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절 앞두고 평사리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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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3월 01일 06: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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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서운(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기일이 2월 말인지라, 나는 이맘 때면 항상 섬진강변 평사리공원을 찾는다. 올해는 제법 찾는 사람도, 차린 음식도 많다.

    평사리에 사는 강동오 씨(매암차문화박물관 관장)가 음식을 장만해서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불렀다. 무엇보다 할머니에게 추모비 소식을 전해줄 수 있어 기쁘다. 나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할머니들의 역사가 여기 기록되고 기념될 것이니.

    나는 할머니의 늦둥이 아들이 되었지만, ‘어머니’라고 불러 드린 건 병실에서 맞이한 생일날 딱 한 번뿐이라, 아직도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 듣는 사람도 어색할 것 같아 할머니라 부르련다. 벚꽃은 겨우 꽃망울이 갓 생기기 시작했고, 매화는 제법 폈다. 하동 평사리 들판에서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정서운 할머니와 나의 인연을 생각해본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오”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할머니의 인생 전반부는 애통함의 연속이었고, 후반부에서는 위로를 받았다. 14살에 끌려가서 8년 뒤에 돌아오기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돌아와서도 일본군이 억지로 배워준 아편을 끊기 위해서 사투를 해야 했고, 자기를 좋아했던 동네총각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지만 이내 사별하는 슬픔을 맛봐야 했다. 그 옛날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자들이 ‘화냥년’으로 불리며 멸시받았듯이 위안부 할머니들 역시 겨우 살아남았지만 돌아온 뒤에도 고난은 계속되었다.

    할머니는 마흔 중반에 김철균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이때부터 할머니는 이전의 애통함을 위로받기 시작했다. 김 할아버지 역시 징용으로 끌려가서 겪은 고역과 구타로 정신적, 육체적인 상처를 가지고 계신 분이었기에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위로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91년 김학순 할머니를 필두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공개 증언이 나오고 수요집회가 시작되었다. 정서운 할머니 역시 적극적으로 국내외에서 증언하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강연도 하시고 김대실 감독의 ‘침묵의 소리’라는 다큐도 찍었다.

    할머니들의 위안부 생활은 가장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이면서 동시에 가장 풀고 싶은 한이다. 공개증언을 하기까지 수없이 망설였겠지만 용기를 내어 말하고 난 뒤엔 꽉 막혔던 가슴을 쓸어내리는 후련함도 느꼈으리라.

    할머니의 생애의 끝자락에서는 아들이 된 나로부터 위로를 받으셨다. 할머니는 2004년 늦가을 침대에서 떨어져 대퇴부 골절을 입고 입원하셨다. 할머니는 위안부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으면서 자식을 낳을 수 없게 되었다.

    2003년 할머니의 마지막 강연으로 인연이 되어 병문안을 갔을 때 할아버지만이 병실을 지키고 계셨다. 문제는 할아버지도 간병을 받아야 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병실을 지킨 지 열흘 쯤 되던 날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의논하고 나를 아들로 삼아주셨다.

    할머니는 다리를 고정시킨 채 옴짝달싹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냥 누워 계셨다. 그래서 등에 있는 욕창이 가려울 때도, 대소변을 했을 때도, 잠이 오지 않을 때도 항상 나를 찾았고, 나는 기꺼이 그에 응했다.

    할머니는 느즈막이 또 애통할 일이 생겼지만, 복이 있어 한 젊은 청년의 위로를 받은 것이다. 내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끔찍한 상상이다. 이것은 제도적인 문제다. 위안부 할머니의 대부분이 가난하고 자식이 없으시다.

    이 말은 사소한 사고나 병에도 결국 곁에서 보살펴줄 사람이 없어 비참하게 돌아가시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의 입원에 대해서는 입원비 면제라는 최소한의 지원이 아니라, 원하면 언제든 손쉽게 간병인을 둘 수 있도록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 위로는 할머니의 과거를 역사로 남기는 것

    나는 할머니의 유해를 섬진강에 뿌리고 난 뒤 해방감을 느꼈다. 이유야 어떠하든 난 할머니 곁에 끝까지 있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단체들의 도움으로 유료 간병인이 구해지자 나는 한 달여의 간병생활을 정리하고 그 뒤로는 한 번씩 방문을 하였다.

