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형경선제 선거용 성과주의 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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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26일 02:5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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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중을 투표장에 동원하지 말고 당신들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라’라는 ‘개방형경선제’에 대한 필자의 <레디앙> 기고문에 대해 민주노총 김태현 정책실장이 민주노총의 입장에서 반론을 제기하였다.

필자는 나의 글이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물론 억압적이고 비대칭적 사회관계들을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정당민주주의에 대해, 나아가 이 문제에 함축되어 있는 진보진영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데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김 실장은 나의 글이 개방형 경선제를 오독, 왜곡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만큼 나의 의견을 다시 보충하여 개진, 반론을 펴면서 그 ‘오독과 왜곡의 실체’가 무엇인지, 과연 어느 쪽이 그 오독과 왜곡, 아니 모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논의를 점차 심화시키면서 재고해보고자 한다.

물론 필자의 명료하지 못한 표현이 그러한 독해를 가능케 하는데 일조했을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2.

필자에 대한 김 실장의 가장 중요한 비판의 요지는 필자가 “진성당원제를 개방형경선제와 모순되는 것으로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견상 그럴듯하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단답형과 논술형으로 답하고자 한다. 단답형은 정당 내부 민주주의의 핵심인 진성당원제와 관련된 원론적인 것으로 거기에서는 당원의 자격, 그리고 권리와 의무의 문제가 핵심이다.

후보 선출 직접 참여하고 싶으면 당원이 되자

한마디로 민주노동당의 대통령후보 선출에 직접 참여하고 싶으면 당원이 되면 된다. 그러면 권리와 의무가 주어진다. 옹색하게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내세울 필요도, 개방형 경선제에 매달릴 필요도 없다.

더군다나 그 ‘배타적 지지’가 실제 내용이 빈곤한 ‘조합주의’의 산물이라면, 오히려 그것은 ‘껍데기뿐인 배타적 지지’를 내세우며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의 이름으로 그 어떤 ‘정치적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좋지 않은 모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에 우호적이지만, 여전히 당원이 되어 그렇게 하기엔 ‘무언가 꺼림직하다’고 생각한다면, 직간접적으로 조언하거나 비판하면 된다. <레디앙>에서 전개된 조희연-손호철 논쟁이 보여주듯 그렇게 하면 된다. 일반대중들이 이 분들과 같은가라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들의 논쟁에도 일반대중들의 인식과 생각이 반영되어 있지만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해 필자는 바로 이것이 민주노동당이 고민해야 할 과제이며 그 연장선 위에 지금 쟁점이 되는, 그리고 이후 필자가 논술형으로 답하고자 하는 진성당원제, 개방형경선제를 둘러싼 논의가 존재한다는 점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이제 논술형 답으로 넘어가자. 그것이 논술형인 까닭은 여기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민주노동당의 대표성, 연대성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좀 더 긴 부연설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김 실장이 민주노동당의 정체성과 성격의 문제를 거론하며 제기한 것이기도 하고 지금의 논쟁점과 관련해 보면, 진보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에게 진성당원제, 개방형경선제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문제로 모아진다.

   
  ▲ 지난 1월 30일은 민주노동당 창당 7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사진=민주노동당)
 

대중 참여 활성화 이벤트로 되지 않는다 

물론 뒤에서 진성당원제와 관련하여 다시 언급하겠지만, ‘당의 대표성 및 연대성’의 문제는 정당 내부의 민주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아무튼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개방형경선제는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지지자 내지 후원자의 획기적 조직화를 목표로 하는 이른바 ‘당원 및 지지자 확대운동’에 다름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 실장 또한 민주노동당의 정체성과 성격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노동자, 민중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결국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문제의 핵심은 진성당원제와 개방형경선제의 관계, 그리고 지지자와 후원자를 결집시키는 방식으로서의 개방형경선제가 과연 대중참여를 위한 적절한 방법인가의 문제로 모아질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필자는 “기우에서이지만, 대중참여의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확언하건데, 그것은 진성당원제와 대립하거나 치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다른 차원의 문제이며 "이벤트성의 기획(개방형경선제)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쓴 바 있다.

또한 실질적인 대중 참여를 위해서는 민주노동당이 다양한 정치사업, 현장에서의 투쟁, 지역 활동을 통해 당원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대중들에게 기존의 보수정당들처럼 대중을 소외시키지 않는 정당임을 보여주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 위에서 진보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이 이러한 활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서 개방형경선제로 대중의 참여를 제고시키겠고 하는 것은 “본말전도”라고 주장하였다.

