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연대전략은 계급형성전략이다
By
    2007년 03월 02일 12:15 오전

Print Friendly

지난 몇 개월 사회연대전략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국민연금 보험료지원사업이나 사회연대전략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우리 진보운동의 토론문화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참 우린 소통엔 관심이 없구나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나 역시 이 척박한 문화를 만든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사업 추진과정을 정리하고 보험료지원사업을 통해 얻고자 하는 사회연대전략의 의미를 말하고자 한다.

1. 보험료지원사업이 사회연대전략 논쟁으로 이르기까지

종종 보험료지원사업과 사회연대전략이 등치되어 사용되곤 한다. 그래서 ‘보험료지원사업이 왜 전략이냐? 논란은 있는데, 사회연대전략의 실제 내용이 없다. 누가 사회연대전략을 의결한 적이 있는가?’라는 물음도 제기된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지금까지 사업이 추진되어온 경과를 살펴보자.

작년 10월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에서 의결된 사업은 보험료지원사업이고, ‘전략’으로서 사회연대전략이 심의된 적은 없다. 단지 보험료지원사업 설명자료가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재원 마련에 기존 가입자도 참여할 것을 제안하면서, 진보운동이 헤게모니정치를 수행하려면 이러한 ‘참여적 사회연대전략’이 요구된다고 밝히고 있다.

‘전략적 위상’ 지닌 논쟁으로 발전하다

당시 자료에서 사용된 ‘전략’이라는 용어는 특정 강령적 요구를 담은 ‘전략’이기보다는 진보운동이 당연히 추구해야할 방향을 지칭하는 서술적 의미로 기술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보험료지원사업이 추진될 무렵에 <진보정치연구소>가 ‘소득연대전략’ 문건을 발표하면서 ‘전략’ 논의가 불거졌다. 11월 초 권영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가 국회 연설을 통해 보험료지원사업을 공론화하고, 민주노동당 내 의견그룹인 ‘전진’과 ‘다함께’가 공개논쟁을 벌이면서 사회연대전략은 ‘전략’적 위상을 지닌 논쟁으로 달아올랐다.

나 역시 보험료지원사업을 매개로 사회연대전략 논쟁이 실질적인 ‘전략’ 논의가 되기를 바랐다. 보험료지원사업이 단지 연금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적 사업에 그치지 않고 노동운동의 난관을 타개하고 새로이 사회연대성을 확보해 나가는 활동모델로 자리잡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사회연대전략을 더욱 형상화 할 수있는 후속사업의 하나로 ‘참여적 재원 마련을 통한 무상의료 현실화 및 사보험 제로화’사업을 기획 중이고, 세금을 소재로 유사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동시에 비판자들의 목소리도 높아갔다. 이들은 원내진출 이후 당의 제도권 문화 적응, 최근 노동관련법안 통과를 둘러싼 논란 등과 연결시켜 사회연대전략을 당의 사민주의화, 개량주의화의 증표로 삼아갔다. 당이 부유세전략을 사회연대전략으로 전환하였다는 독특한 주장도 나왔다.

보험료 지원사업 표결 아닌 합의 사안돼야

마침 선거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지난 1월 당과 민주노총 모두 선거를 맞이했다. 비판자들이 사회연대전략 찬반을 선거 후보검증 항목으로 제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찬반을 요구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험료지원사업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도 했으나 반대로 이 사업의 내용이 공유되거나 검증되기도 전에 특정한 운동노선으로 딱지가 붙여지기도 했다.

지난 2월 중앙위원회에서는 보험료지원사업은 표결에 붙여졌다. 2007년 사업계획에서 이를 삭제하라는 수정동의안이 제안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중앙위원 1/4만이 수정안을 지지하여 보험료지원사업은 원안대로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진통이 크다는 점도 확인되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보험료지원사업을 진보운동이 추진한다면, 이는 표결 사안이 아니라 합의 사안이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이나 민주노총 등 중앙조직이 정치적 당위성을 지닌 사업으로 추진해야만 힘을 얻을 수 있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보험료지원사업의 일정도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길게 가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2. 보험료지원사업 제대로 보기

보험료지원사업에 대한 비판자들은 말한다. 왜 우리가 먼저 양보하느냐? 현재도 연금이 불충분한데 연금급여를 깍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 월급 좀 받는다고 보험료를 더 내라니 정규직 책임론 아니냐? 우리가 이것을 양보한다고 자본이 따라 수용하겠느냐? 이거야 말로 노동자계급 분열전략에 다름아니다! 등등.

