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을 먹고 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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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05일 07: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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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나이가 들면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귀소본능이려니 한다. 하지만 귀농이라는 것이 도시에서 공기가 좋고 산수가 수려한 주거 배경을 삼아 주거를 옮기는 것 외에 진정 농(農)의 가치를 염두 해 두고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농이란 무엇이며,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농은 어떤 삶의 방식인지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대체로 농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두 부류인 것 같다. 한 부류는 절망의 바닥을 쳐 본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통찰력과 통합적 사고력이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절망의 바닥을 쳐 본 사람들이라 함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었던 사람들일 수도 있고, 사회경제적 시스템 속에서 삶의 절망을 맛보았던 사람들 일 수도 있다. 전자의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경험하면서 자연에 근접하여 자연과 일치됨이 생명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기타 생활의 ‘욕심’을 버리고 회귀하게 되는 경우이다. 후자는 자신의 욕심과 사회적 구조 및 환경을 알면서 자연에 천착하여 살아가는 것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사회를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용기 있게 감행하게 된다. 
                 
    내가 농(農)으로 내 삶의 방식을 정하기로 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그 이전에 그런 싹이 내 안에서 움츠리고 있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오랫동안 내 안에서, 내 행위를 통해 드러났고 그 자유에 대한 갈망은 내면으로는 집착과 소유에 대한 대결이었다. 집착과 소유에 대한 대결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집착과 소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얘기해준다.                   
                                  
    이러한 대결 속에서 내가 농으로 전환한 것은, 환경에 대한 정치를 접하고 사회환경 전체를 바라보면서 결국 농에 그 열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나에게 농은 그 오랜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사회경제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며, 유기적 순환의 고리를 되찾는 것이며, 유기적 통합적 사고방식과 더불어 삶의 방식인 것이다.

    노자의 ‘농부만이 일찍이 도를 따른다’는 말은 자연과 가장 직접적으로 대하는 것은 농부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또 자연과 마주 대하는 것은 자연의 한 가운데서 인간의 자아가 있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사회경제 시스템에 저항하며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본성, 우주를 원으로 그 가운데 자아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우리가 삶의 방식은 가장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 올해는 콩을 심는데 수확하기 위한 보리가 아니라 풀을 억제하고, 땅심을 위한 녹비유기물 확보를 위해 보리(호밀)농법을 실험하기 위해 보리종자를 파종했다.
     

    농(農)은 왜 ‘가난’으로부터 시작하는가?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천국의 너희의 것이다.’라는 성경 귀절이 있다.
    가난한 자가 행복한 이유는 무엇인가? ‘가난’이란 ‘축적’이 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재물의 축적은 곧 소유를 의미하게 된다. 인간 역사의 소유는 축적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농사는 소유를 의미했지만 그것은 개인, 사유화는 아니었다. 부족 모두의 소유였다.

    문제는 사유화이다. 공동의 소유는 공동의 나눔이었으며, 필요 이상의 것은 필요한 자에게 줄 수 있었다. 개인의 축적이 발생하면서 축적된 자들의 집단을 형성하게 되고 축적을 위해서는 착취가 발생하게 되었다. 축적은 곧 착취를 의미하게 되며 집단의 분리, 즉 계급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가난한 자들은 착취를 당하므로 축적할 수 없었다.

    축적된 자들은 가난한 자들로부터 노동과 모든 것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축적된 자들은 노동을 행하지 않으며, 생산자도 되지 못했다. 제공받은 것들을 향유하는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축적되지 않은 자들은 생산자이지만 동시에 생산한 것들을 소비하는 하지 못한다. 즉 생산자와 소비자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 돌입하면서 모든 것이 상품화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고, 생산자는 소비자가 된다. 왜냐하면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생산자가 자신의 생산한 것을 소비하는 것은 극히 농업인 외에는 없다.

    그렇다고 농업인이 자신이 생산한 것 외에 소비자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사고 파는 관계로 만듦으로서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도록 강요하고 있으며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농생물 생산자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그 댓가로 ‘돈’을 받는 자는 모두 노동자이며, 농업인조차 농업노동자가 양산되었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돈을 받고, 자신이 생산한 물건을 소비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노동자가 되는 셈이다.

