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독특함, 그 역사와 함의
    [기고] 공동체-연대-이중성의 미래
        2022년 11월 18일 01: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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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아메리카는 알다시피 16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정복되고 식민지가 되었다. 당시에는 그냥 “신세계”로 불리었다. 또는 “새로운 인도”로 불렸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문자 그대로 부를 빼앗겼다. 특히 금 은 구리 등의 광산물, 그리고 나중에는 농산물이 원주민의 무료 노동에 의해 개발되어 배에 실려 유럽으로 향했다. 유럽으로서는 노다지가 난 것이다. 이를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시초 축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도 원주민을 유럽인이 마구잡이로 착취, 억압하는 식민주의, 인종주의의 인식에 대해서 별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럽인들에게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돌이나 나무, 또는 동물 같은 자연일 뿐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혼종성

    그러다가 17세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 문화적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력이 쇠약해진 스페인으로부터 상당한 정도로 경제가 독립하였고 정치적으로도 지배체계가 느슨해졌다. 다른 하나는 사회의 주류계급인 백인후손(크리오요) 중에서 출세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원주민계와 아프리카계의 혼혈주민들과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독특한 라틴아메리카만의 정체성을 만들게 되었다. 이를 전문 학자들은 사회문화적 ”혼종성”으로 부른다. 기계적인 인종의 구별을 넘어선 연대의 정체성이다. 이때부터 라틴아메리카만의 독특한 동네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원래부터 즉 식민시대 이전부터 있던 원주민 문화에서 기원하는 동네 공동체가 다시 17세기에 유럽인 후손들과 섞이면서 더욱 강화된 것이다. 다시 말해 유럽도 아니고 원주민 문화도 아니고 독특한 문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혼종성‘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럽문화를 거부하면서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고 자신도 모르게 유럽과 다른 문화적 원천을 믿으면서 새로운 제3의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묘한 자신감 같은 것이 있었다. 또는 가난하면서도 자신과 다른 지배적인 인종 앞에서도 묘하게 당당한 모습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예를 들어, 브라질의 ”카포에이라“와 같은 무술인지 춤인지 아리송한 성격의 운동을 보면 아프리카계 혼혈인 후손들의 아주 당당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웬만해서 쉽게 주눅 들지 않는다.

    이런 대중의 특성이 오늘날 21세기에도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 같다. 유럽(선진국)보다 단순히 못살고 뒤져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유럽보다 앞질러 갈 수 있다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위계서열에 순종적인 유교문화의 우리들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므로 21세기에 이르러 그 수명이 다해 보이는 전 세계로 퍼진 유럽적 삶의 방식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독립 이후 흐름의 특징

    라틴아메리카는 19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그럼에도 곧바로 라틴아메리카라는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독립을 추진한 주체가 피식민의 일반 대중이 아니라 엘리트 백인 후손(크리오요)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배계급이면서도 비주류였다. 그러므로 스페인보다는 프랑스를 선호했다. 따라서 식민세력/ 독립운동세력으로 단순하게 식민지를 이분법화하거나 칼로 무 자르듯이 단순히 민족주의적 저항만으로 이 당시의 라틴아메리카를 바라볼 수 없다. 이런 독특한 성격 때문에 아시아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20세기 초 중반에 독립을 쟁취한 흐름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러면서도 유럽에 대항하는 소위 제3세계의 비동맹 전선 구축에서는 항상 앞줄에 있기도 하다.

