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속이론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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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27일 08: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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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대의 매카시즘 선풍을 치르고 난 미국은 60년대 들어 중남미에 대해 ‘진보를 위한 동맹’이란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다. 그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은 반공주의에 있었고 자본과 기술을 투입하여 중남미의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여러 이유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발전된 종속이론은 우리나라에 80년대에 소개가 되었다. 이 당시 중남미는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이 상징하듯이 군부독재가 지속되거나 비록 민주화된 정부가 권력을 잡았더라도 신자유주의 개방화, 민영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당연히 비판적 종속이론이 중남미에서도 힘을 잃고 왜곡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민족주의만 남고 다시 왜곡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속이론과 케인즈 경제학 

    무료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를 들어가면 쉽게 알 수 있듯이 1930년대 이후 변화된 세계경제의 흐름의 분석 에서부터 칠레의 산티아고에 있는 ‘유엔 중남미 경제 위원회’(CEPAL)를 중심으로 1940년대에 종속이론의 첫 시발점이 된 논쟁이 시작되었다.

    종속이론의 배경에는 케인즈 이론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유명한 로스토우의 경제 발전 단계론은 어느 나라든지 이 단계를 밟기만 하면 자동적, 기계적으로 근대화되고 발전된다는 것인데 이 이론을 중남미의 상황에 맞는 발전 이론으로, 다시 말해 주체적(민족주의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수입을 규제하고 수입대체 산업을 국가가 주도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전략을 개발해냈다. 실제로 대부분의 중남미 정부들이 1940년대 후반 이후 경제 발전 전략으로 이를 실천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라울 프레비쉬, 페르난도 엔리께 까르도주, 알도 훼레르, 셀소 후루따도, 아니발 핀또, 오스발도 순켈 등이 있었다

    세계 공황 이후 중심국가들의 수입이 위축되면서 원자재 중심 수출국들인 남미는 수출물량의 축소만이 아니라 공업제품과의 교역 조건 악화로 인해 직접적 영향을 받게 된다. 19세기 후반부터 지속되어왔던 세계 경제의 통합과정에 단절이 일어나게 된다.

    남미의 원자재 수출품들의 세계 무역에의 참여가 위축되게 된다. 이 시기(1940년대~1950년대 중반까지)에 수출의존적 경제에서 산업정책과 투자가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전략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내수 중심 수입 대체 전략은 오래 갈 수 없었다.

    수입대체를 위한 최종 소비재 산업도 외국으로부터 기계와 부품 등을 수입해야 했는데 외환 지불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경제 구조는 비효율적인 방향으로 운용될 수 밖에 없었고 곧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런데 60년대 이후 남미의 원자재 수출이 크게 증가하면서 세계 경제에의 편입이 확대되면서 위기 상황이 나아졌느냐 하면 그렇지 못했다.

    대통령이 된 종속이론가

    종속이론가 중의 하나였던 페르난도 엔리케 까르도주는 얼마 전 브라질의 대통령이었고 브라질 야당의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는 사민주의 스타일의 신자유주의 추종자로 알려져 있다. 주변부에서 벗어나려는 급진적 정치성향과는 거리가 멀고, 국가의 개입을 강조하던 종속이론의 시각에서 보면 투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남미 각국의 경제,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특히 59년의 쿠바 혁명 성공 후 60년대에 걸쳐 ‘대안적’ 연구로 발전 이론 대신에 후기 종속이론이 나오게 된다. 안드레 군데르 후랑크, 테오토니오 도스 산토스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경제 현상이 경제적 논리만이 아니라 정치, 군사, 외교 등의 역사적 맥락의 산물임을 밝힌 것이다. 안드레 군데르 후랑크는 로스토우를 통렬히 비판한다. 중심부 국가들은 주변부 국가들의 저발전을 대가로 발전한 것이라 하였다.

    20세기 내내 정체되어있던 중남미 경제 상황의 원인을 복합적으로 찾아보자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 이론적 탐구의 결과 가장 중요한 결론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가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뉘어져 있고 양자 사이에는 불평등한 교역구조, 비대칭적인 사회적 인프라 등으로 자본, 기술을 투입하여도 계속해서 ‘저발전의 발전’ 상황만이 지속된다는 비판이었다.

