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여정부 ‘문제’ 진보지식인 책임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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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05일 12: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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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여정부는 객관적으로 해 놓은 일은 많지만 국민들로부터는 매우 박한 평가를 받고 있다. 왜일까. 현대는 이미지 정치의 시대다. 수구언론과 한나라당 연대가 참여정부에 부정적 이미지를 씌우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
     

    이들이 성공한 이유는 우리 사회 진보의 토양이 척박하다는 역사적 조건 외에도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진보진영이 보수진영과의 담론경쟁에서 패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진보지식인과 진보언론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근 출간한 『마법에 걸린 나라』에서 진보진영의 격렬한 내부 논쟁과 필자를 포함한 진보진영 모두의 자아비판을 촉구했던 이유는, 진보진영이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협력하지 못해 참여정부 뿐만 아니라 진보진영 전체가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었다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세력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진보진영이 민주화 이후 갈등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 갈등은 자유주의 진보와 좌파 사이의 분열로 나타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진보든 좌파든 약자를 더 많이 배려하고 더 많은 평등을 추구한다는 목표에 있어서는 일정부분 뜻을 같이한다는 사실이다.

    보수진영과 담론 경쟁 패배, 진보지식인 책임도 크다

    다만 이상을 추구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차이를 드러낸다. 좌파는 보호를 통한 분배를 중시하고, 자유주의 진보는 개방과 혁신을 통한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도모한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진보와 좌파가 공동의 목표를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었고 작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분열했다. 이에 비해 수구보수진영은 그들의 목표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효율적으로 협력해왔다.

    견고한 수구기득권세력에 맞서 참여정부가 보다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도록 도왔어야 할 진보인사들은 ‘정부는 악의 화신’이라는 독재시대의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해 참여정부가 하는 일은 뭐든지 반대하며 부당한 상처를 안겼다. 참여정부 때문에 진보진영이 위기에 처한 것만이 아니라 진보진영의 분열 또한 참여정부가 보다 유능할 수 없도록 만든 원인이었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촉발된 진보논쟁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이러한 논쟁이 보다 생산적이고 발전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논쟁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이 몇 가지 원칙과 기준에 합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진보진영 내부의 논쟁은 적어도 보수진영과 경쟁할 때와는 달리 진보의 가치와 태도를 견지하자는 것이다. 상대가 반칙을 하고 선동정치를 하는데 이쪽만 성실하게 게임의 규칙을 지킨다면 바보가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적어도 진보진영 내부의 토론은 보수와는 질적으로 다른 품격을 지켜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진보진영 논쟁은 포용적이어야

    첫째, 진보진영의 토론은 포용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독재정부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잡아 가두고 물리적 위해를 가했을 뿐만 아니라 사법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비판세력을 관용하기보다는 배타의 정치를 펼쳤던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진보진영에서는 누군가를 배제하는 토론이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보의 정의를 제시하고 그 틀에서 토론을 하면 된다. 누구는 진보가 아니라거나 ‘진보가 아니니 빠지라’는 식의 배타적 태도는 스스로가 진보적이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보진영은 또한 모든 종류의 비판에 열려있어야 한다고 본다. 청와대가 진보교수들에게 대응을 했다고 해서 비판에 예민하다는 식으로 논점을 흐려서는 곤란하다.

    대한민국에 입 가진 사람치고 대통령 비판하지 않는 사람 없는데 그런 대통령에게 비판에 민감하다는 평은 온당치 않다. 청와대는 진보지식인의 비판이 노정한 논리상 방법론상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지 비판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손호철 교수는 비판적 학문은 비판만으로 조기 경보의 기능이 있다고 주장한다. 최장집 교수도 글로만 말하겠다고 하는데 학문의 영역에서는 물론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학자가 비판학자로 만족하고 싶으면 상아탑에 머물러야 한다. 학자가 대중을 상대로 언론활동을 하기 시작하면 그것 자체가 이미 정치행위가 된다. 자신의 정치적 발언이 어떻게 이용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계산하지 않는다면 무책임하거나 순진한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학자도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각오해야 한다. 또한 현실성 없이 아무 때나 작동하는 조기경보기는 정작 필요할 때, 거짓말쟁이 양치기소년처럼 경보기 역할에 실패할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체계적, 과학적 비판을 하자

