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 구로구 옌볜동의 중국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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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24일 10: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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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구로구 옌볜동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 곳곳의 중국음식점에서 풍겨지는 향신료 냄새로 거리가 가득하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의 입에서는 거침없는 중국말과 조선족 사투리가 뒤섞여 흘러나오고, 200여 미터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붉은색 간판과 ‘中國食品’, ‘菊花館’, ‘國際電話房’ 등 한자 상호는 마치 이곳이 중국의 연변거리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 온다. 이러한 까닭일까? 사람들 사이에는 가리봉동이 ‘구로구 옌볜동’이라 불리기도 한다.

       
      ▲ 한자 상호의 간판이 즐비한 가리봉동의 또다른 이름 ‘구로구 엔벤동’
     

    서울 구로공단 주변의 구로구 가리봉동, 영등포구 대림동, 금천구 가산동 일대에는 90년대 중반부터 중국동포와 중국인 노동자들이 함께 거주하는 이른바 ‘조선족타운’이 형성되어 진다. 가장 많을 때는 거주인구가 6만 여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중국동포와 중국인들은 3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렇게 가리봉동을 중심으로 구로지역에 중국 이주 노동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한국의 산업화과 만들어 놓은 구로동의 인프라와 큰 연관이 있다. 즉 벌집으로 일컫는 소규모 방의 월세는 10만원 안팎으로 매우 저렴하고, 주변에 공단과 소규모 공장가가 밀집해 있어 일감이 많다는 것이다.

    게다가 서울은 물론 일감이 많은 경기 남부 공장지대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으니 아껴 생활하고 남은 돈으로 고향에 송금을 해야 하는 이주노동자의 처지에는 딱 맞는 지역일 것이다.

    한·중 근대화의 외딴방 : 벌집

    말이 나왔으니 벌집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 해보자. 벌집은 1960년대 한국의 산업화가 진행되고, 구로동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노동자의 요구에 맞추어 생겨난 노동자의 숙소이다.

    벌집이라는 애칭은 방과 부엌이라는 최소주거단위가 마치 ‘벌집’과 같은 형태를 이룬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벌집’은 보통 2층짜리 단독주택 하나에 10에서 30세대까지 거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곳에는 당연히 개별 화장실은 없어 그 많은 세대가 함께 공동화장실을 이용해야만 하는 열악한 거주환경을 가진다.

    인기소설이었던 ‘외딴방’의 작가인 신경숙은 벌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서른 일곱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3층 붉은 벽돌집. (중략) 서른 일곱개의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 방. 그토록 많은 방을 가진 집들이 앞뒤로 서 있었건만, 창문만 열면 전철역에서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신경숙, 외딴방 중)

    이 자전적 소설에서 ‘벌집’에 대해 작가는 ‘늘 사람으로 번잡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그 방을 생각하면 한없이 외졌다는 생각, 외로운 곳’이였다고 기억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벌집’은 어렵고 초라했던 시절을 떠올리기에는 너무나 아프고 힘들었던 곳,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속 깊은 곳에 안고 가야만 하는 ‘외딴방’으로 남기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외로운 ‘외딴방’은 산업구조가 재편되고 구로공단의 많은 공장들이 지방으로 이전하고나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사라지는 듯했다. 즉 벌집의 주요 수요층이었던 노동자들의 급격하게 감소하는 반면에 비어 있는 벌집의 수는 증가했던 것이다. 이 빈자리를 중국동포나 중국 이주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메운 것이다.

    이렇게 ‘벌집’에서의 거주라는 사회적 현상은 한국과 중국이라는 국경을 떠나 놀랍게도 매우 유사하게 반복된다. 그 이전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이 받던 저임금과 차별까지 고스란히 말이다. 즉 ‘벌집’이라는 거주형태와 문화는 ‘산업화 과정’과 그에 따른 노동자의 형성과 맞물려 나타난 현상인 것이다.

    1960~70년대 한국의 노동자들은 농촌 해체와 함께 서울로 이주한 인력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값싸고 열악한 환경에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떠난 바로 그 자리에 ‘코리안드림’으로 중국에서 경작하던 농토를 버리고 한국에 온 차이나코리안이 대신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역시 중국 근대화의 산물의 한 형태인 것이다.

    가리봉동의 음식문화

    어찌되었든 간에 이런류의 대규모 노동의 국제이주는 음식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음식문화의 전파는 이전 우리 역사에는 없었던 다른 요리와 방식들이 많이 있다. 즉 음식 재료에서는 노동자들이 그들 나라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던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재료가 이용되고, 밥 먹는 예절이나 식당의 화려한 실내장식보다는 왁자지껄 값싸게 먹고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 양고기 꼬치구이
     

    가리봉동에 소개된 중국음식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는 한국 사람이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 양고기 요리가 있다. 양꼬치 구이는 기다란 쇠꼬챙이에 향신료로 양념한 양고기를 꽂아 숯불에 구워먹는 것으로 동북지방에서는 가장 대중적인 음식 중 하나이다.

    꼬치를 먹을 때 가장 중요한 양념은 보통 고춧가루, 깨소금, 즈란(향신료의 일종) 세가지가 제공된다.

    우리나라의 밑반찬과 같은 볶은 땅콩, 중국식 무절임인 짜샤이, 오이지무침와 함께 양꼬치 구이를 먹는 모습은 가리봉동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중 하나이다.

    또한 가지를 기름에 튀긴 ‘쓰어치에즈’, 소고기를 얇게 밀어 만든 두부요리인 ‘즈란뉴로’ 등이 있다.

    물론 가리봉동에서는 이것들 이외에 다양한 중국본토요리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음식이 낯선 이유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서민음식이 많이 있고, 홍콩, 사천, 베이징의 음식뿐만 아니라 동북지방의 음식이 많이 소개되기 때문이다.

    주말이 된다면 가리봉동에 가서 40도가 넘는 중국의 대표적인 서민음식과 서민술인 코베이(컵술)와 함께 맛보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월병, 꽃빵, 중국술 등 중국음식들을 값싸게 쇼핑할 수 있는 즐거움은 그냥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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