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냉전의 쇠퇴, 격화하는 강대국 경쟁
    [국방칼럼] "구 세계는 죽어가고 새 세계는 아직..."
        2022년 12월 16일 09:5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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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냉전 시대는 저물고 있는가? 저명한 역사학자와 백악관은 탈냉전이 끝났다고 한다. 냉전사 연구에서 처음으로 탈수정주의(후기수정주의) 해석을 시도했고, 전통주의의 문을 새롭게 연 예일대 존 루이스 개디스 교수는 지난 3월 인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22년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전쟁’은 1989년에서 1991년 사이에 시작된 탈냉전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두 달 전 발표된 미국의 ‘2022 국가안보전략’에도 탈냉전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존 루이스 개디스는 냉전의 책임이 미∙소 모두에게 있다는 관점에서 연구를 시작하였으나, 이후 국가의 도덕적 동등성(moral equivalency)을 부정하는 관점인 미국=착한 제국, 소련=나쁜 제국으로 견해를 바꿨다.]

    미국의 ‘2022 국가안보전략’은 지금의 국제정세를 다음에 올 시대를 만들기 위한 강대국 간의 경쟁이 진행중인 것으로 인식한다. 집권 초부터 줄곧 세계가 변곡점에 처해 있다고 주장해왔던 바이든 행정부는 탈냉전 이후를 ‘경쟁 시대(era of competition)’로 규정하고, 다가오는 10년 동안 다음 시대를 맞이할 힘을 축적하여, 경쟁자들을 따돌리겠다는 전략을 최우선과제로 내세웠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외 인식은 전임 트럼프 행정부의 입장을 강화한 것이다. 2017년 12월 발표된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은 5년 전에 이미 ‘강대국 경쟁(great power competition)’이 귀환했음을 선언했다. 이것은 역사학의 시대구분과는 달리 국제 상황은 탈냉전 시대와 경쟁 시대가 서로 단절되는 성격이 아님을 의미한다.

    미국의 관점에서, 경쟁은 항상 적대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경쟁이 항상 갈등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므로, 국가 간의 경쟁과 협력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이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지난 5월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행정부의 접근법’이라는 조지워싱턴대학 연설에서 “우리는 냉전도, 갈등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냉전과 갈등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2022 국가안보전략’에서 미국은 경쟁의 격화로 인해 세계가 경직된 블록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경쟁국들과 새로운 냉전을 추구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도 지난 11월 G20 정상회의 기간에 진행한 중국 시진핑 주석과의 회담에서 미국이 냉전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 돈바스 분쟁이 벌어지던 2014년 11월 가디언 칼럼은 말미에 푸틴이 냉전을 다시 유행시켰다고 썼다.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냉전과 연관시키는 오랜 관성이 있다.

    영국도 미국의 국제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 2021년 3월에 발표한 ‘안보∙국방∙개발 그리고 외교정책 통합검토’에서 영국은 오늘날의 국제질서를 국가간 경쟁이 심해지는 것으로 특징질 수 있는 ‘경쟁 시대(competitive age)’로 간주했다. 반면 영국은 경쟁의 부작용에도 주목했다. ‘통합검토’에서 영국은 코로나 이후 국제질서 추이가 효과적으로 관리되지 않을 경우 국제사회에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분열이 심해지고, 협력이 감소되는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의 관점을 따른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경쟁의 격화와 폐단이 만들어낸 산물인 셈이다. 과열된 경쟁으로 인해 세계가 냉전에 돌입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우려는 분명히 존재한다.

    냉전의 재현이 본격적으로 서구 지식인들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전통적인 관점인 전략적 동반자에서 전략적 경쟁자로 교정하면서부터였다. ‘2017 국가안보전략’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와 함께 중국을 미국의 가치와 이익에 반대되는 세계를 만들려는 ‘수정주의 국가(revisionist power)’로 새롭게 규정했다.