    둘째, 인과관계의 규명에 있어서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보수진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참여정부에 부당한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이 목적이다. 그들은 평가의 기준이나 객관적 근거 같은 것은 애초에 관심도 없다. 하지만 진보진영이 무비판적으로 보수언론의 담론을 받아들여 참여정부를 총체적으로 비난하는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전 세계 신생민주국가는 물론이고 선진국마저도 겪고 있는 정부신뢰의 하락과 리더십의 위기를 참여정부의 실패 근거로 사용한 최장집 교수의 논리는 평소 그답지 않게 취약했다고 본다.

    최 교수가 사용한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자신이 정책기획실장을 역임한 국민의 정부도 2002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는 순간 실패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는 탄생했다. 다음 정권은 진보진영하기 나름이라는 노대통령의 발언은 이 점에서 정확하다.

    노회찬 의원은 “한나라당 지지자 40%는 고정 지지층 아니라 참여정부 실망에 의한 반사적 지지다. 참여정부의 책임이다”라고 했는데 한나라당 고정 지지층은 IMF 위기에도, 탄핵에도 흔들리지 않고 일정했다.

    이회창 후보가 대단한 표차로 패배했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착각이다. 국민의 정부는 IMF 위기를 극복하고도 2000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에게 과반에 육박하는 제 1당을 내주었다. 이를 놓고 국민의 정부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어떤 잘못을 해도 국민들로부터 일정한 지지를 받는 우리 사회 보수의 복원력이다. 일제와 독재를 거치면서 확고하게 쌓아올린 보수의 아성인 것이다. 한나라당 지지층이 고정층보다 약간 증가한 것은 참여정부가 민주주의의 심화와 깨끗한 정치를 이룸으로써 이것이 한나라당에 대한 경계심까지 허물어 발생한 착시현상이라고 본다.

    이런 수구기득권 세력에 맞서 힘을 합쳐도 모자랄 진보진영이 서로 비생산적인 비난을 해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쌍방향 토론이 되어야

    셋째, 쌍방향 토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위주의적인 보수는 토론을 하는 데에도 지위고하를 따진다. 하지만 진보적 논쟁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야 하며, 질문을 받은 사람은 성실히 답변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일국의 대통령도 교수들과 토론을 하는데 후배교수로부터 공개질의를 받아놓고도 외면하거나 쌍방향 토론의 기회를 회피하고 일방적으로 자신이 할 말만 쏟아내는 태도를 진보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넷째, 진보진영 인사들이 조선일보의 논리를 다른 언론에 뿌려주는 것도 부족해서 그들의 왜곡태도까지 본받아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수구언론은 논점을 흐리기 위해 의도적인 왜곡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진보지식인이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상대의 발언을 의도적으로 왜곡해서는 곤란하다. 만일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거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토론과정에서 밝혀진다면 그 부분에 대해 솔직히 시인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조금씩 합의를 통해 차이를 극복해야만 그 토대 위에서 토론은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본다. 자신의 아집에 빠져 끝까지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토론은 비생산적인 말싸움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좌파든 진보든 이들 지식인들의 공통적인 역할은 수구기득권세력과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층이 기층민을 물리력만으로는 성공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

    조선일보 닮은 진보지식인들의 비판

    지배층이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국민에게 내재화함으로써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들며 이를 위해 언론이 동원된다는 그람시의 이론을 내게 가르쳐준 사람은 최장집 교수였다.

    그람시는 수구기득권세력이 퍼뜨리는 담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기층민이 자신의 이익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의식화하기 위해 지식인의 역할에 특히 주목했다. 우리 사회 자칭 진보지식인들이 얼마나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는지는 의문이다.

