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논쟁에 대통령이 왜 끼어드나"
        2007년 02월 22일 08: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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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장집 교수의 한나라당 집권과 관련된 견해를 어떻게 생각하나.

    = 최장집 교수와 손호철 교수 공히 그런 발언을 하는데, 둘은 발언의 포인트가 조금 다르다. 손 교수는 한나라당이 집권해야 진보세력의 정치적 존재와 의미를 진보대중이 인식할 수 있다는 생각인 것 같다. 최 교수는 민주사회에서 정권교체는 당연한 것이고, 자신은 그런 일반론을 말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정권교체를 도와줘야 한다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진보진영 관념론 못 벗어나"

       
      ▲ 열린우리당 민병두 의원 (사진=민병두 의원 홈페이지)
     

    손 교수와 최 교수의 발언은 다른 맥락에 있지만 나는 결국 두 사람이 같은 얘기를 한 것이라고 본다. 최 교수는 정치적 학자이지 순수한 학자가 아니다.

    한 때 정부에 몸담았던 사람이다. 자신의 발언이 갖는 정치적 파장을 인식하지 못했을 리 없고 설혹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는 보수와 진보와 개혁이 있다. 보수는 자유를 말한다. 시장의 자유, 강자의 자유다. 개혁은 공정성을 말한다. 과정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이다. 좌파는 결과의 평등까지 목표로 한다.

    진보진영은 개혁과 보수를 다 보수라고 규정한다. 이런 규정이 현실의 물적토대를 반영하는 건가? 난 아니라고 본다. 관념론이다.

    또 볼셰비즘 같은 것이다. 열린우리당 같은 쁘띠부르조아 세력을 무력화하고 형해화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조아와 양대 진영을 이룰 수 있다는 관념의 연장이라고 본다.

    민주노동당의 정치인이나 진보적 지식인들이 열린우리당을 주로 공격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다음에, 혹은 그 다음에 자신들이 열린우리당을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난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의 대체제가 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보완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난 열린우리당의 보완재로서 계급정당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의 대체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의 물적 토대를 반영하지 않은 관념론에 불과하다. 최 교수나 손 교수의 주장도 그런 정치적 맥락 속에 있다. 민주노동당이 그동안 주장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오류다.

    "노 대통령이 논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을 ‘유연한 진보’로 규정했다.

    = 그런 식의 자기규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진보에 대한 일종의 컴플렉스가 아닌가 싶다. 지금껏 그런 것이 혼선을 가져왔다. 보수주의, 개혁주의, 진보주의의 3정립 구도가 한국의 정치적 스펙트럼이다. 노 대통령이 스스로를 개혁주의자로 칭하지 않고 유연한 진보로 규정하는 것은 논쟁의 초점을 분산시키고 개념을 파괴하는 것이다. 논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개혁주의는 중도노선과 다른가.

    = 세력에서는 같다. 그러나 중도라는 표현은 혼선을 불러 일으킨다. 중도는 이념과 관계없는 ‘중간’으로 받아들여진다.

    참여정부의 지역균형발전은 과정과 기회의 평등을 진작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정운찬 교수의 지역균형 선발도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그런 면에서 개혁은 보수, 진보와 구분된다. 보수정당은 대학의 완전한 자유를 얘기한다. 지역균형 선발에 대해 경쟁력 있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보진영은 서울대 폐지론을 말한다. 개혁주의는 미국 민주당 정도의 이념적 색채를 갖는다.

    그렇다고 개혁과 진보의 연대가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민주노동당은 개혁진영과의 연대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갖고 있다. 결선투표제는 민주노동당의 당론이다. 그건 개혁정당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터놓는 것 아닌가. 결선투표제를 말하는 정당이 개혁진영을 무력화하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개혁과 진보는 각자 연대와 차별화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결선투표제에 상호 합의한다면 연립정부와 연합공천으로 가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에겐 지역구 진출을 훨씬 위력적으로 달성하는 수단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결선투표제라는 당론은 열린우리당을 무력화하려는 스탠스와 어긋나는 것 아닌가. 결선투표제를 해서 한나라당과 연대하겠다는 생각은 아닐 것 아닌가.

    "노 대통령은 ‘자기성공의 희생자’"

    – 개혁은 지난 대선의 시대정신 아니었나.

    = 그렇다. 노 대통령이 개혁의 화신으로 비춰졌고 그래서 당선됐다. 정치학에는 ‘자기성공의 희생자’라는 개념이 있다. 윈스턴 처칠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 결과로 정치적 존재이유를 상실했다.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부시 대통령도 같은 이유에서 클린턴에 밀려났다. 지금 우리도 비슷한 변곡점에 있다.

    노무현의 개혁은 정치적 개혁이었다. 지금 요구되는 개혁은 주택, 보육, 일자리, 교육, 노후, 의료 같은 사회경제적인 문제들에서의 개혁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인적투자와 공정성을 어떻게 담보하느냐가 우리의 관심사다. 한나라당은 성장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노선의 차이가 향후 20년 우리사회의 정치적 대치선이 될텐데, 여기서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고, 설혹 지더라도 정치적으로 안정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 개혁은 아무래도 지난 시절의 깃발 같은 느낌이 있다.