    또 다른 하나는 18세기 유럽에서 거세게 분 사회적 ‘해방’의 기운이 계몽주의를 통해 라틴아메리카까지 불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스페인이 차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립을 주도한 프랑스의 진보적(자유적) 흐름을 부러워한 크리오요 세력이 19세기 중반 내내 보수세력과 격렬한 내전을 치른다. 여기서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것은 독립을 거부하고 식민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고 과거 사회, 문화적으로 막강했던 가톨릭교회의 위상을 계속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내전에서 자유파가 승리하여 라틴아메리카의 주류 지배세력이 되면서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라틴아메리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이점에서도 우리 사회와 다르다. 우리의 경우는 1970-80년대에 자유주의 세력이 독재 정권과 투쟁을 했다. 결코 주류가 아니었고 저항세력이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정권을 잡으며 주류가 된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에 신자유주의에 순응하면서 보수세력과 이들 세력 사이의 실질적으로 정체성의 차이가 없어진다. 다만 레토릭의 차이는 크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경우에는 우리의 역사적 궤적과 다른 길을 걷는다. 19세기 후반에 백인 후손과 메스티소가 주류세력이 되면서 과거 17세기의 인종 구분을 넘어 사회적 연대가 강했던 그 정체성이 아니라 과거 동네의 친구였던 원주민계, 아프리카계 후손들의 대중을 무시하고 배제해버렸다. 이런 ‘배신’은 자유주의 세력이 사회적 해방과 사회정의를 추구하면서도 유럽과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의 핵심과제는 사회정의를 위한 저항과 투쟁이었는데 바로 이때부터 사회적 배제에 대해 투쟁하고 저항한 것이다. 특히 1960년대가 절정이었다. 이런 역사적 문화적 독특함을 잘 모르면 라틴아메리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수의 진보 학자들이 20세기 전반부의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의 민족해방 투쟁 등의 저항, 민주주의 등의 개념만을 가진 채 라틴아메리카 대중을 만나면 당혹하게 된다. 그들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에 가슴 아파하는지를 오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아무튼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이들 많은 수의 대중을 무시하고 제대로 된 근대국가 건설을 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그 문제는 쉽게 풀 수 없었다. 오직 배제당한 가난한 이들의 강한 저항만을 불러오게 되었다. 이것이 1960년대까지 ‘약 백년간’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 정치, 경제적 갈등과 내전 또는 학살이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벌어진 사회 심리적 배경이다. 그러나 19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사회의 맨 밑바닥에 있던 가난한 대중이 중요한 정치, 경제, 사회적 발언을 하기 시작하게 되면서 라틴아메리카 대중은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그 이유는 인종적으로 그들보다 위에 있던 백인 후손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들 대중과 쉽게 연대하였기 때문이다. 17세기에 형성된 공생적 연대의 DNA가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이 연대를 자극한 것은 새로운 체제로 등장한 신자유주의 때문이었다.

    과거 1960-70년대에는 라틴아메리카의 좌파들은 경제 사회적 불평등을 계급적 문제로만 오해하고 적극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계급투쟁을 벌였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왜냐하면 중간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의 연대가 계급적이라기보다는 인종을 가로지르는 연대인 줄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1980-90년대의 신자유주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배제하고 극소수 기득권계급만 유리하게 만들므로 과거 이들에게 남아있던 무의식적 연대가 강하게 되살아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 시기의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의 특징적 성격이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의 특징들

    첫째,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독특함은 지배계급 또는 기득권에 대해 정면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틈을 보아 이것이 약해질 때 투쟁하는 전략적 사고를 잘하는 기질이 있다. 왜냐하면 16세기에 정복이 시작되면서 정면으로 저항하면 오직 죽음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7세기에 메스티소 인구가 팽창하고 본국 스페인의 지배가 느슨해지면서 예를 들어, 16세기의 착취적인 귀금속 채굴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약화되고 농업 및 공업생산이 확장되고 아메리카 대륙 역내 교역이 확대되었다. 이로써 문화적으로도 라틴아메리카인들은 유럽문화와 갈수록 단절되어갔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지배문화인 유럽문화가 원주민문화를 복속시키고 양자의 접촉을 통해 유럽문화가 주류문화가 되는 방식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이런 흐름은 현대에 와서도 계속되어 평범한 대중은 자본주의에 대해 순간적 즉흥성으로 자신들만의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즉 상류층이 아니라서 A급으로 즐길 수는 없지만 B급 혹은 C급으로 나름대로 즐긴다.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대중은 부자들처럼 고급 디스코텍은 못가도 시내에 그들 수준에 맞는 가격이 저렴한 디스코텍이 얼마든지 있다. 이런 이들의 일상문화의 의미는 일과 여가 사이에서 항상 전자를 우선시하는 금욕적 자본주의 경제 논리에 대해 공동체적 축제적 즐김이 허용되고 병행되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중세 스페인이 교회를 중심으로 동네 구성원들이 자주 공동체적 축제를 즐겼던 맥락을 연상시킨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현실에만 철저하게 동일시하고 순응함으로써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노력하고 대안적 즐기기는 불가능하다고 믿는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대중은 이와 달리, 자본주의적 논리에 완전히 순응하지 않고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이익의 극대화로 인한 인간적 존재의 삶의 질이 희생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물론 최근에 와서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위에서 언급한 현실적 기질과는 조금 다른 소박하게라도 삶의 쾌락을 즐기는 소위 ‘소확행’의 ‘워라벨’이 늘어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둘째, 대중의 독특함은 공동체적이라는 점이다. 이 글에서 자세한 얘기를 할 수는 없지만 서구 근대성과 자본주의가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더욱 그렇다. 이에 비해 스페인의 가톨릭적 근대성과 자본주의는 그 성향이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모습을 우리는 17세기에 예수회가 파라과이의 과라니 원주민들과 함께 구성한 선교공동체 실험을 보면서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당시 이 지역의 정치, 경제적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던 자본주의 체제와 포르투갈 노예사냥꾼들의 공격에 의해 이 실험은 예수회가 강제로 추방되면서 실패로 끝난다.