    조선일보의 사상검증에 맞서 힘을 모아준 다수의 시민을 배신하고 수구언론세력과 타협한 사람이 바로 진보지식인 아닌가. 보수언론과 똑같은 논리와 주장으로 오히려 기득권세력과 싸우는 진보정부의 입지를 위축시킨 사람이 일부 진보지식인 아니었나.

    총선연대의 낙선운동이 정치 불신을 부추겨 투표율 하락을 가져왔다는 근거 없는 조선일보의 주장을 다른 언론에 퍼뜨린 사람도, 도청을 담은 X파일도 대연정도 삼성을 구하기 위한 ‘물타기’라는 조선일보식 음모론을 주장한 사람도 진보지식인들이었다.

    수구언론의 논리를 충실히 대변하는 지식인은 우리사회에 차고 넘쳐서 탈이다. 지식인과 언론인의 압도적 다수가 보수적인 나라는 전 세계에 대한민국 밖에 없다. 진보지식인까지 나서서 조선일보의 메아리가 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한나라당 비판에 왜 그렇게 인색한가

    끝으로 진보 논쟁이 탁상공론에 머물지 않고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진보적 방법론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파는 사회 문제의 일차적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다면 좌파는 역사적, 구조적 모순에 주목한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보수적인 나라에서 여론이 뒷받침되지 않는데 국가보안법 폐지가 어떻게 가능한가. 진보지식인들은 물리력을 동원해 국회의 적법한 절차를 방해한 한나라당에 대해 얼마나 많은 비판을 했는가.

    한나라당을 비난해야 언론에 기사 한 줄 안나올 테니까 만만한 대통령 비판으로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의구심을 피할 길이 있는가. 진보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좌파세력의 의회진출이 거의 처음 있다시피 한 나라에서 참여정부가 민주노동당의 이념을 대변하지 못했다고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진보적 방법론의 또 하나 특징은 경험적 검증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기층민들이 참여정부 들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토론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고 본다.

    양극화의 문제는 상승하는 기대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된 배아픔의 문제일 수 있다. 진보지식인은 이를 마치 배고픔의 문제인양 과장함으로써 서민들이 다시 산업화세력에게 손을 내밀도록 만들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달라진 복지에 대한 변수는 고려치 않고 양극화 계수만 놓고 독재정부보다 나빠졌으니 실패라는 주장이야 말로 얼마나 비논리적인가.

    북한과 쿠바야말로 양극화 문제가 전혀 없는 국가일 것이다. 이들 나라의 서민은 양극화 문제가 심각한 미국의 서민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베트남과 중국은 개방 이후 양극화가 훨씬 심화되었을 것이다. 이들 나라의 개방이전 서민의 삶이 개방 이후보다 나빠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개방 이전의 권위주의 한국과 개방 이후의 민주한국을 어떻게 양극화 수치만으로 수평 비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참여정부 이후 고소득자가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정부보다 양극화가 심화되었다고 말할만한 통계적 증거는 없다.

    개방을 하지 않으면 서민의 삶이 나아지는가? 진보지식인의 실감나는 설득을 듣고 싶다. 진보지식인의 비판이 보다 객관적 근거와 논리적 체계를 갖추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수진영에서 본받을 점

    이상과 같이 진보진영의 내부 논쟁은 보수와는 다른 가치와 방법론적 차원에서 진행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보수진영의 태도를 본받을 점도 있다.

    목표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들의 열정적 태도다. 양심을 저버린 부도덕한 태도를 본받아서는 곤란하지만 그들의 열정만큼은 부러울 따름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헷갈릴 정도로 뭐든지 반대만 하거나, 참여정부와 한나라당이 같다는 일부 진보진영의 냉소주의를 접할 때마다 뜨거운 내 심장마저도 얼어붙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진보진영은 냉탕에서 열탕으로 태도를 전환해야 국가의 미래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도 책임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진보진영이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한 대안을 내놓고 참여정부를 비판한다면 대안에 대한 토론을 통해 진보진영의 문제해결능력도 한 단계 끌어 올릴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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