    호주 언론인인 그레임 도벨은 미국 펜스 전 부통령의 2018년 10월 허드슨연구소 초청 연설을 가리켜 1970년대 초 닉슨∙키신저가 중국 개방을 추진한 이래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드러낸 것으로 주목했다. 미 행정부의 대중 정책을 주제로 한 연설에서 펜스는 미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이익을 얻기 위해 중국이 구사하는 다양한 술수들을 비판하며,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을 옹호했다. 펜스의 연설 직후 미중 관계를 냉전으로 보아야 하는가를 두고 진지한 논의들이 이어졌다. 슬라보예 지젝은 2019년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 국제정세를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해 어딘가에서 ‘전쟁의 도화’선이 터질수 있는 위험한 상황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다시 ‘신냉전’, ‘제2차 냉전’, ‘냉전2.0’ 등 구사하는 용어에 차이는 있지만 냉전 질서의 재등장을 둘러싼 다양한 견해가 표출하는데 이어, 하반기에는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에 대한 반도체 제재에 들어가면서 냉전을 경고했던 사람들은 더 크게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 핵은 냉전을 상징한다. 푸틴 대통령은 올해만 10차례가 넘게 핵 사용 발언을 했고, 지난 11월 러시아 TV채널들은 느닷없이 R-36M2 사탄 ICBM(사진)을 자세히 공개했다.

    미국은 지난 8월 초 반도체산업에 대한 연구 및 보조금으로 530억 달러를 지원하는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into law)’을 제정한 데 이어, 10월 초에는 ① 반도체 장비와 특정반도체(슈퍼컴퓨터∙인공지능)의 중국 수출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② 중국의 반도체 기업 31곳을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의 ‘미검증목록(이하 UVL)’에 추가하는 두 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미국 반도체산업컨설턴트인 딜런 파텔에 따르면 이 조치는 전세계 반도체 대기업들이 모두 결합된 미국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 기업과 대학들을 강제로 분리시키는 성격을 띠고 있다.

    예컨대 ‘UVL’은 일종의 무역제한목록으로써 이 목록에 등재되는 순간 해당 기업은 미국 수출규제를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지를 입증해야만 한다. 이 절차를 통과하지 못한 기업은 다음 단계인 ‘수출통제명단(Entity List)’에 추가되어, 미국의 반도체 장비와 관련 소프트웨어의 수입이 어려워짐에 따라 경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맞이할 수 있다. 이같은 절차를 거쳐 미국 통신장비 공급망에서 퇴출된 기업이 바로 ‘화웨이’이다. 따라서 이 조치로 인해 미 상무부 산업보안국은 미국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 기업들을 일방적으로 차단할 수도 있고, 재량권을 행사해 비민감 품목의 중국 수출입을 허가할 수도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게 되었다.

    미국의 조치는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을 확정하는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 개막이 열흘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단행됨으로써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만큼 미국의 행동은 2017년 미국독립기념일에 ‘화성-14형’ ICBM을 쏘아올렸던 북한이 연상될 만큼 매우 도발적이었다.