진성당원제가 대중 참여 장애물인지 여부 밝혀야 

그러면 이러한 내용이 필자의 논의를 “진성당원제와 개방형경선제가 모순되며 진성당원제를 훼손시켜서는 안된다”라는 것이라고 파악하며 반론을 펴고 있는 김 실장의 논의를 정당화시키고 있는가. 애석하게도 아니다.

이미 보았듯이 오히려 필자가 강조한 것은 진성당원제와 개방형경선제가 서로 대치, 선택될 수 있는 동일한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으며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참여 운운하며 진성당원제와 개방형경선제를 대치시킨 김 실장 류의 발상과 행태에 대한 비판이었다.

물론 수준이 다르다는 것이 양자가 무관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필자에 대한 김 실장의 비판이 의미가 있으려면, 개방형경선제를 도입해야 하는 이런저런 이유, 그것도 귀가 아플 정도로 들와 왔던 노동자, 민중의 참여라는 식상한 이유를 동어반복할 것이 아니라 진성당원제가 민주노동당에 대한 대중의 참여, 그리고 그들의 지지 및 지원에 어떤 장애물이 되고 있는지 그 논거를 들어 비판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야 이번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정당 민주주의의 핵심인 진성당원제 대신 개방형경선제를 도입한 이유가 확연해질 것이고 그에 대해 당원들, 혹은 우호적인 지지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성당원제가 외부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내용 없는 빈 껍데기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김 실장은 답해야 한다. 김 실장은 전체 노동자계급과 민중운동의 대표체로서 민주노동당의 “당원은 전체 노동자계급과 민중진보진영의 분견대요 정치적 대표체로서 성격을 지니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당비를 납부하고 당을 사수해온 당원은 소중히 해야 할 자산이자, 가치를 지닌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자산의 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움직여야할 진성당원제의 모습은 어떠한가. 필자는 이에 대해 아직 민주노동당이 심각하게 관료화, 화석화된 정당은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없지 않다면, 그 해소책은 개방형경선제와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원들의 참여를 더욱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안들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개방형 경선제보다 당원 참여 활성화 방안을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해 김 실장은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 김 실장이 말한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분견대”로서의 당원들, 그들이 참여하는 진성당원제는 허수아비인가. 당 지도부와 관료들에 의해 당원은 소외되고 진성당원제는 유명무실해지고 있는가.

하지만 김 실장의 비판에는 개방형경선제 도입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진성당원제의 문제점에 관한 그 어떤 비판적 논거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다만 근 20여 년 이상 들어 왔던 노동자, 민중의 참여라는 수사만이 개방형경선제의 앞뒤에 놓여 그것을 꾸미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김 실장의 주장이야말로 그 스스로의 인식, 혹은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진성당원제와 개방형경선제를 동일한 위상에 대치시켜 놓고 진성당원제가 대중 참여를 막고 있기에 개방형경선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히려 양자를 모순적인 것으로 놓고 선택할 것을 요구한 것은 필자가 아니라 김 실장이고 민주노총의 방침이며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인 것이다. 따라서 필자에 대한 김 실장의 비판은 고스란히 그 스스로에게 돌려져야 한다.

3.

이러한 모순적인 인식은 그의 또 다른 논거, 즉 ‘당원민주주의’와 ‘계급의 대표성 및 연대성’을 말하는 부분에서도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당원에 대해 언급하면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진보정당의 입장에서는 당원민주주의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계급적 대표성과 연대성을 관철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판단이다.”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는 주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전자에 진성당원제를, 후자에 개방형경선제를 대치시키면서 진성당원제를 옹호하는 필자가 마치 그가 말하는 ‘당원민주주의’에 갇혀 당의 ‘계급 대표성 및 연대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원 민주주의와 계급 연대성

그렇다면 이러한 비판이 정당한가. 이 문제는 앞서 필자가 언급한 정당 내부의 민주주의와 정당의 대표성의 관계에 대해 숙고할 것을 요구하는 바, 이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는 도대체 그가 말하는 ‘당원민주주의’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관철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지지자와 당의 존재이유(대표성)가 심각한 괴리를 보이는 보수정당들과 달리 김 실장이 말한 바대로 당원이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분견대”로서의 성격과 위상을 지니고 있는 진보정당의 경우, 이 문제에 대한 검토는 필수적이다.