    현 사회구조는 축적을 하지 못한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희박하다. 특히 도시빈민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기 위해 도시 주변을 배회할 것이며, 현재의 사회는 양극화와 가난한 이들로 전락하게 하는 숫자를 더욱 많이 만들어 낼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몸값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장애자, 노약자, 저학력자, 상품으로 내어놓기에는 오로지 자신의 몸뚱이 밖에 없는 자로 이루어졌다.

    가난한 자들이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구멍이라곤 하나도 없는 듯이 보인다. 농은 가난한 자들이 가난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소비로부터 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은 의식주를 스스로 만들 수 있다. 자연으로부터 최소한을 얻어서 자신의 생존을 꾸려나갈 수 있으며, 최소한의 돈으로 살아갈 수 있다. 물론 개인과 가족의 의지가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이 농을 하게 되면서 그들의 생존을 지켜 나갈 수 있다. 자연과 접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소유의 집적을 작게 한다는 점이다. 농은 물질적으로나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상태, 즉 축적이 없는 가난한 이들이 자연과 어우러지면서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자연 속에서 자신을 찾게 되는 것으로, 농이 ‘가난’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에게 유기농有氣(機)農 은 철학이며 삶의 방식이다

    관행농에 반대로 유기농을 말하게 된다. 유기농이라는 말은 원래 없었다. 관행농 즉 자본주의 방식의 대량생산을 위한 농법이 정부 주도 하에서 실시되면서 그에 대립되는 말로 유기농이라는 말이 생겼다. 애초에 농법은 유기적이었다. 즉 농의 모든 것이 순환되었다. 유기라는 말이 유기(有機). 유기(有氣) 두 가지를 모두 합했을 때는 바로 ‘기의 순환체계’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기의 순환체계에 따르면 물질이 이 세상에 생겨날 때, 지수화풍의 원리에 따라 자연이 만들어지고 인간이 만들어졌다. 모든 자연의 체계는 이 원소로 이루었으며, 유기농은 자연의 순환체계를 존중하고 맞추어 농사를 짓는 것이다. 

    또한 자연의 순환체계를 존중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규모화, 경쟁화, 분절화에 대립되어 통합적이며 순환적인 고리를 회복하는 것이므로 반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상품을 통한 사회적 연쇄반응을 일으키지만, 유기농은 생명권의 사회적 연쇄반응을 가져온다. 

    왜 나는 도시에서 생활수급자로부터 농을 시작하였는가? 노동자와 생활수급자와 차이는 무엇인가? 노동자의 경우는 노동을 일상적으로 생계의 수단으로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돈을 얻는 이들이다. 그들은 ‘돈’을 받아서 소비한다.

    소위 말하는 생활수급자, 정부에서 최저 생계비를 대주어 노동을 하도록 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본주의 사회에서 몸뚱이조차 팔 수 없는 자들이다. 물론 몸뚱이를 팔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일한 삶의 방식을 취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다. 소위 사기꾼으로 이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논외로 하자.

    대부분 생활수급자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누군가에게 통제받고 있으며 의존적이다. 통제받지 못하면 제대로 설 수 없는 이들이 많다. 도시의 빈민들은 더욱 그렇다. 끊임없이 도시의 주변 언저리에서 배회하는 이들이며, 이들은 노약자이거나 여성들이다.

    또는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힌 이들이다. 신용불량자가 된 자영업자들은 대체로 조직적 생활에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신용불량자는 그런 구렁텅이에서 건져줄 인맥도 없으며 대체로 자수성가를 꾀하는 부류들이다.

    신용불량자를 제외하고는 노약자의 경우는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노동 시장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며, 여성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여성들의 경우는 남편에게 의존하다가 남편이 어려운 곤경에 처함으로써 경제활동을 하게 되는 경우이다. 이들은 사회, 조직적 경험이 전무한 편이다. 농촌의 경우는 고령자인 경우가 많으나 도시로 오면 그 연령층이 낮아진다.

    그들은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자신의 철학을 세우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드물다. 어쩌면 그들은 노동자들보다 더 순박할 수 있다. 그들은 감히 농을 하리라고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이들일 게다. 농이란 그저 고달픈 노동에 불과하며, 농 생활의 경험이 전무한 자들이다.

    농은 농촌에서만 일어나는 것만이 아니다. 물론 토지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농의 가치가 반드시 구현되어야 하는 곳은 도시의 가난한 자들이다.

