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FTA 중단, 명예로운 실패 선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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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26일 08: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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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를 참여정부라고 불렀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도록 하겠다는 국정의 가치를 강조한 용어다. 좋은 말이다. 대통령은 이 말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여러 가지로 비판을 받고는 있지만 최소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한 대통령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의 비극, 민주주의 형식과 내용 분리하면서 시작

       
      ▲ 노무현 대통령 (사진=청와대)
     

    “권력을 등에 업고 특권을 누리는 국가기관은 지금 없습니다. 권력이 합리화되었고 정경유착이 끊어졌습니다……권위주의도 해소되었습니다….저는 흔히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우리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에 불만을 가진 표현이라고 생각하여, 이 말을 잘 쓰지 않지만, 어떻든 이것은 이제 완성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노무현,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 합니다” 2007. 2. 17).

    나 역시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틀 자체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 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을 분리해 사고하는 자는 지금 이 시대에선 민주주의자로 불리기 어렵다. 대통령도 여기에 해당된다. 참여정부의 비극은 이 두 요소를 분리해 접근한데서 시작되었다.

    한국정치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의의 발전은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본격화되었고,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뿌리를 내리며 공고화 단계에 들어섰다. 김영삼 정부가 내세운 문민화(탈군부화), 김대중 정부가 이룬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과도적 의미를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 이렇게 김영삼, 김대중의 정치적 성과 위에서 비로소 노무현 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에 부여된 민주주의의 시대적 과제는 무엇이었나? 대통령이 진보진영 내 비판적 지식인 가운데 유독 최장집 교수를 정치의 장으로 불러들여 공격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유독 최장집을 공격하는 이유

    나는 최장집 교수가 노무현식 민주주의 한계를 가장 정확하게 지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최장집 교수에 대한 감정적이고 정치적인 대통령의 공격은 역설적으로 대통령이 민주주의에 실패하고 있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꼴이 된다.

    대통령이 자신의 성과로 포장하고자 했던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은 유감스럽게도 퇴행적이지는 않더라도 이미 오래된 것이다. 그래서 참여정부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사회에서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논의되고 있었다. 노무현 시대의 과제는 절차적 민주주의 ‘이후’의 것이어야 했다.

    지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민주주의의 과제는 크게 다음 두가지이다. 첫째, ‘참여’ 민주주의를 선거정치 정상화에 국한하지 않고, 국민의 공공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국가기구, 경제조직, 사회조직에 적용하는 것, 즉 민주주의의 확장이다. 둘째,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 즉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실현이다.

    노대통령은 민주주의의 확장에 실패했다

    대통령은 ‘참여정부’, ‘참여민주주의’를 모토로 했다. 적어도 그 방향은 옳았다. 민주주의의 뿌리를 튼튼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국민의 직접적인 감시와 참여가 제도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민주주의 확장에 대한 철학과 의지가 있었다면, 집권 초기에 명확한 방향 정립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통령에게 참여민주주의는 정치적 슬로건에 머물렀다. 그 슬로건을 구체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대통령은 본인이 그토록 강조한 ‘참여’를 공조직과 시민사회를 연결하는 통로의 제도화로 이해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참여를 시민사회 내의 (친정부적) 엘리트들이 공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끼리끼리의 참여로 협소하게 이해했고, 또 그렇게 실행했다.

    ‘참여’는 과거의 사회운동 세력 중 일부 명망가, 친정부 지식엘리트 등을 공조직의 이사, 감사, 위원회 위원 등으로 충원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인사의 공정성을 유난히 강조했던 정부에서 ‘낙하산 인사’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이유이다.

       
      ▲ 언론광장 주최 특강을 하고 있는 최장집 교수(사진=미디어오늘)
     

    개혁을 한다면서 개혁추동세력을 배제해

    나는 한나라당이 ‘위원회공화국’이라고 참여정부를 공격할 때마다 청와대를 옹호해 주었다. 한나라당의 공격이 위원회에 참여한 몇몇 개혁적 인사를 겨냥한 것 때문이기도 하고, 또 통치자의 의지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인적 인프라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봤다.

    그러나 개혁은 기득권의 저항을 제어할 수 있는 구체적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참여정부는 개혁을 이루기 위한 ‘힘’을 스스로 버렸다. 그래서 참여정부는 기득권화되어 있는 관료집단조차 뚫지 못했다.