이 사업은 시작과 동시에 임금양보론, 투쟁회피론, 정규직책임론, 연금개량화론 등 많은 딱지를 받았다. 처음 사업을 기획하면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름들이다.

난 우리가 정말 이 사업을 현실화해 내면, 국가와 자본이 ‘너희 임금을 양보하는구나, 투쟁을 회피하는구나, 정규직 책임을 인정하는구나, 연금개량화에 동의하는구나’라고 몰아세울 것이라는 추정에 동의하기 어렵다.

   
 ▲ 턱없이 부족한 깡통예산으로 빈곤해결은 요원하기만 하다. (사진=참세상)
 

반대로 국민연금 사각지대 문제를 눈치채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지개를 펴는 노동자들의 새로운 몸동작에 이들은 움찔하며 경계를 보내지 않을까? 아무튼 서로의 시나리오니 이 정도로 넘어가자.

동의하기 어려운 양보론과 개량화 공격

하지만 보험료지원사업이 지닌 정책적 논리에 대해선 객관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러 토론회를 거치면서 지원사업을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종종 이 사업의 기본 골격조차 다르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접할 때 드는 공허함은 이루말할 수 없다.

우선 노동자 양보론이라는 비판에 대해 살펴보자. 이 사업은 644만명의 저소득계층에게 5년간 연금보험료를 지원하기 위하여 13조원(이것이 법제화되면 자본에게 법정부담금이 4조원 다시 추가돼 총 17조원)을 조성한다. 이 중 4조원이 노동자 몫이다.

난 이 4조원이 노동자의 양보가 아니라 참여라고 주장해 왔다. 진보운동이 사회복지 확대, 사회인금 인상을 요구한다면, 그 재원 마련에 노동자가 일정 부분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을 양보론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사회복지 재원을 확대하기 위한 지렛대 역할론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이 사업의 문제의식이다.

나는 지난 <레디앙> 기고글(사회연대전략 비판의 문제점들. 2007년 1월 8일)에서 이 주장의 이론적 근거로 시장임금과 사회임금의 차이를 제시했다. 시장임금은 기업에서 생산된 부가가치를 자본의 이윤과 나눈 몫이다. 그래서 시장임금에서 노동자가 양보하는 것은 자본의 몫을 늘리는 것이기에 진보적 입장에서 적절치 않은 방식이다.

반면에 사회임금의 재원은 자본이든 노동이든 부가가치에서 ‘분배’받은 자신의 몫에서 다시 일부를 공공재원으로 ‘재분배’하여 조성된다. 노동자의 ‘참여’로 인해 시장임금이 줄어들지 모르지만 더 많은 금액이 사회임금으로 보전되므로 전체 가계임금은 커지는 효과가 발생한다.

왜 부유세로 거두지 않느냐는 반론이 제기된다. 부유세운동은 반드시 복원해내야 할 사업이고 지금 민주노동당의 여러 관계자들과 숙의하고 있다. 하지만 참여적 사회연대가 부유세를 포기하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참여적 사회연대 부유세 포기하는 것 아니다

노동자는 자본에 구속당하는 피착취자이면서 시민사회 일원이기도 하다. 시민사회에서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라는 일반 원리의 무게를 가벼이 보아선 안된다.

사회복지 재원을 마련하는 데에는 특정집단에게만 해당되는 세목(부유세, 종합부동산세, 특별소비세 등)도 있고, 일반 사회구성원에게 해당되는 세목(소득세, 재산세, 부가가치세, 사회보험료 등)도 있다. 노동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소득세를 납부하는 것이 부자에게 부유세를 납부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쟁점은 노동자가 사회임금 재원 마련에 참여할 것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 참여방식의 적절성에 놓여져야 한다. 사회임금에서 노동자의 재원 참여가 필요하더라도 그 방식은 논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험료지원사업의 경우 노동자 참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800만 국민연금 가입 노동자 중 117만원 이상 소득자 600만명이 자신의 미래 급여를 월 1,700원~3,200원, 평생 37만원~70만원을 인하하여 3조원을 마련한다. 국연금관리공단은 이 금액 만큼을 기금으로 적립하지 않고 지금 보험료 지원사업에 사용하게 될 것이다.