    존 베이트먼(카네기국제평화기금)에게 있어 미국의 이번 행동은 카지노 용어로 모든 것을 건다는 의미의 ‘올인’을 선언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미국이 지난 4년간 중국과 했던 경제 전쟁은 ‘낮은 수준(low-graded)’에 불과했으며, 그 본질도 불명확했지만, 이제 미국은 오직 중국을 좌절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서 행동하겠다는 원칙을 명확히 한 것이다. 보스턴 컨설팅 그룹은 이미 2020년 3월 보고서에서 만일 미국 반도체 기업의 중국 수출이 전면 금지되어, 사실상 미중 간의 기술 탈동조화가 야기될 경우, 미국 반도체산업은 전세계 시장점유율의 18%를 잃고, 미국 반도체기업은 37%의 수익이 감소하며, 국내 고숙련 일자리는 15,000~40,000개가 감소하는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결국 미국은 이와 같은 경제적, 외교적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겠다는 결기를 베이징에 내보인 것이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조지워싱턴대학 연설에서 기술 개발과 사용에 있어서 민주적 가치를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이 ‘기술국가주의(Techno-Nationlalism)’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고 있는 세계적인 추세를 감안할 때 기술은 더 이상 중립적이지 않고, 국가 간 투쟁이라는 정치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2022년의 두 가지 특별한 사건들은 세계가 냉전에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는 징표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냉전이라는 말은 1930년대 후반에 나타났다. 당시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이른바 ‘우리 시대의 평화’를 상징하는 뮌헨협정에 열광한 대중들과 달리, 소수 지식인들은 지금의 상황을 정상적인 평화(normal peace)로 보지 않고, 갈등이 난무하는 뜨거운 평화(hot peace)로 보았다. 그 뒷면에는 강압적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도 무력은 사용하지 않는 테러와 선동의 나치 파시즘과 이를 빌미로 한 군비 경쟁이 판을 치는 냉전(cold war), 곧 ‘싸우지 않는 전쟁’이 있었다. 이렇듯 몇몇 지식인들은 평화도 아니고, 전쟁도 아닌 혼돈의 국제정세를 뜨거운 평화와 냉전에 비유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터진 후, 조지 오웰은 핵무기의 탄생으로 냉전과 평화 없는 평화가 일시적이지 않고, 오랜 기간 지속될 것으로 판단했다. 조지 오웰은 핵무기를 제조할 능력을 가진 국가가 3~4개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핵폭탄을 보유한 국가들 사이에서는 군사력의 평등이 이루어져 서로를 정복할 수 없게 되며, 그럼으로써 대규모 전쟁이 종식되는 효과가 생겨 냉전이 영구화되고, 서로 간에는 핵무기 불사용을 암묵적으로 합의한다는 가정 아래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통찰력을 보였다.

    우리는 위와 같이 냉전을 직접적인 무력 충돌보다는 비군사적인 수단이나 대리전을 통해서 갈등과 경쟁을 추구하는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사전적인 정의는 서구 중심의 인식이라는 한계를 드러낸다. 냉전이 위기에서 데탕트의 시기로 넘어가면서, 오랜 평화가 오고, 전쟁은 상상 속의 존재가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의 냉전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1945년 이후 한반도에서 냉전이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이것은 서로 다른 냉전이 강대국 경쟁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의 냉전은 전쟁이나 외교와 마찬가지로 강대국 관계에서 특정한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한 경우의 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에는 과거 승리한 냉전에 대한 추억이 짙게 남아있었고, 소련의 후계자가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은 냉전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그 향수에도 똑같이 불을 지폈다.

    냉전의 향수는 과거 프레임의 재현을 의미한다. 그 근저에는 냉전을 선과 악의 충돌로 보던 이데올로기가 있다. 쉽게 이야기한다면 이 노스텔지어는 과거의 스탈린을 현재의 시진핑으로, 소련을 중국으로, 공산주의를 권위주의로 대체하는 새로운 악당 시나리오로 갱신됐다. 작년 2월 영국 일간 가디언과 12월 미국 월간 아틀랜틱의 “나쁜 놈들이 승리하고 있다”는 거의 같은 제목을 단 칼럼은 파시즘, 공산주의, 민족주의와 싸워 이겼던 서구의 핵심가치인 민주주의가 권위주의와 독재 앞에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타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전체주의와 권위주의가 다르다는 인식은 사라지고, 권위주의는 전체주의만큼이나 위험한 악이 된 것이다.

    * 2021년 12월 아틀랜틱의 표지와 커버스토리에 등장하는 나쁜 독재자들은 왼쪽부터 마두로(베네수엘라), 루카셴코(벨라루스), 푸틴, 시진핑, 에르도안을 말한다(The Atlantic).

    냉전에 돌입할 수 있는 전략적인 환경이 조성된 상황에서 미국 행정부는 공식적으로 냉전을 부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전략적 과제 이외에 또 다른 전략적 과제는 경쟁으로 해결하기에는 불가능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원전 431년 시작된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의 우세로 시작되었으나, 430년부터 아테네에 전염병이 퍼지면서, 지도자인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아테네는 전쟁 수행에 차질을 빚었다. 이처럼 전염병과 같은 인류 공통의 사안들도 패권의 향방을 결정짓는 과정에서는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미국이 면역됐다고 해서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바이러스 변종은 언제든지 외부에서 미국으로 들어올 수 있다. 기후 변화라는 큰 과제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이 탄소 오염물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미국의 추산에 따르면 전세계 탄소 오염물의 85%가 미국 밖에서 배출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문제들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으로 풀어야 할 사안이다. 특히 미국이 새로운 국제 질서의 대체자로 의심하는 중국과의 협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미국은 지금 경쟁을 통해 중국의 추격을 차단하고 미국 주도 세계 질서를 견고히 해야 하는데, 경쟁만 가지고서는 이 질서를 유지하기가 녹녹치 않다.