    한국사회에는 민주적 참여를 통해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건강하고 영향력있는 세력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들을 시야에서 하나 둘씩 지워나갔다. 오히려 개혁을 약속했던 사람들을에게 개혁 포기를 종용하려 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반개혁세력’과 동일한 시선으로 다루기조차 했다.

    행정부 개혁을 참여민주주의적으로 추진할 생각이 있었다면 공무원노조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했을까? 교육개혁을 원했다면 교원노조, 학부모, 학생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했을까? 재벌개혁을 정말 이루고자 했다면 시민단체, 노동조합과 어떻게 만나야 했을까? 대통령은 개혁을 주창하면서 개혁추동세력을 배제해 나갔고, 그 결과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데 실패했다.

    일하는 사람이 빈곤한 민주주의

    이제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의 문제를 살펴보자. 2002년 대선 때 민주노총 조합원은 자신들의 위원장 출신 권영길 후보(36%)보다 노무현 후보(47%)에게 더 많은 지지를 보냈다. 이들이 권영길보다 노무현을 더 신뢰한 것은 아니다. 차별해소, 노동기본권 확립, 통합적 노사관계 등등 노무현 후보의 공약이라도 우선 현실화하자는 단계적 전략을 택한 셈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기대가 깨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속노동자 역대정권 최고, 집권 4개월 만에 철도, 화물파업 공권력 투입, 비정규직 850만 시대 등을 당연시하는 노동자를 향한 잔인한 통치가 시작되었다. 노무현을 지지했던 노동자들은 국민소득 2만불,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위해 퇴출 일순위로 지목되었다.

    노무현 정부에 의해 구속되고 수배된 노동자들은 일용건설 노동자, 화물 덤프트럭 노동자, KTX 여승무원을 비롯해 예를 들기에도 벅차다.

    119만원 월급에 생존의 기아선상에 놓인 850만 비정규직과 그 가족, 340만 농민, 350만 영세상인 등 절대다수 국민들이 궁핍의 고통으로 빠져 들어 갔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동3권 밖으로 내몰리고, 지역시장이 붕괴되고, 장애인, 이주노동자, 신용불량자, 빈곤계층 등 사회적 약자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노동자는 한국사회에서 사는 ‘특정한’ 집단이 아니다. 다수 서민들이 노동하는 사람들이다. 시장도, 재벌 대기업도 그리고 참여정부도 모두 노동에 기반을 둔 사회공동체 위에 있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일하면서도 빈곤하게 살고 있다. 노동의 빈곤은 한국사회의 빈곤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살아 움직이기 어렵다.

    노동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

    노동이 위기에 놓인 다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있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절차적 민주주의, 내용적 민주주의를 나눠서 단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관념적’이다.

    문제는 대통령 스스로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하지 않았느냐”는 퉁명스런 자기과시는 “조국 근대화의 과업이 힘차게 추진되고 있으나 그 그늘에서 눈물 흘리는 소외계층에게도 이제는 관심을”이라고 말하던 박정희의 유보된 민주주의와 질적인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다.

    지금 이미 대중들이 묻기 시작했다.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 심지어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며 지독한 냉소마저 던지고 있다.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기이다. 이 시대 다수 사회구성원들이 의사결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며, 일하는 사람들이 가난해 지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우리는 맞고 있다.

    한미FTA협상 중단해 명예로운 실패자가 되어야

       
     

    최근 정당정치의 외곽에서 정치판을 흔드는 ‘대통령 정치’가 대단원으로 치닫고 있다. 대통령은 비정상적인 방식, 정치적 ‘곡예’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대통령의 실패에 대한 역사적 검증은 이미 내려졌다. 분배구조를 개선하겠다며 복지정부를 외쳤지만 복지사칭정부였으며, 국민을 먹여살리겠다며 개방에 승부를 걸었으나 서민은 죽을 맛이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했다고 자랑하지만 오히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는 퇴보하였다.

    이제 1년 남았다. 아직도 대통령의 선택지는 남아 있다. 비록 실패했지만 ‘명예로운’ 실패자기 되기를 바란다. 지금이라도 서민의 삶을 대통령정치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한미FTA가 관건이다. 관료들의 호주머니를 벗어나 우리사회를 위험에 몰아놓을 한미FTA협상을 중단해야 한다. 이것이 4년전 노무현을 외쳤던 수많은 서민들에 대한 대통령의 마지막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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