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층적응'···사회 붕괴를
    대비하는 정의로운 전환 전략일까?
    [에정칼럼] 우리에게 어떤 대안이 존재하는 것일까
        2022년 12월 14일 10: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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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체제 내에서 취해지는 정책과 실천으로는 기후위기는 막을 수 없고, 사회 붕괴는 불가피하다. 따라서 피할 수 없는 붕괴와 재앙에 대비해 주류적 해법과 다른 새로운 적응법이 필요하다. 젬 벤델과 루퍼트 리드 등이 주창하는 심층적응 관련 포럼(Deep Adaptation Forum)과 잡지(Deep Adaptation Quarterly)의 요지다. 그리고 지속가능성의 정치는 끝났다는 게 또 다른 메시지다.

    번역서 『심층적응』(착한책가게, 2022)은 부제 “기후혼돈의 실체를 탐험하기”를 “기후대혼란, 피할 수 없는 붕괴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로 적절하게 바꿨다. 심층적응론은 회복력, 포기, 복원, 타협이라는 심층적응 의제 혹은 포스트 지속가능성 프레임을 제시한다. 시점을 다소 늦추거나 피해를 일부 줄일 수 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붕괴와 재앙 상황에서 지역공동체가 분열하지 않고 협력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과 실천에 관심을 기울인다.

    젬 벤달의 모습과 책 ‘심층적응’

    이런 관점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멸종반란(Extinction Rebellion)이 탄생했던 영국 등에서 심층적응과 사회붕괴를 둘러싼 논쟁이 나름 진지하게 진행됐다. 2022년 초, 영국 멸종반란의 새로운 전략(XR 2.0) 수립 과정에서 심층 적응과 정의로운 적응(Just Adaptation) 간 노선 경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감축과 적응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느냐가 쟁점이었다. 정의로운 적응 입장은 급진적 기후정의 관점에서 화석연료 자본주의 해체에 초점을 맞춰 탈탄소 체제 전환 전략에 우위를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심층적응론은 짧은 시간 내에 생활방식과 생산양식의 엄청난 변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심층적으로 적응하는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감축과 적응 모두가 기후위기 대응의 주요 방향이라는 상식에 반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논쟁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논쟁에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자, 그럼 국내 기후정의와 정의로운 전환 운동은 어떤 내용을 건질 수 있을까?

    기후과학의 불확실성과 보수성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메시지가 점차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반영하는 추세로 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학자 반란’(Scientist Rebellion) 소속 학자들이 거리 곳곳에서 펼치는 활약도 돋보인다. 최근 온실가스 배출 추세를 보더라도, 각 국가의 감축목표를 합산해 봐도, 이대로 가면 1.5도 상승 제한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거의 확실해졌다. 손실과 피해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앞으로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적응 장애를 겪고 있다. 적응의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쩌면 ‘감축에서 적응으로의 전회’가 절실한 것인지 모른다.

    붕괴 불가피성에 따른 심층적응에 초점을 맞추는 젬 벤델에 비해 루퍼트 리드는 붕괴할 가능성은 높지만 그 불확실성에 주목한다. 이 둘의 접점은 각자가 취하는 심층적응과 변형적 적응(Transformative Adaptation)의 상호 보완 및 결합에 있다. 지배적 적응과 차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변형적 적응은 관행적 대처나 점증적 적응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접근 방식으로 제법 많은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파고들고 있다(Giacomo Fedele et al., 「Environmental Science and Policy」 101, 2019).

    그런데 이 정도라면 심층적응이 던지는 충격과 공포는 크지 않다. IPCC는 감축과 적응 측면을 종합해 지속가능성(녹색 경로), 중간 경로, 지역 간 경쟁(험난한 경로), 불평등(분열된 경로), 화석연료 발전(고속도로) 등으로 공통사회경제경로(Shared Socio-economic Pathways)를 상정하기도 한다. 회복력, 포기, 복원, 타협이라는 주제와 이와 유사한 의제를 놓고 세계 곳곳에서 전개된 그동안의 진지한 이론적, 실천적 토론과 실천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흥미를 끄는 대목은 심층적응이 ‘전환 스펙트럼’에서 차지하는 맥락과 함의에 있다. “교파 이상의 것”이 분명하다.

