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태공동체 문당리의 충격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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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02일 12: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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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홍성에 가기 전에는 생태주의는 나에게 하나의 당위였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홍동면에 가기 전에는 농업은 중요하지만 내 일이 아니었다. 문당리에 가기 전에는 공동체는 오랜 옛 이야기이거나 종교인들의 이야기였지 속세의 일반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말을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 깊이 그러했다.

    홍성에서 생태주의는 비로소 철학이 아니라 새로운 생활방식이었다. 먹물들의 지루한 설교나 수다스런 이야기가 아니라 대중의 실천이었고 삶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홍동면에서 유기농업은 일반적이고 지배적인 생산방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당리에서는 공동체가 인간 관계였고 생활방식이고 이미 현존하는 사회였다.

       
      ▲ 문당환경농업마을의 장승사진 (사진=문당환경농업마을 홈페이지) 
     

    생태농업에 무지했던 나와 여론조사 전문가 배철호뿐 아니라 이윤상(민주노동당 천안시 환경위원회 위원장)까지도 정신적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우리는 동의했다. 문당리는 이미 하나의 설득력 있는 비전이라 해야 할 것 같다고. 문당리에 세워진 홍성환경농업교육관은 이미 전 국민을 교육하고 있었으며 유기농업의 메카였다.

    생태공동체 문당리!

    나는 실은 한 달 전 전희식이 말하는 소농(小農)의 이상을 두려움에 가득 차서 들었다. 그건 혹시 스즈키 쇼조(鈴木正三)가 말한 “극한(極寒), 극열(極熱)의 괴로움을 업(業)으로 하고 호미, 낫, 가래로써 심신이 무성해지는 번뇌를 버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로지 사명을 다해 경작해야 하는” 생활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농업이라면 가혹한 육체노동을 먼저 연상했다. 나의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뙤약볕 아래 농사짓던 모습을 보았고 나 역시 논두렁 심부름이라도 거들었던 어설픈 기억이 남아, 농업노동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소농으로 돌아가야만 우리의 지구 환경과 삶이 지속 가능하다고?

    “자신이 먹을 식량을 스스로 재배하는 것을 기본이념으로 해야 한다. 겸업은 나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정보화 사회에서 인간의 이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주5일제 근무가 확대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겸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쓰노 유킨도(津野幸人)의 『소농(小農)-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의 한 구절이다.

    그러니까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농업이 아니라 자급을 목적으로 하는 소농, 아마 쿠바에서 이미 성공하고 있다는 도시 농업이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기본으로 농업을 하면서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고, 나 같은 먹물들도 옛 선비들처럼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설명에 나는 안도한다. “건국 당시 대한민국은 소농의 나라였다.”는 나의 진술은 곧 그 후에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소농은 분해 되어 도시의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어졌다는 현대사 및 현실 인식으로 이어지지만, 다시 미래에는 모두 (겸업) 소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전망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문당리는 비전으로 다가온다.

    홍성환경농업마을 주형로 대표는 소농의 이상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전략으로 창의적인 소규모 그린 비즈니스(green business)를 개척하여 생태공동체를 성공적으로 꾸려왔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적극적으로 받았다. 문당리는 가난한 50년대의 시골 마을이 아니라, 태양광 발전기가 예사로운 유럽풍 마을이다.

    그는 이미 1995년에 ‘도시사람들과 함께 짓는 농사’를 창안했다. 문당리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에게 “땅 살리고 농업 살리는 오리 농법을 위해 오리를 사서 보내 달라”고 제안하여 전국에서 600명이 1,950만원의 돈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1995년부터 매년 6월 6일 도시 소비자들을 초청하여 논에 오리를 넣는 행사를 하고 있다.

       
      ▲ 열심히 일하는 오리농군 (사진=문당환경농업마을 홈페이지)
     

    한해 1,500명 이상, ‘오리 넣기 행사’에 오는 사람들이 소비자이고 2005년 통계로 2만 명 이상의 방문객들이 유기농업을 홍보해준다. 민박은 반대한다. 그건 자존심 높은 농민이 할일이 아니다. 그 대신 환경농업교육관은 훌륭한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인 찜질방은 어느 대도시의 찜질방에 뒤지지 않는다.