    2022 국가안보전략은 미국의 당면한 두 가지 중요한 전략 과제인 ① 수정주의 국가와의 경쟁에서의 승리와, ② 전세계 모든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초국가적인 과제에 대한 협력 둘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고, 조정하기 위한 전략의 필요성을 인정만 할 뿐 막상 구체적인 해결방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경쟁이 선의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대립과 대결을 가리키다 보니 협력과는 근본적인 조화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작년 3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소개하는 연설을 참고해 보면 적절한 대안을 가지지 못한 미 행정부는 경쟁은 경쟁이고, 협력은 협력이며, 대립은 대립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벤 스콧(호주 로위연구소)은 미국의 이 같은 접근 방식을 경쟁과 협력이 서로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구분해 놓는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예컨대 지구 온난화를 위한 협력에 다른 경쟁 사안이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 온난화에 대처하기 위한 협력과 대만 문제는 별개 사안이며, 중국이 탄소 오염물 배출 범위를 제한한다고 해서 미국이 반대급부로 대만 문제에서 중국의 입장을 존중해줄 이유는 없는 것이다.

    * 1948년 제1차 베를린위기 당시 C-54 미군 수송기가 서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을 향해 작전명 ‘Vittles(식량)’를 수행하고 있다. 베를린 위기는 대만에서 향후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 중 하나로 거론된다(브리타니카사전).

    미국의 구획화 방식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미국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다. 미국의 원칙을 중국이 수용하지 않는 이상 협력은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칼자루를 쥔 쪽은 미국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경쟁과 협력이 모든 영역에서 정확하게 구분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예컨대 9월 15일 바이든 대통령의 미국 외국인투자 심의위원회(CFIUS)에 대한 행정 명령은 첨단 청정에너지와 기후 변화 대응 기술 등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국가 안보에 저촉될 경우 CFIUS가 승인을 보류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초국가적인 과제에 대한 협력 역시 미중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뜻이다. 작년 9월 중국 왕이 외교부장도 미국 존 캐리 기후변화 대사와 가진 화상회담에서 ‘미중 기후 협력은 미중 관계의 더 넓은 환경과 분리될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미국은 여전히 냉전적인 접근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경제 봉쇄는 냉전의 최초 설계자인 조지 케넌이 강조했던 정책이다. 중국에 대한 반도체 제재는 냉전 시절 서구의 전략 물자가 소련 등 공산권 국가로 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경제제재 창구인 ‘대공산권 수출 조정위원회’, 이른바 코콤(COCOM)을 생각나게 한다. 금융을 포함한 러시아에 대한 서구의 광범위한 제재는 1938년 7월 도덕적 금수조치(moral embargo)를 시작으로 1941년 7월 미국 내 자산 동결 조치, 8월 석유 수출금지조치로 정점에 이르렀던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전면 제재를 연상케 한다.

