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개념 파괴'…최교수 '정략적?'
        2007년 02월 22일 10:48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와 한나라당의 집권 문제 등을 놓고 진보 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에 대해 정치권도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논쟁의 이슈 자체가 이번 대선의 흐름과 직결되어 있는데다 최장집, 손호철, 조희연 교수 등 진보 학계의 간판급 학자들이 전면에 나섰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뛰어들면서 논쟁 자체가 직접적으로 ‘정치화’되는 보기 드문 양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 논쟁의 불을 붙인 고려대 최장집 교수(사진 왼쪽부터),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 서강대 손호철 교수
     

    "학자의 원론적 발언일 뿐" vs "볼셰비즘 같은 것"

    이번 논쟁을 촉발한 건 최장집 교수의 이른바 ‘한나라당 집권 수용론’이다. 집권기에 대한 평가에 따라 정권이 교체되는 것은 정당정치의 기본 원리이며 한나라당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는 ‘원론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한나라당은 안 된다’는 발상법에 주로 기초하고 있는 여권의 대선전략에는 적지 않은 ‘정치적’ 타격이 될 수 있다.

    최 교수의 주장에 대한 여권의 반응은 크게 두 갈래다. 먼저 학자의 입장에서 원론적인 발언을 했을 뿐이라는 인식이다. 우상호 의원은 "학자에게 정치적인 판단을 강요하긴 어렵다"면서 "학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 아니냐"고 했다.

    반면 최 교수의 발언이 낳게 될 정치적 결과에 보다 주목하는 시각이 있다. 민병두 의원 같은 사람이 그렇다. 민 의원은 최 교수를 ‘진보 이데올로그’로 규정했다. 그저 순수한 학자로만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민 의원은 최 교수의 발언이 모종의 정치적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최 교수의 주장에 대해 "열린우리당 같은 쁘띠부르조아 세력을 무력화하고 형해화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조아와 양대 진영을 이룰 수 있다는 관념의 연장"이라면서 "볼셰비즘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최 교수가 일반론을 말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한 데 대해 "자신의 발언이 갖는 정치적 파장을 인식하지 못했을 리 없고 설혹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최 교수의 발언이 일반적인 평론가로서의 발언이라면 그 무의미성이 지적되어야 하고, 정파적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라면 그에 대해 지적하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최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모습이다.

    학계 출신인 박형준 의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권을 죽어도 내놔서는 안 된다는 관점에 입각해 움직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당할 생각, 야당할 생각도 해야 한다"면서 "국정운영에 실패했으면 당연히 정권을 내놓을 생각을 해야 한다"고 했다. 고진화 의원도 "최 교수의 주장에 원론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논쟁에 왜 끼어드나

    노 대통령의 참여는 이번 논쟁을 정치권으로 확산하는 변곡점이 됐다. 노 대통령의 논쟁 참여에 대해 정치권에선 비판적인 시각이 많다. 여야를 막론하고 그렇다.

    우상호 의원은 "이번 논쟁이 대한민국이 지난 20년 동안 어디서 와서,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고찰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랬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끼어들면서 이상하게 됐다"고 했다.

    민병두 의원은 "이번 논쟁은 진보 이데올로그들의 논쟁이다. 이데올로그의 논쟁에 직접적 권력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어떤 득이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며 "정치적 의도를 모르겠다"고 했다. ‘민생정치모임’ 소속 최재천 의원은 "대통령은 학자와는 달리 말과 글이 아니라 정책과 법률, 예산을 가지고 정치적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 구체적인 정책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한나라당 박형준 의원은 "대통령은 자기 개인의 생각을 중심으로 말하기보다 국정 지표나 국정 비전을 중심으로 담론을 전개하는 것이 맞다"며 "사인간의 논쟁처럼 되는 구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유승민 의원은 "노 대통령이 (스스로를) 진보라고 하면서 논쟁에 끼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 집무실의 노무현 대통령
     

    오락가락이 유연함인가

    노 대통령이 스스로를 ‘유연한 진보’로 규정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이 많았다.

    민병두 의원은 "그런 식의 자기규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진보에 대한 일종의 컴플렉스가 아닌가 싶다"면서 "노 대통령이 스스로를 개혁주의자로 칭하지 않고 유연한 진보로 규정하는 것은 논쟁의 초점을 분산시키고 개념을 파괴하는 것이다. 논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했다.

    최재천 의원은 "노 대통령이 추진한 정책 가운데 무엇이 진보적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며 "정책 자체가 오락가락한 것을 두고 유연하다고 하는 건 옳지 않다"고 꼬집었다.

    박형준 의원은 "대한민국이 처한 조건에선 아무리 진보적인 사람이 정권을 잡아도 중도 우파적 지형을 벗어나기 힘들다"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객관적 조건의 충돌에서 오는 ‘좌충우돌’을 ‘유연함’으로 포장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진보진영의 활로 찾는 계기로 발전시켜야

    이번 논쟁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은 각별해 보였다. 특히 여권에선 이번 논쟁이 ‘진보개혁’의 진로를 밝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속내가 읽혔다.

    최재천 의원은 "<레디앙>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논쟁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우상호 의원은 "자기정리를 통해 진보진영의 활로를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올 상반기 중 진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 대선 국면에선 못한다"고 했다.

    민병두 의원은 "이 논쟁이 범개혁진보 진영 전반의 논쟁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개혁파 이데올로그도 가세해서 논쟁이 다양화됐으면 좋겠다. 개혁파가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런 걸 정치권에서 하기는 힘들다. 이데올로그의 몫이다. 진보와 개혁의 차별성도 분명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고진화 의원은 "지금은 진보진영이 새로운 시대 정신에 대한 성찰과 함께 국민들에게 대안을 제시해야 할 중요한 시기"라면서 "새로운 시대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국사회의 진보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프레임워크를 제시했으면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지금의 논쟁은 노 대통령에 대한 지적에 머물러 있을 뿐 큰 틀의 프레임워크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박형준 의원은 "진보진영이 단순한 반대에 머무르지 않고 기존의 시스템을 어떻게 고쳐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는다면 (진보와 보수간의) 생산적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