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맞은 '농한기'의 단상
    [낭만파 농부] '농부'의 삶 선택 이유
        2022년 11월 28일 10: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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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락” “바스락”

    뒷산 오솔길에 쌓인 낙엽을 사뿐사뿐 밟으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 쌓인 지 얼마 안 되는 데다 바싹 마른 넓은잎인 까닭에 울림이 더 크다.

    빗줄기에 아침이슬에 눅고 미생물들이 갉고 나면 시나브로 사라질 소리. 누런 솔가리가 두껍게 깔린 구간을 지나노라면 그 낙엽 밟는 소리는 이내 잦아든다. 알록달록 산자락을 수놓았던 단풍이 나풀나풀 떨어져 쌓인 융단은 그야말로 가을의 끝자락이겠다.

    바스락거리는 가을의 끝자락

    가을이 가고 나면 겨울이지만 나한테는 겨울보다 ‘농한기’가 더 입에 짝짝 달라붙는다. 늘 해온 얘기지만 농한기를 기다리는 맛에 농사를 짓는지도 모르겠다. 뒤집어 말하자면 농사일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이유로 매달린다는 소리 아닌가. 농하기가 되어서야 정작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는.

    하긴 전통 농경사회에서도 사정은 비슷했을 터다. 다만 그 시절에는 농사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고, 태어난 목숨 부지하자면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농공상… 신분제 사회였으니 극히 일부는 물려받은 또 다른 생업에 몸담았을 테고. 그런데 산업사회로 접어들어 농사가 거꾸로 ‘극히 일부’가 종사하는 생업이 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그저 밥을 벌어 먹고살자면 농사 아닌 일이 천지에 널려 있고, 취업은 그편이 훨씬 수월한 시절이다. 하여 “농사짓고 산다”고 하면 으레 “왜 (굳이) 농사를 짓느냐”는 물음이 뒤따르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농사로 잔뼈가 굵은 늙은 농부한테는 상관없는 질문이다. 젊은 나이에 농사를 짓거나 나처럼 ‘귀농’이라는 이름으로 ‘인생 2막’을 연 경우에나 해당된다.

    돌아보면 농사를 지어온 지 10년이 훌쩍 넘었으니 그 물음이 새삼스러울 만큼 세월이 흐른 셈이다. 도시를 탈출하듯 무작정 내려와서는 ‘얼떨결에’ 벼농사만 지어왔더랬다. “왜 귀농했느냐?” “하필 벼농사냐?”는 물음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정답’은 준비돼 있었다.

    기후변화로 인류의 생존이 위기에 닥친 상황에서 자연생태 보전이 이 시대의 핵심과제이고, 이에 부응하자면 농사 만한 게 어디 있는가. 게다가 농약과 비료를 비롯한 일체의 화학요법을 배제하는 유기농법으로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린다. 나아가 벼농사는 곡물자급률이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에서 식량주권을 지키는 보루라 할 수 있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지당한 말씀이고 여전히 기특한 명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뭔가 공허함을 지울 수가 없다. 정작 농사짓는 사람의 삶은 빠져 있지 않는가 이 말이다.

    하긴 인생살이 처음부터 그랬다. 언어학자로 살아가겠노라 꿈을 안고 대학문을 들어섰더랬다. 하지만 군부독재의 폭압통치로 사회현실은 엄혹했고, 이를 외면할 수 없어 학자의 삶을 포기하고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기층민중’이 주체가 되는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용접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밥벌이를 위해 선택한 길이 아니었다. 노동운동에 뛰어들자면 우선은 노동자의 일원이 되어야 했고 용접 일은 이를 위한 수단이었다. 당시 지배세력은 이런 경우에 ‘위장취업’이라는 불온한 딱지를 붙였었다. 가당치 않은 처사였지만 어찌 보면 일말의 진실은 담고 있었다. 어쨌거나 나의 반평생 노동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던 것이다.

    그리고 귀농, 인생 2막은 농부의 길. 앞서 길게 늘어놓았던 명분을 되짚어 보면 이 농사 또한 밥벌이가 핵심목표가 아닌 셈이 된다. 역시 ‘위장취업’이었다고 할까. 젊은 시절처럼 몸을 던져 싸우는 활동가는 아니지만 나름 생태주의자로 살아가는 현장으로 시골을 선택한 셈이다. 물론 ‘나름’일 뿐이고 생태가치를 지키기 위해 애쓴 일은 보잘 게 없다.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뒷산에서 바라본 앞산

    농한기만이라도 더 큰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그저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생태 현안을 푸는 데 할 수 있는 노릇을 다 할 뿐이다.

    다시 찾아온 농한기. 농부라는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내는 때. 그 본색으로 ‘생태주의자’를 들먹이기엔 몹시 겸연쩍은 형편이고. 그렇다면 이 겨울 산문을 닫아걸고 ‘동안거’에 들어가는 구도자나 되어볼까?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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