    공식적으로는 냉전을 부인하면서도, 냉전적인 행태를 일삼는 미국의 이중성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빌린다면, 관점에 따라 냉전은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우리가 생각하는 냉전이 역사의 대사건이었던 만큼 알파벳 대문자로 시작하는 특혜를 받는 ‘미소 냉전’이라면, 냉전(Cold War)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이 같은 냉전을 미국이 할 이유가 없다. 탈냉전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는 하나, 미국 중심의 패권 질서는 여전하다. 미소 냉전이 재현된다는 것은 세계가 두 개의 적대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것인데, 이는 미국 중심의 패권질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으로 국제구조가 변했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미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점도 중요하다. 미국의 반대편에 서 있는 국가들이 결집해서 미국 주도 진영에 집단적으로 대항한다면 냉전이 재현될 수 있겠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 냉전자유주의자인 앤 아펠바움은 권위주의국가들의 결집 형태를 특정한 정책이나 목적을 가진 블록이 아니라 주식회사(autocracy inc.)에 비유했다. 우선 이들을 결속시켜줄 공통된 이념이 없다. 이들 국가의 사상, 이념, 가치관들은 서로 간의 장벽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이들 국가 사이에는 중심국이 없다. 이들 사이에서 미국과 같은 권위와 지도력을 가진 국가가 출현하는 것은 서로에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앞에서 쓴 냉전의 사전적인 정의처럼, 냉전이 특정한 역사가 아니라, 경쟁국의 지정학적인 팽창을 비군사적인 수단으로 저지하는 전략을 의미한다면, 냉전은 현재진행형이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으로 탄생한 소련과 서구의 관계나, 1930년대 중후반 나치독일과 영국∙프랑스의 관계는 이같은 냉전의 또다른 사례로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현재 냉전은 프로퍼갠더 차원이나 정치 프레임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중국 외교부의 대미 논평은 언제나 미국이 냉전 사고방식과 패권주의 논리에 추동되고 있다는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냉전자유주의자들은 권위주의 국가들의 위협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냉전을 이용하고 있다.

    존 미어샤이머는 양극체제를 일컬어 균형적인 양극체제로 표현하면서, 강대국 전쟁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 가장 안정적인 국제체제라고 주장한 바 있다. 서구 시각에서 냉전은 강대국 간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귀착된 전략적인 안정구도였다. 냉전 기간 강대국 간의 대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사실은 착한 미국의 패권 유지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된다.

    * 미국 냉전의 청사진 ‘NSC 68’ 표지이다. 냉전의 진정한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NSC 68’에는 군사력에 기반한 미국의 공격적인 냉전 정책이 담겨 있다(America in Class).

    최근에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냉전에 관한 글을 읽고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퍼거슨은 냉전의 갈등 사례로 베트남 전쟁을 거론하며 초강대국들이 기른 개를 가지고 싸운 대리전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니얼 퍼거슨은 제3세계의 탈식민화라는 베트남 전쟁의 또다른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사실 냉전의 고통이 배가된 것은 설계자인 조지 케넌과 ‘긴 전문’ 때문이 아니라, 1950년 4월에 폴 니츠가 ‘NSC 68’이라는 새로운 설계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폴 니츠의 냉전은 유럽에서 전세계로 갈등지역을 확대하였고, 소련 공산주의의 침략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한국, 베트남, 이란 등을 이용했다. 나날이 강도가 거세지는 강대국 경쟁을 헤쳐나갈 묘수는 딱히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냉전의 귀환에 순순히 응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의 갈등 상황에서 냉전의 가능성에만 물두하는 것은 전반적인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 미중 경쟁 4년, 우크라이나 전쟁 10개월의 짧은 기간을 가지고서는 강대국 경쟁이 어디로 흐를지 판단하기 어려우며, 현재의 강대국 경쟁은 가능성은 적지만 냉전보다 덜 위험한 상황으로 전개될 수도 있고, 냉전보다 더 심각한 상황으로 악화될 수도 있다. 예컨대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를 보면서,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의 방아쇠가 된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일 석유수출 금지조치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국의 ‘통합검토’가 현재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 다극화는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하물며 미국조차도 국가안보전략이라는 최상위 안보 문서에서 현재의 국제정세를 헤쳐나가기 위한 명확한 해답을 미국 국민들에게 주지 못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 미중 경쟁을 마라톤이나, 긴 경기에 비유하는 말이 나오는 것은 현재로서는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는 상황이라는 표현이며, 토드 홀(옥스포드대 정치학)은 이것이 미국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면 게임은 길고 추악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래된 세계는 죽어가고 있고, 새로운 세계는 태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괴물들의 시대입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 말은 오늘의 현실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말이다.

    * <국방칼럼> 연재 링크

    필자소개
    국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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