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을 벗어나면 우린 모두 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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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26일 01: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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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기와 함께 찍은 필자. 사진작가인 남편의 작품.

     

    한국에서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기르면서 살아가기. 이것은 수많은 개인적, 정치사회적 코드를 내장하고 있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필자는 ‘프랑스 남자와 결혼 않고 살아가기’라는 제목의 연재와 관련해서 "글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결국 사회적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고찰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남편도 "그러한 목적일 때만 자신과의 삶에 얽힌 이 집필을 동의할 수 있다고 했다"고 말한다.

    <레디앙>은 사적, 공적 영역의 경계선 긋기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필자의 이야기가 삶과 생활과 정치와 다양한 관계에 대한 신선한 자극을 줄 것을 독자와 함께 기대하며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국경은 인류가 가진 자유로운 에너지의 횡단을 차단하는 범세계적인 억압의 상징이다. 그 억압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 도발을 한번도 감행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질서와 가치가 전복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우린 누구나 어떤 종류의 철조망을 넘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탈 질서를 쉼 없이 기도하던 유년의 발랄한 기억들이 희미해질 무렵, 우린 자본과 질서의 충실한 노예로 길들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날 우리가 ‘월담’의 기억들을 되살려 철조망에 대한 도전을 다시 감행하는 순간 생동하는 자아의 동맥은 다시 뛸 것이다.

    유라시아 양극단에서 성장한 부모와 인도 이름의 아이

    최근 여수에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화재로 희생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명이 화재로 희생되기 전, 그들의 영혼은 이미 이 나라의 파렴치한 이주노동자 제도와 외국인 차별의 악습, 악랄한 자본가들의 착취에 숨이 멎었다.

    30대의 60%가 이민을 가고 싶어 하고, 세계 제1위의 자살률이 입증하는 살기 힘든 이 나라. 그런 나라에 일하러 온 외국인들이 법적으로 허가된 날짜를 초과하여 머물렀다고 해서, 이 땅에 흐르지도 않는 젖과 꿀을 다 차지할 것처럼 호들갑 떠는 건 애당초 어불성설이다.

    누구든 새로 디딘 땅에서 삶을 일구면, 그 삶이 잿빛이든 황금빛이든, 비자가 허락하는 날짜 따위가 삶의 유기적 흐름을 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비자라는 건 얼마나 숨 막히는 구속인가? 낯선 풍경과 문명을 누리며 유목할 자유를 잃고, 태어난 땅에 귀속되도록 강요당한다는 것은.

    개방하지 않으면 시대에서 완전히 낙오된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떠들어대는 정부가 진정한 열린사회의 의미를 알기나 하나. 우스운 법이 있으면 우습게 여길 줄 아는 건 자유인이 지녀야할 첫 번째 덕목이다.

    5년간 프랑스에서 외국인으로 지내는 동안 나는 상습적으로 불법체류를 경험했다. 매년 새롭게 갱신해야 하는 체류증 날짜를 지키지 않고 언제나 한두 달 정도 늦게 하곤 했다. 그런 상황이 존재를 위협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 존속하는 삶은 서류조각보다 당연히 강하니까.

    프랑스 여권으로 한국에 온 나의 두 살 된 딸은 1년 넘게 불법체류 중이다. 새로 한국에서 여권을 만들지 않고, 프랑스 여권으로 출국하려 한다면, 이 아이는 출입국관리소의 제재를 받아 불법 체류자 수용소에 갇힐 것인가?

    <레디앙>의 ‘레드’한 촉수가 진보의 또 다른 관점을 개척할 ‘꺼리’로 외국인과 혼인신고도 않고 아기까지 낳아 살고 있는 나의 삶을 포착하였을 때, 난 환호했다.

    프랑스 68세대이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생활 속 좌파의 존재양식을 보여주는 멀티예술가 희완, 대학운동권의 집단적 파시즘에 포섭되지 않으려 애쓰며 대학시절을 보낸 후, 뒤늦게 문화사회 건설을 위한 사회주의적 실천을 꿈꾸며 좌파정당에 합류한 나, 유라시아 대륙의 양극단에서 성장한 부모 밑에서 대륙의 한가운데인 인도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 칼리.

    서로 다른 시공간적 배경을 가지고 유라시아 대륙을 오가며 살아야할 운명의 사람들의 삶에서 퍼 올릴 질문들이 우리가 해방되어야할 많은 관념의 족쇄에 유별난 포물선을 그리는 ‘작은 짱돌’을 날려주지 않을까 기대하기 때문이다.

    작은 짱돌은 어디서 왔나

    어릴 적, 고무줄놀이나 사방치기 같은 고난도의 놀이는 깍두기로 한 번 해보는데 족하던 내가 ‘몸치’ 콤플렉스 없이 즐기던 몇 안 되는 놀이 ‘땅따먹기’는 내 삶에 숙명적 영감을 남겼다.

    땅을 넓히는 것보다 땅의 기기묘묘한 디자인에 더 골몰하긴 했지만, 땅따먹기에서 내가 가장 즐거워하던 순간은 두 개의 꼭짓점을 손가락을 한껏 벌려 이으면 꼭짓점 사이에 패인 골을 차지하는 손뼘재기였다.