주지하다시피 진보정당의 ‘당원민주주의’는 단지 당 내부의 의사결정 과정에 당원이 참여하여 어떤 사안에 대해 가부(可否)를 표명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당원이 민주노총, 전농 등 각 활동단위, 혹은 지역 활동 단위에서 당과 여타 대중조직들, 당에 우호적인 일반 지지자들의 요구를 적절히 수렴하고 그들과 당 사이에 의미 있는 소통기제로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포함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당은 뒷받침하고 있는가의 문제,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당원들이 이를 비판하며 투쟁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고 있는가의 문제 등도 포함한다. 바로 이것이 김 실장이 말한 ‘정치적 분견대’로서의 진보정당 당원의 권리이자 의무이며 이럴 때만이 ‘당원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김 실장이 말하는 ‘당원민주주의’와 ‘당의 대표성과 연대성’의 문제는 결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김 실장의 생각과는 달리 진성당원제는 단지 ‘당원민주주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양자의 결절점(nodal point)에 위치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제인 것이다.

진성당원제 강조가 배타적 소유 얘기하는 것 아니다

하지만 김 실장의 인식과 비판 속에서 이런 발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당원민주주의’를 ‘당 내부의 민주주의’로만 이해하면서 그것이 ‘당의 대표성과 연대성’을 제약하는 것처럼, 그것에 장애물인 것처럼 비판하고 있다.

그는 진성당원제를 이러한 협의의 ‘당원민주주의’와 동일시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성당원제를 주장하는 것이 마치 민주노동당을 “당원만의 배타적 소유물”로 인식하는 것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주장까지 펴고 있다. 진성당원제를 옹호하는 것이 어떻게 당을 ‘당원만의 배타적 소유물’로 인식하는 것과 동일하단 말인가.

이처럼 그는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논지를 펼치면서 진성당원제의 역사적 의미와 위상을 왜곡, 축소시키고 그 빈자리에 슬그머니 개방형경선제라는 ‘뚱딴지’를 가져다 채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뚱딴지와 같은 절연체로 무엇을 소통하겠다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진정 누가 무엇을 왜곡하고 있는가. 다시 확언하건데, 개방형경선제의 도입이라는 논쟁점과 관련하여 이처럼 진성당원제와 개방형경선제를 끊임없이 대립시키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한 것은 필자가 아니라 김 실장 류의 발상이다.

그런데도 김 실장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이 진성당원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계속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주변만 울리고 있을 뿐이다. 김 실장의 표현을 빌려, 만일 ‘당원민주주의’와 ‘당의 대표성, 연대성’ 양자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분견대”로서의 당원들이 핵심주체로 참여하는 진성당원제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형식적으로 존재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다하지 못할 때이다.

이 경우에도, 진성당원제를 실질화할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폐기할 것인지 등의 문제는 면밀히 검토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 개방형경선제가 냉큼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개방형경선제는 진성당원제와 같은 위상의 결절점에 위치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원이 바로 서지 않는 진보정당이, 당내 민주주의와 당의 대표성 및 연대성 제고의 결절점으로서의 진성당원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정당이 어떻게 좋은 정당이 되고 수권, 나아가 대안정당이 될 수 있는가. 참으로 안타깝다.

4.

오히려 김실장은 필자의 논지를 왜곡하여 비판하기보다 필자의 논거를 곱씹어 보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는 김 실장 주장의 논리적 근거 빈곤 등의 문제와 무관하게 그의 진의가 개방형경선제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이 ‘사회운동적 정당’으로 발전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성격에 대한 상이한 견해들, 정치적 입장들은 접어두더라도 필자 또한 민주노동당이 ‘사회운동적 정당’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보다 계급적인 정당으로, 그리고 보다 실질적인 연대를 위해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접맥시킨 정당으로 나아갈 것을 희망하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 2002년 9월 8일 당원의 손으로 선출한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선출대회에 참석한  당원들. (사진=민주노동당)
 

개방형 경선제 우경화 자극하는 계기될 수도

그렇다면 대선을 앞둔 지금, 그것도 희소한 동원 자원을 지닌 상황에서 “다양한 정치사업, 현장에서의 투쟁, 지역 활동을 통해 당원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대중들에게 보수정당들처럼 대중을 소외시키지 않는 정당임을 보여주는 것”과 그것을 개방형경선제를 도입하고 실행하는 데에 투입하는 것 중 어느 것이 과연 향후 민주노동당이 김실장이 말한 ‘사회운동적 정당’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부합되는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애초 대치될 수 없는 진성당원제의 자리에 개방형경선제를 억지로 꿰맞춘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의 당원, 지지자들이 더욱 열성적 당원이 되고 우호적 지지자들이 당원이 된다고 보는가. 그들을 매개로 일반 대중들이 민주노동당으로 결집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하여 민주노동당이 ‘사회운동적 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보는가.

