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보수, 뒤집어져야 합니다
        2007년 02월 21일 11: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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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이 글을 쓰는 건 좋은 일입니다. 좋은 글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죠.

    대통령께서는 본인과 현 정부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유연한 진보’라 말씀하십니다. 참 독특한 생각이십니다. ‘개혁정부’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는데, 그게 보수를 개혁하려는 게 아니라 진보를 개혁하는 것이었다니, 금시초문입니다. 우리 사회를 진보가 지배하고 있었던가요?

    대통령께서는 취임사에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 투자하고 싶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에 대해서는 “장사 원리에 따라 소신 있게 반대”하기도 하셨습니다. 보통들은 이런 걸 신자유주의라 일컫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열린우리당 신기남 전 의장께서는 “열린우리당은 중도적 입장에서 실용적 개혁주의를 추구”한다고 말씀하셨고, 열린우리당 부대표를 지내셨던 김성호 전 의원께서는 며칠 전에 “좌파 신자유주의는 철저한 우파 신자유주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하는 겁니까?

       
    ▲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3년 5월 14일 오후 6시부터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청와대 사진기자단)
     

    노 대통령 본인조차 대연정을 추진하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정책 차이가 거의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한나라당도 진보란 말입니까? 노 대통령께서 박근혜 전 대표와 대연정을 추진한 사연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유연’과 ‘중도’의 진보 대연정이었군요. 그 많던 보수는 어디에 다 팔아먹었습니까? 홀로 남은 민주노동당이 보수를 지키는 도리밖에 없겠습니다.

    대통령께서는 복지비를 많이 늘렸다고 자평하십니다. 더욱 힘써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중앙 정부 재정에서는 20%에서 28%로, 지방 재정에서는 31%에서 36%로 늘었다는 걸, 꽤 힘썼다는 증거로 들이대면 곤란합니다.

    중앙 재정에서 복지비가 늘어난 건, 예전에는 복지비가 아니었던 사회간접자본 주택 부문, 청소년 부문, 사회복지부처 인건비와 사업비 같은 걸 복지비에 포함시켜 계산한 결과 아닙니까. 지방 재정 복지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지비에 쓰이던 양여금과 국고보조금을 폐지하면서 그 일부가 지방 재정 복지비로 전환된 것입니다. 이는 숫자놀음에 불과합니다.

    대통령께서는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자평하십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한솥밥을 먹던 김성호 전 의원께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 자체를 흔들고 있다”고 혹평하십니다. 저는 대통령님의 판단이 옳지 싶다가도, 아래와 같은 비판 때문에 못내 걱정됩니다.

    “노무현 정부의 집회시위 자유에 대한 공격은 2004년 집시법 개악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2006년에는 국무총리실 산하에 ‘평화시위문화정착을위한민관공동위원회’를 구성해 시위 형태를 집중적으로 문제 삼으면서 집회시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제도와 정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 인권단체연석회의 손상열

    대통령께서는 진보가 유연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한미FTA 문제를 거론하셨습니다. ‘책임’과 ‘미래’도 자주 강조하십니다. 미국의 울타리에서 하루 아침에 벗어나기 어렵다는 대통령님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유연해져야 한다는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하지만, 주한미군과 한미FTA에 반대하는 게 유연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키르키즈탄 정부와 의회는 미군 철수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구 400만의 작은 나라에서 말입니다. 일본 외무성은 미국보다는 아시아 각국과의 FTA를 우선 추진하고 있습니다. 미국 의회에서 누군가 한 마디 하면, 총리가 미제 차를 타고 출근하는 일본에서 말입니다. 일본이나 키르키즈가 ‘유연하지 않은 진보’라서 그리 하는 건 아닐 듯 싶습니다.

    한미FTA와 미군 문제 등은 1~2년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미래 수십 년을 좌우할 의제입니다. 국제 정치 경제 상황의 변화를 냉정히 관찰하면서 장기 포석을 두어야 하겠지요. 수십 년 후에는 경제력에서든 군사외교력에서든 미국 일방주의가 무너지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입니다. 그렇다면 ‘책임’ 있고 ‘미래’를 보는 국정운영자는 그런 변화에 발맞추어 다자간 경제협력과 등거리 외교를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대통령께서는 미국 문제에 대해서만은 유독 ‘현실’이니 ‘부정할 수 없다’느니 하는 말씀을 되풀이하시면서 미국 일방주의를 옹호하실 뿐입니다. 이 문제가 아니고 다른 어디에서 “장기적인 전략으로 ……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각오”하시겠는지요.