    비전의 지도자 주형로, 그리고 풀무학교

    생태공동체운동센터 황대권 소장은 생태공동체의 성공을 위한 조건들을 논하면서 그 어려움으로 갈등 해결의 어려움을 들고 있다. 그는 말한다. “현재 마을로 들어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집단적인 공동체는 성공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다. 일견 타당한 판단이다. 그동안 숱한 실패 사례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유독 우리나라에서 갈등 해결이 어려운 이유를 분석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한국은 급속한 경제 개발을 통해 근대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바로 후기 산업 사회로 넘어왔기 때문에 아직 우리 사회에 개인주의가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그런데 서구와 같은 집단적 계획 공동체는 철저한 개인주의를 전제로 한다.”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서로의 독립성을 인정해 주고 자기의 주체성을 간직한 채 공동체를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그러한 개인주의가 희박하기 때문에 함께 모여 있으면 간섭이 되고 구속이 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갈등이 일어나면 그것을 합리적으로 풀지를 못하고 집단성을 저주하며 흩어지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나도 잘 모르지만 황대권과 비슷하게 생각해온 것 같다. 그런데 문당리는 어떻게 공동체가 유지되었을까? 그래서 나의 수준 낮은 질문을 풀무학교 전공부의 장길섭 선생에게 던졌다. 그러나 문당리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경제공동체라는 걸 그는 멋진 말로 대신했다. “인간은 밀실에서만 살 수도 없고 광장에서만 살 수도 없다.”

    풀무학교 장길섭 선생는 “문당리의 모든 것은 주형로의 비전이 현실로 바뀌어진 것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형로의 비전은 바로 풀무학교의 비전이다.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는 1958년 설립된 풀무고등공민학교로부터 비롯되었다. 무두무미(無頭無尾)의 이념으로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기르기 위해 이찬갑, 주옥로 두 분이 만들었다.

    그리고 홍순명 교장이 있었다. 그의 제자들이 홍동면에서 벌써 1976년부터 유기농업을 시작했다. 1976년이라면 나 같은 사람들은 유기농이라는 말조차 모르던 시절이다. 참으로 산업 중심의 사회로 변해가던 70년대, 사람들이 도시로 서울로 이농하고 “농업은 화학화, 기계화로 나아가야 산다”는 시대 분위기와는 거꾸로 갔다.

    그러나 홍동에는 풀무학교 졸업생들이 있었고, 30년이 지난 지금 홍동면 4,000가구 중에서 50% 이상이 유기농업을 하고 있다. 조합원 1,000명, 한해 매출액 150억원의 풀무생활협동조합 역시 뿌리는 풀무학교 내의 무인구판장이었다. 풀무신용협동조합도 1969년 학교 안에서 시작되었다. 풀무학교는 애초부터 지역 속의 학교였다.

    제자 주형로에게 일본에 가서 오리농법을 배워오라고 가르쳐주었던 홍순명 교장은 정년퇴직하여 이제는 옛날이야기를 오늘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마흔 아홉의 주형로 대표는 이제 마을을 뜰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떠날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지천명의 새로운 출발을 꿈꾼다.

    홍순명과 박정희, 그리고 진보정당의 진로

    당진에서는 홍순명과는 다른 철학을 가졌던 사람의 흔적을 만났다. 황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서 있는 ‘삽교천유역농업개발기념탑’ 옆의 칼국수집 벽에는 ‘삽교천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계획 개요설명을 청취하고 계시는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민초들의 마음 속에 아직 박정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대변하는 듯하다.

    박정희 정권의 어용 시인 노산 이은상이 지은 비문에는 낯익은 필치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겨레의 의지와 기술과 땀을 총집결하여 지도를 고쳐 그리는 창조와 전진을 보라. 더욱이 이 사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서남해안 대간척 사업의 발판이 되었기에 여기 섰으면 조국의 숨결 귀에 들리고 바라볼수록 벅찬 감격을 누를 길 없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철학적, 정치적 논쟁이 거기 있고, 민주노동당에 투표를 하지만 민주노동당을 신뢰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장길섭 선생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소농이 소멸하는 걸 진보라고 생각하는 건 틀렸다.” “도시의 실업자는 농촌으로 돌아가 1~2ha의 가족 경영의 소농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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