    = 사람들이 이명박을 왜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보나. 청계천을 뜯어고쳐 개혁했기 때문이다. 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여전하다는 반증이다. 개혁의 내용은 항상 변화하고 있다. 이런 게 이명박 전 시장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

    – 경제정책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차이가 뭔가.

    = 재벌개혁이나 노동의 유연성에 대한 태도에서 우리가 일관성 없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우리의 노선은 생산적 복지 이후 사회투자국가라는 방향으로 점차 정립되고 있다. 한나라당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한나라당은 개발주의 세력이다. 최근 한나라당이 내놓고 있는 대지임대부 분양제, 대학등록금 절반 정책 등은 자기들의 기본적 노선과는 어긋나는 포퓰리즘일 뿐이다.

    지난 20년간 우리 정치는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였다. 그러나 앞으로 20년은 다르다. 농어민, 한계자영업자, 비정규직, 실업자 등 낙오자 없는 세계화를 하겠다는 집단과 신개발주의의 대립이 앞으로 20년간 주요 대치선이 될 것이다. 다른 한 축에서는 평화냐 대결이냐의 문제가 있다. 이들 부문에서 어떻게 담론을 만들어 가느냐가 중요하다.

    "최 교수의 발언은 정략적이거나 무의미"

    – 정권교체 수용론의 근저에는 민주주의의 역진 불가능성에 대한 판단이 있다.

    = 역진성 문제에 앞서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최 교수는 객관적 평론가로서 얘기한 것인가, 정파의 입장에 서 있는 학자의 입장에서 얘기한 것인가. 난 후자로 본다. 평론가로서의 발언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다. 상식적인 것 아니냐.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정파의 이데올로그로서 한 말이라면 거기에는 볼셰비즘적인 어떤 흐름이 있다. 쁘띠부르조아 무용론이라고 하는.

    예를 들어 지금 민주노동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99.99% 없는 게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민주노동당 정치인이 자신의 지지세력에게 ‘우리에겐 집권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정치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론이 뭔가를 강조하고 반복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지지세력을 단결시키는 것이 정치인의 본령이고 의무다.

    최 교수의 발언이 일반적인 평론가로서의 발언이라면 평론의 무의미성에 대해 지적해야 한다. 정파적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라면 거기에 대해 지적하는 게 당연하다.

    다음은 민주주의의 역진성 문제다. 난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 민주주의가 빠른 속도로 역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명박이나 박근혜 같은 사람들에겐 그들이 살아온 고유의 문화나 체질이란 게 있다. 강고한 기득권 지키기, 연고문화에 대한 숭배같은 것이 있다.

    물론 제도를 후퇴시키는 건 어려울 것이다. 검찰, 국정원, 국세청 등 권력기관을 놓아준 것은 제도의 문제라기보다 문화의 문제다. 이런 문화의 영역에서 민주주의가 퇴보할 가능성이 크다. 시위 문화에 대한 관용의 차이도 클 것으로 본다. 지금의 경찰은 중도중립적인 ‘폴리스맨’ 역할을 하려고 하지만 한나라당은 정치적 폴리스맨 역할을 강요할 수도 있다고 본다.

    "진보 논쟁은 이데올로그들의 논쟁, 대통령이 왜 끼어드나"

    –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논쟁에 뛰어들었다.

    = 정치적 의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최 교수의 발언 같은 것이 불쾌할 수는 있다. 또 개혁적 지식인이 그런 발언에 대해 침묵하는 게 더더욱 불쾌할 수 있다. 개헌문제만 봐도 그렇다. 다들 개헌해야 한다고 하다가 대통령이 제안하니까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됐다. 이런 게 불쾌할 수 있다. 정권을 희롱하는 사람들의 논거와 그런 상황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개혁적 지식인에 대해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지적들은 지식사회에서의 자연스런 유통과 생산을 통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왜 개혁적 지식인들이 침묵하는가에 대한 자기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최근 진보진영의 논쟁이 순수한 학문적 논쟁은 아니다. 이데올로그들의 논쟁이다. 이데올로그의 논쟁에 직접적 권력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어떤 득이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개혁파 이데올로그도 가세해 논쟁 다양화됐으면"

    – 노 대통령은 왜 그렇게 진보라는 자기 규정에 집착할까.

    = 잘 모르겠다. 우리당 일부 의원들 가운데도 진보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탈당한 분들 가운데도 진보라고 하는 레떼르에 집착하는 분이 있다.

    노 대통령은 우등생 진보주의자에 대해 불쾌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난 개혁이다, 진보는 낡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낫지 ‘난 유연한 진보다’ 이렇게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 조희연 교수는 "최근의 논쟁을 거치면서 진보 혹은 민주세력이 패배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논쟁에 대한 평가와 생산적 논쟁을 위한 제안을 한다면.

    = 지금의 논쟁은 진보적 이데올로그들의 논쟁이다. 이 논쟁이 범개혁진보 진영 전반의 논쟁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개혁파 이데올로그도 가세해서 논쟁이 다양화됐으면 좋겠다. 개혁파가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런 걸 정치권에서 하기는 힘들다. 이데올로그의 몫이다. 이런 계기를 통해 진보와 개혁의 차별성도 분명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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