정규직 책임론이 아니라 부자 책임론

왜 117만원 노동자의 연금을 깍느냐는 비판이 제일 많았다. 노동자의 현재 임금을 삭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하자. 현재 경제활동인구 2,400만명 중 무려 1,000만명이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국민연금에 가입한 노동자들은 자신이 낸 본인부담 보험료에 비해 평균 5배 가량 연금을 받을 예정이다. 국민연금에 가입해 나중에 연금 수급권을 지닌 노동자는 최소한 자기가 낸 본인부담 보험료 총액에 비해 3천만원에서 1억 5천만원까지 더 연금형태로 받게 된다.

그래서 보험료지원사업은 노동자가 국민연금에 가입하여 나중에 얻게 되는 제도 수혜의 일부를 미가입자와 공유하자는 제안이다. 가능한 많은 가입자들이 재원 마련에 참여할 수 있도록 800만 사업장 가입자 중 월소득 117만원 이상자부터 포함시켰다. 가입자와 미가입자 사이의 세대내 연대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취지이다.

또 하나의 재정 참여방식은 과세소득 360만원(실제소득 연 5천만원 수준) 이상 가입자에게 누진적 부가보험료를 부과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처음에 정규직책임론이라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었으나 이후 다소 잦아진 듯 해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 굳이 책임론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정규직 책임론보다는 상위소득자 혹은 부자책임론이 더 적합하다.

3. 사회연대전략은 계급형성전략이다

우리가 재원 참여를 결의하면 과연 국가와 자본이 따라 올 것인가라는 비판이 있다. 물론 이들이 순수히 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들의 수용 여부가 이 사업의 핵심이 아니라고 여러번 강조해 왔다. 이 사업이 진정 목표로 하는 것은 사업의 현실화 자체보다는 이 과정에서 생겨나는 사회연대에 있다. 여러 토론에서 느낀 소감에 의하면 이에 대해선 비판자들과 지지자들 사이에 간격이 큰 것 같다.

사회연대는 동일한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구성원들의 상호의존성을 강화하는 사회운동적 활동을 의미한다. 사회연대는 투쟁연대를 비롯하여 소득연대, 임금연대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다. 그래서 보험료 지원이 투쟁을 회피한다는 지적은 적절치 않다. 소득연대활동을 통해서 노동자의 투쟁기반도 공고화될 것이므로 소득연대와 투쟁연대는 상호보완적이다.

사회연대전략의 본질적 성격은 무엇인가? 사회연대전략이 다음 두 가지의 사회운동적 성격을 지닌다. 사회연대전략은 진보운동이 대중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헤게모니정치전략이다. 그리고 사회연대전략은 노동자들의 공동 의식, 경험을 조성하여 동일한 정체성을 느끼게 하는 계급형성전략이다.

헤게모니 정치와 계급 형성

우선 사회연대전략이 진보운동의 헤게모니정치전략이라는 점을 살펴보자. 난 현재 진보운동이 한국사회에서 그리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판단한다. 아무리 민주노동당이 법률안을 제출해도, 한국진보연대가 사회적 대항전선을 수립코자 해도, 일부 활동가들이 전위적 정치조직을 구성하더라도 한국사회가 그리 크게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대중들은 진보운동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한다. 무슨 활동을 하는지 지켜는 보지만 신뢰를 그만큼 보내지는 않는다. 그만큼 진보운동의 정치적 영향력은 취약한 상태다.

진보운동이 대중에게서 신뢰를 얻고 이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들이 느끼는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하고, 그 활동을 전개할 만한 자격을 인정받아야 한다.

보험료지원사업은 진보운동이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연금사각지대 문제를 해결하려는 단초를 마련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보여주려는 사업이다. 이를 통해 진보운동이 단지 선언이 아니라 실제로 연금사각지대를 염려하고 해결하려는 진정성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적 영향력을 획득하는, 즉 사회적 의제에 대하여 정치적 헤게모니를 획득해나가는 활동이다. 아이가 영양분을 먹으며 성장하듯이, 진보운동은 이러한 헤게모니 정치를 통해 전진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긍극적으로 사회연대전략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목표가 계급형성에 있다는 점이다. 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보며 사회운동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명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노동계급의 진군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지금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계급형성에 성공하고 있지 못하다고 판단한다. 계급은 특정한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저절로 정해지는 경제적 단위가 아니다. 계급은 사회구성원들이 동일한 의식, 경험, 활동 등을 거치며 생겨난 사회정치적 정체성에 의해 형성된다.