    심층적응론은 각종 종말론, 소멸론, 파국론, 붕괴론 딱지가 붙는 형해화된 이데올로기적 담론은 아니다. 그렇다고 기후위기의 파국적 경고를 단순 반복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재난 유토피아’에 가깝다. 존 벨라미 포스터와 브렛 클라크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인류세의 자본시대(Capitalinian Age)를 지나 꼬뮨시대(Communian Age)로의 이행으로 확대 해석할 여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심층적응의 유리한 고지는 자본과 기술로 무장한 세력, 그리고 거기에 협력하는 집단이 차지하고 있고, 앞으로 ‘재난 자본주의’가 변모하는 심층적응의 우경화 버전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우파의 가속주의(Accelerationism)로 평가할 수 있다. 탈성장과 정반대의 대안 스펙트럼에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황소걸음, 2020)와 같은 좌파 가속주의가 있다면, 그 비슷한 위치 인근에 우파 가속주의가 있다.

    브렛 킹과 리처드 페티의 『테크노소셜리즘』(매일경제신문사, 2022)은 불평등, 팬데믹, 인공지능과 기후변화에 직면한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 집단 대 개인 그리고 혼란과 질서라는 두 축으로 미래 시나리오를 전망한다. 혼란스러운 미래에 속하는 루디스탄(Ludistan)은 기술 진보를 거부하는 포용적·집단적 사회를 의미하고, 페일디스탄(Failedistan)은 글로벌 폭동과 무질서가 만연한 독재 정치를 특징으로 한다. 반면, 질서정연한 미래에는 부자와 빈자들의 불평등이 기술적·공간적으로 분리되는 배타적·분열적 사회인 신봉건주의가 한편에 있고, 고도의 자동화를 통해 보편적 기본소득과 기본서비스가 보장되는 지속적으로 번영하면서 글로벌 협력체계를 형성하는 테크노소셜리즘이 다른 한편에 있다.

    이런 논리 구성과 시나리오 전망에 따르면, 심층적응은 루디스탄에 가까운 사회로 볼 수 있다. 우파 가속주의로 건설되는 테크노소셜리즘은 그 대척점에 있다. 그 중간 어딘가에 또 다른 사회를 그려볼 수 있다. 이를테면, 제러미 리프킨의 『회복력 시대』(민음사, 2022)는 지구 절반을 자연으로 복원하거나 보존해야 한다(Half-Earth)는 주장에 호응한다. 생태 지역 거버넌스와 분산형 동료 시민 정치 등을 통해 진보의 시대에서 회복력의 시대로 경로를 변경해야 한다는 지론을 펼친다.

    전환 관점에서 보면, 심층적응론은 사회가 붕괴할/하는/한 시대에 생존하기 위한 심층 생태주의적 태도이자 대중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다. 지역화폐, 전환마을, 퍼머컬쳐 등 재지역화의 세계화가 핵심 전략으로 거론된다. 폴 호켄의 『플랜 드로다운』(글항아리사이언스, 2019)과 프로젝트 드로다운(Project Drawdown)의 솔루션들은 대세를 바꿀 수 없다. 기후위기 대응 내러티브, 리더십과 실행 전략에서의 ‘전쟁-평화’ 또는 ‘전시 동원-평시 실천’ 논쟁도 우회한다. 자격, 보증(확실성), 통제, 자율성, 진보, 예외주의로 구성되는 근대적, 파괴적 이데올로기와 그 습관들이 기후혼돈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고, 환경주의자들도 여기에 복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또는 붕괴 이전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기후정의 활동에 관여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여기지만, 부차적인 이슈에 불과하다. 우리/인간 스스로 체계 안에 유폐하는 과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거의 유일한 대처법은 다른 생활방식을 실천하는 지역공동체 참여 그리고 심리적, 영적 성찰과 해방이다.

    글쎄, 무엇을 건질 수 있을까? 『우리가 구할 수 있는 모든 것』(나름북스, 2022)의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더 묵직하게 와 닿는다. “심층적응의 시작”인 만큼 후속 작업을 접할 언젠가는 스카우트연맹(Scout Association)을 떠올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에게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다. 체제를 근본적으로 신속하게 바꾸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불가지론이다. 어떤 적응이냐도 필요한 질문이지만, 기후정의와 정의로운 전환을 뿌리 내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녹색 계급이라는 주체 형성이다(『녹색 계급의 출현』, 이음, 2022).

    필자소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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