    대통령님께서는 교조적 진보를 비판하십니다. 외채 때문에 망한다고 했는데, 망하지 않지 않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외채 때문에 망했지, 왜 안 망했습니까?

    1997년의 위기가 외자를 상환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 아닙니까? 지금에 와서 외채 부담이 적다고는 하지만, 1970년대와 80년대의 외채는 외국인 직접투자 등으로 모양만 바뀌어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국민경제의 대외 종속성은 그 형태만을 달리 하여 더욱 강화되었고, 외자가 철수하면 또 망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님과 그 전임자들이 만들어 놓은 대한민국 경제가 이렇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진보운동의 여러 이론을 잘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 공부하셨다는 진보이론들은 대개 학생운동이나 민족 문제를 주로 다루는 재야운동에서 이야기되던 것입니다. 그래서 진보운동이 폐쇄 경제를 지향한다고 오해하시는 듯 합니다. 그래서 노동유연성이 진보라 믿으시는 모양입니다.

    대부분의 나라, 대부분의 역사에서 노동운동은 개방을 지향하고, 한국의 진보운동 역시 노동운동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다만, 지금 하는 FTA가 옳지 않다고 판단해 반대하는 것입니다. 대통령께서 언급하신 유럽에서도 정부의 개방 정책을, 노동유연화와 복지 약화라 걱정한 국민이 국민투표로 부결시킨 예가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아시는 ‘진보’로 진보를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대통령님 말씀대로 “구체적인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따져”야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사회양극화가 전임 정부에서 빚어진 일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 발생 원인이야 전임 정부에 있습니다. 빨리 벗어나기 어려운 점도 적지 않으리라 이해됩니다. 그래서인지 청와대에 계셨던 조기숙 교수께서는 “이회창 후보가 집권했으면 이보다 더 잘했”겠냐고 변명하시기까지 합니다. 한 명의 유권자로서 너무 어이 없습니다. 그럴 거면 왜 대통령 하겠다 그 난리였단 말입니까. 대통령님 말씀도, 조 교수 말씀도 정치하는 사람 예의가 아닙니다. 더 비굴해지지 말아 주십시오.

    소득과 소비, 교육과 부동산에서 사회양극화를 보여주는 지표들은 김대중 정부 후기 때보다 이 정부 들어 훨씬 악화되었습니다. 경제 실적과 복지 급여를 두루 살필 수 있는 도시근로자 실질가처분소득 증감률은 김대중 정부 때 5%였다, 이 정부 들어서는 1%로 주저 앉았습니다. 이는 양극화가 과거로부터 유래하기도 하지만, 대통령님이 펴시는 정책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학자는 말하는 사람이고, 집권한 정치인은 실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대통령님의 관점이 매우 언짢습니다. 이번 논쟁에 낀 교수님들을 알 리야 만무한 제 어머니 같은 분들에게 ‘노 대통령은 실천가’라는 말씀을 전해드리면 뭐라 하시겠습니까? 말하는 사람과 실천하는 사람을 나누는 것은 대화를 원천봉쇄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이면 대통령 아닌 국민들은 말도 못하게 됩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려운 처지의 저와 참여정부를 흔들고 깎아내리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니요. 자신이 대통령이 된 것이 어떤 학자 또는 국민들에게 지지의 의무를 지우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것이 대통령님께서 열심히 공부하셨다는 유신헌법식 상대주의 철학이 아니길 바랍니다.

    저는, 대통령님과 그 지지자 분들의 억울한 심경을 풀어드릴 방법을 도통 찾지 못하겠습니다. 유물론자인 제가 한풀이 굿 같은 걸 권하기도 꺼려집니다. 스스로 한 일, 스스로 자초한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고 치워야 합니다. 언론 탓하고, 야당 탓하고, 무식한 국민 탓하고, 섭섭한 진보 탓할 일이 아닙니다.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까지 탓하실 셈입니까?

    대통령께서 말씀하시는 ‘진보’ 외의 다른 진보에서도 이번 정부에 적지 않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저 역시 내심으로는 대한민국 보수가 낳을 수 있는 최전선이라 생각했습니다. 결과는 참혹합니다.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진보는 달라져야 하고, 보수는 뒤집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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