물론 그 양과 질의 수준은 접어두더라도 그것의 도입이 가져올 수 있는 정치적 효과를 미리 예견하고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개방형경선제든 무엇이든 그것은 어떤 과정이 아니라 결과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개방형경선제를 통해 대중 참여를 제고시키고자 하는 김 실장의 목적이 구체화되기 위해서라도 그 과정을 차분히 밟아나갈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바로 그 과정이 급진적 시각에서 다양한 영역에 산재하는 계급운동들, 대중운동들과 함께 소통, 연대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결여된 위에서 이른바 개방형경선제의 도입은 김 실장의 주관적 희망과 달리 민주노동당을 명실상부한 계급성과 급진민주주의에 근거한 ‘사회운동적 정당’으로 만드는데 기여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의 우경화를 자극하는, 그리하여 기층대중들과의 거리를 넓히는 하나의 촉매제를 도입하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김 실장이 개방형경선제 도입의 근거로 제시한 울산의 예 또한 숙고해 보아야 한다. 필자는 지난 5.31선거를 앞두고 왜 민주노동당후보선출에 비당원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패배했는지 지금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울산의 예는 개방형경선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자랑스럽게 내세워야 할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되는, 진보정치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그것이 표를 위해 진보정치를 ‘조합적 노동운동’에 가두어버린 것에 다름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이제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짧게 비판하고자 한다. 먼저 김 실장은 필자를 비판하면서 진성당원제는 보수정당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가. 보수정당의 당원은 누구이며 그 당들이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보수정치학에 빠지면 안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서민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리고 그 당에 일반 ‘서민당원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을 진성당원제가 관철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김 실장이 업급한 서구 정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말하는 진성당원제는 그런 형식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당의 지지자와 당의 존재이유(대표성)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말 그대로 진성당원제를 매개로 통해 가장 잘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보수정당들이 서민의 고통 운운하면서 부르주아의 계급이해를 대변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노동당이 당원이며 지지자인 노동자, 민중의 이름을 내걸면서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필자는 김 실장의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김 실장이 말하는 진성당원제란 도대체 무엇인가. 김 실장은 진성당원제, 진보정치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는가. 애석하게도 김 실장은 보수정치학에 너무 깊게 침윤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것을 넘어설 자기의 언어에 대해 고민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보수정치학을 백안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참고서는 될 수 있을지언정 민주노동당의 교과서가 되어서는 안된다. 현장에서 활동한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면제될 수는 없으며 현장에서 활동하는 분이시기에 더욱 공부하고 정진해야 한다. 왜냐하면 김 실장 같은 분들의 말 한마디, 발걸음 일보가 대중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김 실장은 지난 10일 중앙위원회의 결정이 ‘51%의 절대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으로 당원의 의견을 배제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이 안을 존중한다면 더 이상 진성당원제냐 아니냐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개방형경선제를 어떻게 하면 잘 치를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중앙위위원회 결정이 당원의 의사를 배제한 것이라고 어디에서도 말한 바 없으며 ‘절대다수인 51%의 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지면을 통해 ‘말장난’을 하며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자는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언술은 논쟁의 대상인 필자나 독자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한다.

진정 김 실장이 그러한 희망을 지니고 있다면, 필자가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답변과 근거를 제시하고 당원들을 설득하면 될 것이다.

선거 앞둔 조급주의, 성과주의 발로 아닌가

다른 한편 당대회가 최종 결정단위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박수치며 끝내는 ‘체육관 행사’가 아니라면 마지막까지 개방형경선제의 도입이 지니는 문제점들을 재고해보자고 제기하는 것은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것도, 나아가 민주노동당을 위해하는 불순한 것도 아니다.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신성한 그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필자는 막중한 책무를 지니고 있는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가 김 실장과 같은 논리에 ‘감화’되어 개방형경선제의 도입을 당 대회에 상정하기로 했다면, 이것이야말로 진보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그 진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선거를 앞두고 나타난 형식주의, 조급주의, 성과주의의 표본이며 애석하게도 필자는 그 지점에서 진보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이 그 어떤 대중적 희망을 줄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발상과 행태야말로 민주노동당으로 향하는 여타 사회정치세력의 지지, 후원을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라고 생각한다.

6.

