특히 공연정책)이 그들이 천명한 공공서비스로서의 소명을 다했는지”가 내 논문의 주제였기에 그는 집에 쌓여있던 소식지 중 그 시대에 해당하는 것들을 추려서 가져다 준 것이다. 그 성의에 감격하기에 앞서, 비닐 봉다리에 그걸 주렁주렁 담아온 폼이 웃음을 자아냈다.

    그의 우스꽝스런 비닐 봉다리는 그가 날 신음하게 하는 고통의 진원지인 논문으로부터 구원해줄 적극적인 조력자가 되겠다는 신호였다. 한때 불문학 교수였고, 또 한때는 극단에서 무대미술가와 의상디자이너로 활약했던 그는, 내 논문쓰기의 내용적, 문법적인 조언자가 되기에 매우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후, 우리는 주로 까페에서 때로는 그의 집에서 혹은 나의 집에서 만나 논문을 한줄한줄 토론해 가며 엮어갔다.

    그가 임박한 전시 준비 때문에 도저히 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하여, 내가 처음 찾아간 그의 집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문화인류학적 특징을 비껴갈 수 있는 이 기이한 인간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물론 제공하였다.

    그 곳은 60년대 고서점 같기도 했고, 무대 뒤편의 어수선한 작업장 같기도 했으며, 황학동에서 마주칠 수 있는 기이한 음반가게 같기도 했지만, 결코 살림집 같지는 않았다.

    복층으로 된 꽤 넓은 그의 집은 여기저기 펼쳐놓은 작업을 위한 판자로 빈틈없이 매워져 있었고 조각과 무대의상과 사진, 회화를 아우르는 그의 작업의 폭이 적나라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고서점 같은, 황학동 음반가게 같았던 그의 집

       
    ▲  바스티유에 있는 희완의 집 안 풍경
     

    일년이 넘게 한 번도 치우지 못해서, 자기도 계속 빈틈을 찾아서 작업을 하다가, 결국은 지하에 있는 빈 공간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던 그가 그나마 내가 찾아온다는 말에 한 시간 정도 치워서 간신히 차를 마실만한 공간이 마련되었다고 하였다. 17세기에 지어졌다는 그 집은 바닥이며 벽이 온통 돌이었고, 간혹은 동굴 속처럼 석회 같은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음반들이었다. 우리가 익히 들어오고 상상할 수 있는 음반들을 제외한 모든 음반, 즉 17~19세기의 서양 클래식 음악과 미국, 영국의 팝음악, 유명한 샹송은 단 하나도 없었고,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인도, 티베트, 타이완, 이집트, 그리스, 일본 등등 소위 문화에 있어서 3세계로 분류되는 모든 나라의 전통음악들이 빽빽하게 국가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의 한국음악 콜렉션은 내가 본 어떤 한국인의 한국음악 콜렉션보다 풍요로운 것이었다.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와 문화산업의 눈부신 성장이 깨부셔 온, 인류의 광휘로운 보물 ‘문화 다양성’이 그의 음반꽂이 속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21살 때 처음 그가 티베트의 음악을 듣게 된 후, 배경으로 틀어 놓는 음악이 아니라 그 속으로 발을 딛고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음악들의 저 거칠고 광활한 세계가 있음을 발견하였고, 그것은 산업화의 잔인한 메스를 거치지 않은 세상의 모든 음악이었다.

    커피를 내 오는데 그가 내온 두 개의 잔 중 하나는 엄청 큰 머그잔이었고, 다른 하나는 손잡이가 떨어지고 이가 빠진 에스프레소 잔이었다. 그는 나에게 큰 잔과 작은 잔 중에서 선택할 권리를 주었다. 사소한 부분에서 이렇게 꼭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은 그의 오래된 습관인데, 언뜻 무척 세심한 배려처럼 보이는 이 부분은 대체로 나의 화를 돋우는데 기여해, 우리의 관계 초기에 가장 자주 싸움거리를 제공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 오히려 알아서 해주는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일 수 있는 부분에서 굳이 타인의 의견을 물으려 애쓰는 그가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고집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나로부터 ‘위선자’라는 말의 비수에 꽂혀 적잖이 신음해야 했고 위선자라는 말을 1년 동안 스무번쯤 듣고 나서야 자신에게 독선적인 부분이 있었던 것을 간신히 인정했다. 그리고 지금은 알아서 해주는 한국식 배려에 어느 정도 적응해서인지 적어도 같은 이유에서  ‘위선자’란 말은 더이상 듣지 않게 되었다.

    배려에 대한 두가지 시선, 그리고 위선자

    그의 집에 없었던 것은 잔 뿐이 아니었다. 손잡이가 달린 냄비도 없었고, 모양이 같은 티스푼도 없었으며, 가구라고 불릴만 한 것도 거의 없었다. 책들은 판자를 얼기설기 쌓아올려 그 사이에 꽂았고, 일곱 개 쯤 되는 의자들은 각자 여기저기서 산전수전을 겪고서 우연찮게 이 집으로 흘러들어온 저마다 사연 많은 의자들로 모두 앉기에는 미안한 모양새였다.

    결핍과 풍요가 품목별로 극단적 대비를 이루는 그의 집은 그가 택한 정치적 선택을 선명하게 투영하고 있었다. 책상 한 구석에 쌓여있는 국제사면위원회에서 보내온 후원영수증이 눈에 띠었고 “모든 인류가, 지구가 제공하는 풍요를 함께 누리기 위해선 하루에 2시간씩 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라는 자크 엘륄(Jacques Ellul)의 말이 천정에서 웅변처럼 나부꼈다.

    이가 빠진 작은 찻잔에 커피를 마시며, 그가 25년 동안 손때 묻혀온 집을 감상하는 동안, 2년 뒤 바로 이 집에서 살림을 차리고 나의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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