    방문할 때마다 할머니의 건강이 조금씩 악화되어간다는 것을 느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 가서 유해가 뿌려질 때까지 계속 울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꼭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죄책감에서 울었다. 그래서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난 뒤에는 더 이상 할머니를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할머니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거였다.

    하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다들 연로하시고 살아 계실 날이 그리 많지 않은데 다들 돌아가시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할머니들의 역사는 그냥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도 되는 것일까.

    사실 ‘정신대’로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남에게 으스대고 자랑할 만한 성질의 역사는 아니다. 한 나라의 역사는 항상 잘 나가고 못 나간 역사가 공존하고 그 중에서 힘들고 어려웠던 과거는 그것대로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위안부 문제는 두 가지의 큰 문제에서 비롯되었고 두 가지의 교훈을 준다. 문제의 하나는 일제가 우리 민족을 지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제로 여성을 쾌락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당연히 교훈도 두 가지이다. 다시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고, 여성이 성적 도구로 여겨지는 일도 없어야 한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도 제국주의 시대의 만행을 뉘우치지 않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성적 학대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할머니의 ‘의아들’을 넘어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 할머니를 기억하는 것은 이 두 가지 교훈을 되새기는 것이다. 따라서 섬진강변에 세우려는 ‘평화의 탑’(위안부 할머니 추모비)은 정서운 할머니를 비롯한 모든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난에 대한 추모를 상징하고,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의 장을 남기는 것이다.

    민관이 함께 만드는 역사의 장

    섬진강변 평사리공원에 추모비를 건립하는 과정이 위안부의 역사를 알리는 활동이어야 한다. 단지 뜻있는 몇몇이 건립하고 몇몇이 기억하는 추모비어서는 안 된다. 정서운 할머니의 유해가 뿌려진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위안부 문제를 상기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수적이다.

    일본은 원폭 투하 지역에 엄청나게 큰 공원과 기념관을 세워서 마치 일본이 대동아전쟁에서 가해국이 아닌 피해국인 듯한 여론을 만들어내고 있다. 역사인식을 호도하는 데 민관이 합심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세우기 위한 일에서 민관이 함께하는 것은 정말 보기 좋은 모습니다.

    가장 많은 위안부가 끌려간 경상남도와 추모비가 건립되는 하동군에서 일본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결의문의 채택한다면, 비록 그것이 일본에 미치는 정치적 압력이 크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이며 우리 국민들의 관심을 촉발시키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직접 관련도 없는 미국 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결의안을 채택하고 상원에서의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의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에는 정작 국회도 지방의회도 위안부 결의안이 없다는 것은 조금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늦어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낫고, 아무리 늦어도 내일보다는 오늘이 빠르다고 하지 않든가. 미 의회에서도 움직임을 보여줬으니, 이제는 우리가 움직여야 할 때이다. 이번 기념비 건립에서는 들러리가 아닌 한 꼭지를 담당하는 주체가 되길 바란다.

    인생은 아름다워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섬진강 벚꽃 길을 따라 평사리공원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소풍을 와서 추모비를 구경하고, 기판에 새겨진 정서운 할머니와 일본군 위안부의 이야기를 읽고 기억해준다면 벚꽃 내음만큼이나 달콤한 모습이 아닐까.

    평사리공원에 세워지는 ‘평화의 탑’은 애통함으로 한평생을 보냈을 위안부 할머니 모두를 위한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기억해주고 있으니, 정녕 당신의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고 정서운 할머니의 기일에 부쳐…’의아들’ 채수영 올림

    *故 정서운 할머니 추모위원회 홈페이지 www.halmuni.org
    *강동오 집행위원장 055-884-8254, 011-9339-7759, mu0hwa@hanmail.net
      채수영 추진위원 010-4552-3864, soopool21@naver.com
    *후원계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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