    카타르시스가 밀려오는 마술 같은 손뼘재기의 포인트는 ‘두 꼭짓점 사이의 계곡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계곡, 내가 차지하는 풍요의 몫이 커진다는 사실’

    땅따먹기가 전하는 이 이미지는 계시처럼 나의 머릿속에 각인되고 시간과 더불어 재해석을 거듭하면서, 가능한 한 한국으로부터 먼 나라에서 가서 그 깊은 계곡에 고여 있는 다름을 온전히 포용하는 것을 꿈꾸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 사라져간 90년대 말 외환위기는 내 인생에도 큰 자국을 남겼다. 공연기획자로 일하던 나는, 대학로 전체에 공연이 단 한편도 올라가지 않는 소설 같은 얘기가 현실로 드러나는 날들 속에, 신앙 같던 ‘문화’라는 가치가 경제가치 앞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며,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사회에 터질 듯 한 분노를 느꼈다.

    언제나 이중적이고 폭력적이었던 이 사회를 감당할 수 없이 지쳐버린 영혼을 추슬러, 오랫동안 꿈꾸던 탈출을 감행할 때, 파리 행 비행기를 타는 딸의 등 뒤에서 엄마는 “너는 이제 자유다”라고 말해주었다.

    우리 나이로 서른 살이 되던 생일날 파리에 도착하면서, 나에게 새롭게 허락된 20대의 마지막 한해를 고맙게 누렸다. 싸늘한 파리의 겨울을 코트도 안 입고, ‘자유’ 하나만을 슬쩍 걸친 채, 다름과 차이의 싱그러움을 맡고 다녔다.

    하늘색 미지의 눈동자를 반짝이는 어린 랭보를 길모퉁이에서 만나고, 애인의 팔짱을 끼고 앞에서 걸어오는 무감한 마르그리트 뒤라스 옆을 스치며, 내 오랜 여신 이사도라 던컨의 묘비 앞에서 눈물을 떨구었다.

    내 인생의 깊고 붉은 계곡 앞에 서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연애가 주는 희로애락을 차례로 맛보고, 한참 석사논문을 쥐어짜내고 있던 파리 체류 3년차의 어느 날, 길에서 만난 사람이 지금의 칼리 아빠 희완 트호뫼르이다. 그의 성은 그가 태어난 지역어인 브르타뉴어로 ‘깊은 계곡’이란 뜻.

       
     ▲ 희완과 아기와 함께
     

    사진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그는 내 모습이 ‘세상이 주는 고통에 신음하는 약자의 표정’을 담고 있어서 자신의 비디오작품을 위해 내 초상을 찍고 싶다고 했다. 그때 나는 논문의 무게에 짓눌려, 정확히 말하자면 사디스트(sadist) 지도교수의 지독한 ‘똥개훈련’에 지쳐가던 중이었다.

    1년 뒤, 가능한 한 상대 말판의 모든 말을 잡아먹는 공격적 전술을 사용한 나와, 어떤 경우에도 상대의 말을 잡아먹지 않는 평화적 전술의 그가 밤새 윷놀이를 하다, 결국 윷놀이 경력이 25년은 더 많았고, 잔인한 전술까지 구사한 내가 25:23의 신승을 거두며 맞이했던 2003년 첫 아침. 치열한 전투의 기억을 뒤로 하고 몽수리 공원의 싱그러운 새벽바람을 가르며 산책을 하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슬며시 애정의 입자로 전환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논문이 기적처럼 성공적으로 통과되고, 지도교수의 뒤통수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지 않은 나는 바로 짐을 싸 귀국하고, 희완은 6개월 뒤, 한국에 와 삼청동 한옥, 삼성동 오피스텔, 신대방동 고층아파트를 전전하며 특유의 느긋한 호흡으로 동북아를 여행한다.

    그 동안 나는 국립발레단 기획팀장으로서의 우스꽝스런-주류사회에 아직 편입 가능한지 궁금해서 응시했고, 단지 취직이 되었다는 이유로 다녔으며, 여전히 구태의연한 그들의 조직생활(?)에 화들짝 소름끼쳐 바로 나왔다-경험을 접고, 불어를 가르치고, 옷 만들기를 배우고, 대학에서 어쭙잖은 강의를 하면서 유학 직후 인간들 특유의 싱숭생숭한 날들을 보내며 희완과의 여행에 종종 동행했다.

    6개월 뒤, 파리의 일들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희완은 돌아가고, 난 문화정책이라는 전공과 문화사회 건설이라는 꿈을 실현하고자 가장 근접한 이상을 내비치는, 막 떠오르는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에 지원, 소중한 ‘간택’을 받는 데 성공한다.

    당에 출근하던 첫날, 희완은 비행기를 탔다. 그가 한국에 오기 하루 전, 발레단에 사표를 냈던 것처럼. 하루의 오차도 없던 이 치밀한 시간계획 속에 참으로 위대한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은 아이였다.

    부모의 우유부단함을 보다 못한 아이가 스스로 결단을 내린 듯한 느낌의 이 상황을 두 부모는 일초의 저항도 없이 받아들였다. 민주노동당은 미혼인줄 알았던 직원이 어느 날 배가 불러 오고, 6개월도 일하지 않았으면서 1년 휴직을 신청하는데 어떤 정신적 압력도 행사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거의 유일한 직장이었다.

    문제는 한국의 가족들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6개월이 될 때까지도 작아서 모르고 지나갈 수 있었지만 7개월이 되어서 엄마는 사태를 간파하셨고, 내가 너무도 당당히 아이 엄마로서의 자태 속에 취해 있던 탓에, 크게 날 혼내지도 못하셨다.

    단지, 엄마는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싸늘한 말과 함께 다시 파리 행 비행기를 타는 딸을 보내셨다. “다시 이 집에 들어오지 마라.”

    후…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제 여러분들은 칼리 엄마와 아빠의 ‘쿨하거나 혹은 터프한’ 동거기에 들어가는 문턱에 서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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