    안드레 군데르 후랑크에 의하면 주목할만한 점은 이런 ‘대안적’ 비판이 정통 마르크시즘 계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는 현재 신자유주의/ 반신 자유주의 대결 국면에서 베네수엘라의 21세기 사회주의 혁명 추진도 ‘교조적 진보’인 베네수엘라 공산당 등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생각나게 한다.

    종속이론이 힘을 잃게 된 것은 1973년의 칠레 피노체트 쿠테타부터 였다고 한다 . 이때부터 약 25년간은 중남미에서 신 자유주의 경제 정책이 추진되던 시기라고 보면 된다.

    리카르도 비교우위론의 허구성

    그러나 종속이론은 중남미보다 세계중심부의 자본 축적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데 더 큰 공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67년에 <저발전인가 또는 혁명인가?>를 썼던 안드레 군데르 프랑크의 <비판과 반비판>(1978) 이라는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리카르도가 그의 비교우위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든 유명한 영국의 옷감과 포르투갈의 포도주 교역이란 사례는 어떻게 약 150년 동안 ‘자유로운’ 무역이 아니라 중상주의에 의해 영국에는 유리하고 포르투갈에는 불리하게 노동분업이 포르투갈에 강요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

    영국은 1703년에 포르투갈과 메투엔 조약을 맺어 네델란드와 독일은 포르투갈과 그 식민지와의 교역권을 잃게 되었고 포르투갈은 영국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중심부 국가들이 중남미의 풍부한 농산물, 광산물의 원자재를 불평등한 교역조건을 통해 착취해왔음을 폭로한 것이다. 중남미의 일차 산품들은 마치 우리의 공산품처럼 수출품이다. 그런데 원자재와 공산품의 교역은 그 자체로 불평등한 것이다. 종속이론에 의하면 원자재 생산 그 자체가 저임금과 저발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 국가들의 저임금과 저발전이 ‘자본과 노동의 유기적 구성’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 하였다.

    중남미 좌파의 부상과 종속이론 

    시간이 흘렀어도, 종속이론의 문제의식이 전부 소진된 것은 아니다. 위에 언급한 ‘잃어버린 10년’이란 지적, 즉 신 자유주의 정책 방향에 대한 비판 자체가 종속이론의 문제의식에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가 수치상으로는 성장하지만 일반 시민들의 삶의 질과 실질 소득은 줄어드는 구조적, 항구적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비판이었다.

    새로운 좌파들은 새로운 시각에서 일반 민중의 급진적인 사회운동에서 그 활로를 찾고자 하였고 이미 우리가 알다시피 1989년의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대중 소요’ 사건과 같이 일반 시민, 대중의 불만이 거리의 정치로 분출되는 데로 연결된다. 이 흐름이 결국 90년대의 중남미 좌파 부상의 밑거름이 되게 한 것을 인식하면 어떻게 종속이론이 중남미에서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

    종속이론의 핵심적 문제 의식 중에는 ‘민중 교육’이 있었으나 이를 주도적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새로운 좌파들은 중남미가 종속적 주변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민의 교육’ 즉 무료 진료, 무료 교육이 핵심적 전략임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

    특히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메르코 수르 국가들이 최근 추진하고 있는 ‘중남미 통합’ 운동은 바로 그 동안 숙명처럼 주어졌던 ‘주변부’에서 벗어나 새로운 ‘중심부’의 한 축이 되고자 하는 비전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종속이론의 영향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미르 아민 등 종속이론가들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 공세로 비롯된 중남미 경제, 사회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 용기 있게 반신자유주의의 꿈을 꾸었다. 실제로 유럽의 반신자유주의 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새로운 세대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강구하고 실천하는 데 에너지를 공급하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이론적,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었지만 중남미 현실의 가장 큰 모순을 피하지 않고 정면 대결하였고 이를 통해 중남미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던 공로는 종속이론가들에게 돌아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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