마지막으로 필자는 개방형경선제의 도입을 둘러싼 시도가 단지 어떤 제도의 도입을 둘러싼 단순한 이견의 표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 실장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거기에는 민주노동당, 나아가 진보정치의 정체성, 성격과 위상을 둘러싼 긴장과 갈등이 흐르고 있다고 판단한다.

필자는 내용 없는 진성당원제를 전가의 보도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위에서처럼 개방형경선제를 그것에 대립시키면서 결국 진성당원제를 유보, 폐기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개방형경선제를 주장하는 모든 분들이 그렇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분들이 당의 정체성, 성격의 변화와 관련하여 오히려 좀 더 솔직해지라고 권하고 싶다.

개방형 경선제 논란과 진보정치의 정체성

민주노동당의 ‘국민정당화’를 위해 진성당원제를 폐지하자고 하던가, 당원의 자격요건을 대폭 느슨하게 하자고 요구하는 것이 더 진정성 있는 문제제기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러한 방식의 문제제기가 진보정당의 당원다운 것이고 향후 주관적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될 수도 있는, ‘민주노동당의 재구성’을 위해서도 오히려 더 생산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당원과 대중을 호도하는 수사와 논리를 앞세우며 그들을 자괴감에 빠지게 하고 소외시키는 논의가 되풀이되지 말기를 바란다. 이러한 행태는 진보정당이, 진보정치가 걸어야 할 정도가 아니다.

이제 김 실장이 조희연 교수의 말을 빌어 사용한 사회운동의 급진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운동이 ‘급진적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비대칭적인, 억압적인 사회관계들 속에서 가장 고통 받는 이들의 편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 관계를 넘기 위해 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위해 연대하는 것을 말한다. 김 실장이 열거하였듯이 비정규직 노동자, 그 중에서도 가난한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환경 및 생태문제로 고통 받는 이들, 장애인, 평화를 갈구하는 이 등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김실장이 언급한 당을 민중과 사회운동의 바다로 뛰어들게 하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그리고 김 실장이 개방형경선제 도입의 근거로 든 울산지역의 노동조합들이 그러한 급진성을 내면화시키고 직간접적으로 그들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싸우는 것이야말로 민주노동당을 돕는 것이며 민주노동당에 대한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의 정치적 의미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배타적 지지’는 오히려 민주노동당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 것이고 민주노동당 또한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항상 ‘조합주의적 노동운동’에 끌려 다니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진보정치의 미래는 더욱 암울하게 될 것이다.

   
  ▲ 지난 1월 17일 집권전략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당과 민주노총의 관계 <동반파산이냐, 동반성장이냐> 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사진=진보정치 이치열 기자)
 

진보정당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필자가 조희연, 손호철 교수가 말한 그 동안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였다면 최소한 그들이 말했다는 개방형경선제, 혹은 ‘오픈프라이머리’도 이러한 급진성 위에서 제기한 것이지 김 실장의 논리 위에서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진정 개방형경선제가 민주노동당을 민중과 사회운동의 바다로 뛰어들게 하는 기제라고 한다면, 그리하여 그것이 진보정치의 목적인 비대칭적, 억압적 사회관계들을 넘어서는데 의미 있는 기제가 될 수 있는 것이라면 필자는 그것의 도입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 개방형경선제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한다고 지금 민주노총이 급진적이 되겠는가. 그것을 도입한다고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여타 급진적 시민사회운동과 대중들이 민주노총을 전폭 지지하고 응원하겠는가.

지금도 민주노동당에 의구심의 눈길을 보내면서 연대를 꺼리는 세력들이 개방형경선제를 한다고 지지하겠는가. 왜 지금 양식 있는 사람들이 개방형경선제를 결의한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결정과 민주노총의 방침을 비판하는가.

그들은 민주노동당의 실질적 개방은, 나아가 민주노총의 혁신은 일상의 실천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선거를 앞두고 이벤트행사를 벌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개방이 진성당원제와 같은 의미 있는 기제를 훼손, 무력화시키는 모순적인 행보에 근거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수구보수정당의 발상, 행태와 다른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다른 것인가. 지금 이 순간 필자가 민주노동당에 바라는 것은 수구보수정당과 다른 진보정당다운 모습이다. 권력을 잡은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하는 민주노동당이다.

민주노동당이 대중의 참여와 지지는 그들과 함께 한 고통의 시간에 비례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실천하길 기대해 본다. 그리하여 진보정당이 말하는 진보와 민주주의가 저들이 말하는 진보,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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