    농은 정부의 지원으로 실험하는 장소가 된다. 농은 개인이 결정하여 개인이 농촌에서 그런 삶이 되어 즉각 실행하기란 어렵다. 그만큼 그들의 사고는 도시적이며 소비적이기 때문이다. 실패할 확률이 크기 때문에 이런 제도를 이용하여 충분한 훈련이 되고 실험이 되어, 보다 느리지만 스스로 판단하여 실패를 줄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즉 농의 인력을 확보함으로서 그들이 저항세력으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이 일하는 곳을 집단농장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집단 속에서 일하면서 농의 공동체성, 사유, 축적이 없는  나눔을 배우게 된다. 나눔이 없는 집단농장은 결국 농업노동자의 연속일 쁀이다. 농을 실험하며 교육받고 체화시키는 곳, 이것이 바로 생활수급자로부터 도시빈민자들로부터 시작된 이유이다.

       
      ▲ 밭에서 점심을 먹고 흥에 겨워 춤을 추고 있는 필자
     


    가난한 이들끼리 나누는 것이 농이다

    가난한 이들이 모인 생활수급자들이 돈을 받고 농을 실험하면서 그들은 경제적 성공을 떠나 자신이 다른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을 경험한다. 이것이 건강생활이며 건강복지이다. 건강복지에 대한 실현은 자신이 체험해보지 않으면 그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건강한 생활이란 무엇인가? 우선적으로는 몸의 건강함이다. 몸의 건강함은 먹거리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먹거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먹거리에 대한 인식전환을 꾀하는 것은 유기농산물을 먹는 것만이 아니라 단순한 식재, 즉 슈퍼마켓에서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되도록 폐하고 주변의 땅에서 취할 수 있는 식재를 이용하는 것, 그리고 단순한 조리법, 이것은 시간의 절약만이 아니라 인간의 위에도 부담이 없는 것이며, 양념을 많이 사용하고 복잡한 조리법일수록 거기에 필요한 재료나 기구를 돈으로 살 수 밖에 없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줄이는 식단이야 말로 건강한 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즉 반자본주의적일 때 가장 건강한 생활이 가능하게 된다는 말이다. 자본주의에 의존하면 할수록 건강은 잃게 된다. 의료 또한 마찬가지이다. 결국 감기 하나 때문에 병원에 가봐야 그것은 항생제만을 투여받게 되며 몸의 근원적 치료가 아닌 억제수단만을 주게 되며, 결국 병원에 의존도를 강화시키게 될 뿐이다. 자본주의적 의료방식 대부분이 그러하다.

    근원적 치료 중에 하나가 또한 정신적 스트레스이다. 그것은 집착과 소유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또한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농으로부터 가능하다.

    가난한 자들만이 가난한 자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농으로부터 출발하고 농으로 귀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농은 부자와 함께 할 수 없다. 자선이란 나눔이 아닌 축적된 이들의 떡고물에 불과하다. 농은 가난한 자들이 어울릴 때 바로 농의 가치가 실현된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를 따라 갈래야 갈 수도 없으며 농은 부자이면 자본주의의 부농계층일 뿐이다.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을 즐길 수 있는 충분한 축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친구가 그런 말을 한다. “왜 이렇게 고달프게 사는 줄 모르겠다. 고달프지 않냐?” 나는 "지금이 좋다" 라고 답한다. 40대에 들어서서 농을 알고 농에 대한 삶의 방식을 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경험한 모든 것과 지식의 집합체이며 아직도 먼 길이긴 하지만, 또 농에 구체적인 상들이 나오겠지만 나는 자본주의가 일찍이 피 빨아먹고 폐해버리는 그런 퇴물이 되지 않는 농을 선택하게 된 것에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이끌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은 각자에게 각자의 역할을 주어졌지만 사람들은 그 신이 준 각자의 선물을 보지 못하고 획일적이고 통제받고 무엇인가에 얽매어 살아간다. 나에게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끊임없이 배회하게 하고 심적 고통을 주었으며 그런 것이 결국 농으로 천착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도 ‘이것이다’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신은 언젠가 나를 또 어느 곳으로 인도하겠지만 그것은 어떠한 밀도를 나에게 줄 것이리라 믿는다.

    꿈을 꾸며 사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간다고 한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기를 꿈꾸고 살아왔으며, 빵의 노예로 살지 않아왔다. 노예이길 거부하는 것. 이것이 농으로 가게 했으며 아직도 먼 길이라고 여기며 주저 없이 갈 것이다. 나의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게 되게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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