역사주의 마르크스주의자인 E.P.톰슨이 지적하였듯이, ‘계급이란 어떠한 객관적 지표나 구조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계급은 역사 속에서 오직 형성(making)될 뿐이다’.

손쉬운 총파업으로의 도피

오랫동안 한국사회에는 이미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자신이 설정하기만 하면 호명되는, 그리고 총파업이 선언되어야 계급성이 발현된다는 속류 계급론이 자리잡아 왔다. 아니 언제부턴가 진지하게 계급을 이야기하지 않아 왔다. 자기확인적인 ‘계급 선언’이 그 빈 공간을 채워왔다.

사회연대전략은 노동자 내부 상호의존을 확인하며 동질의 의식, 경험, 활동의 계기를 마련하는 활동이다. 이를 통해 각각 노동하는 개인들이 같은 성향의 정치적 주체로 형성될 수 있도록 한다. 난 노동자들을 만날 때마다 이들이 경제적 이해관계를 위해 전전긍긍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노동자의 자긍심을 외치고 싶어하는 열정을 느끼곤 한다.

노동자 개인이 노동계급으로 전화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경제적 이익을 넘어 서로를 신뢰하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공동의 경험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처럼, 97년 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에서처럼, 노동자들이 투쟁 광장에서 서로 어깨를 걸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이러한 위대한 계기는 자주 오지 않는다. 매 시기, 매 국면 현안으로 닥친 의제에서 색다른 어깨동무를 이룰 수 있는 사업을 기획하는 것이 활동가의 역할이고 민주노동당의 과제이다.

이러한 면에서 우린 게을렀다. 손쉽게 투쟁, 총파업이라는 만병통치약으로 도망갔다. 이제는 이 만병통치약의 효과도 의심되는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노동자들이 서로 생각하고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사업이 개발되어야 한다. 경제적 이해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긍지를 살릴 수 있어야 한다. 사회연대전략은 이러한 계기를 개발하고 이를 통해 노동자 개인들이 서로를 하나의 정치사회적 주체로 인식하도록 하는 계급형성전략이다.

진보운동에게 계급형성이 최대강령적 목표라는 점에서 이를 추구하는 사회연대전략 역시 ‘전략적’ 지위를 가질만 하다.

4. 책임있는 소통을 원한다

보험료지원사업이 처음 출발할 때 다소 안이한 면이 있었다. 우리 내부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동의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연금사각지대 해소라는 계기를 통해 새로운 활동양식을 선보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미 노동조합 활동가의 1/3이 보험료지원사업을 노동자 임금양보론으로, 사회연대전략을 계급분열전략으로 판단하고 있다. 사업을 추진하는 간부로서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지난 과정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고, 긴 호흡으로 사업기획을 점검하고자 한다.

미래지향적 논의가 이뤄지기 바라며

동시에 비판자들에게도 요청하고 싶다. 비판은 상대방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만큼 자신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요구하는 활동이다. 우리 운동에서 비판적 논의도 부족하지만, 많은 경우 비판자들은 책임에서 자유롭다.

보험료지원사업의 경우 비판자들은 복잡하게 사각지대 해소방안을 설계하지 말고 사회에게 노후를 전적으로 보장하라고 요구하자고 한다. 옳은 이야기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도대체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경로를 대중에게 제시할 것인가? 우리가 그 경로의 전달자로 어떻게 인정받도록 할 것인가?

보험료지원사업은 바로 그 경로를 개척하고 문제해결의 전달자로 인정받기 위한 출발사업이다. 정말 보험료지원사업이 잘못된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비판자들은 자신의 실천방안을 제안해야 한다. 서로가 자신의 책임을 자각할 때 소통은 지금보다 훨씬 생산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여러번 사회연대전략 토론회를 다니면서, 이를 지지하든 비판하든 모처럼 사업과 노선을 주제로 논란이 진행된 것은 긍정적이다라고 평가해주는 동지들이 있었다. 지금부터 진보운동에서 헤게모니정치, 계급형성을 주제로 역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우리 진보정치가 세를 형성해야 할 바둑에서 사석 수에 연연하며 눈 앞 셈법 이상을 넘지 못하고, 노동자와 노동계급을 동일시하여 계급 형성이라는 본연의 과제를 뒤로할 순 없지 않은가?

* 이 기고문은 <이론과 실천> 3월호에 실린 원고를 줄여 작성한 것입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