    한편 라틴아메리카의 공동체 문화는 볼리비아와 같은 안데스 국가들의 경우, 식민시기 이전부터 시작되어 현재에까지도 강한 현실성을 가지며 “코무나”(comuna)로 불린다. 베네수엘라의 경우도 그렇다. 멕시코의 경우는 에히도(ejido)로 불린다. 그리고 구성원들은 “코무네로”(comunero)로 불린다. 볼리비아 등의 안데스 국가들의 공동체 운동이 현재도 이렇게 강한 것은 식민시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아이유(Ayllu) 공동체의 힘 때문이다. 이 공동체의 공동적 생산관계 시스템 자체는 밍가(minga)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이렇게 잉카제국 이전부터 국가가 주민들에게 요구하는 시스템 자체가 밍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지역의 생업은 농업이다. 그런데 농업생산을 주인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공동으로 돕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경우의 “두레”의 경작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예를 들어, 모내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근대성과 자본주의에 의해 위축되어 ‘잠재화’되어 있는 것 같다. 최근에 여성들과 청년들에 의해 다시금 활력을 찾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공동체적으로 서로 돕는 시스템에 대해 기브 앤드 테이크에 익숙한 서구의 학자들 중 일부는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농지의 주인은 공동 노동을 한 사람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식사와 음료를 대접한다. 대접하는 분위기는 음악과 함께 축제적이다. 이렇게 ‘선물’로서 대접하는 관습은 분명히 비자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이런 전통이 최근에 와서 현금지급으로 바뀌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가족의 단위를 넘어 마을 공동체 구성원이 자율적으로 순환적으로 서로 돕는 매우 중요한 사회 문화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저들의 밍가는 훨씬 더 국가에 의해 제도적으로 강하게 존속되어온 것 같다. 현재 페루, 콜롬비아, 볼리비아, 칠레,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주민의 연대적, 자율적 공동성의 조직으로 강하게 실천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전통적 공동성-연대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1980년대에 페루, 칠레 등에서 가난한 주민들을 위한 “연대적 활동”도 쉽게 구체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의 동력 구실을 한 것 같다.

    또한 아이유 공동체 구성원들이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공동노동 자체를 미타(mita)라고 한다. 예를 들어, 16세기에 원주민들이 광산에서 공동노동 또는 집단노동을 제공한 것은 스페인이 바로 이 제도를 악용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데스 지역은 현재의 국경 분리를 넘어서서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북부 등까지 매우 광범한 지역을 포괄한다. 이 지역이야말로 라틴아메리카의 라틴아메리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유럽의 경우에, 코뮌주의(communism)는 독일(프러시아)과의 혼란한 내전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불과 몇 개월만 존속했던 19세기의 “파리코뮌”을 제외하고 현실적 구체성이 떨어진다. 현재에도 지식인들 위주의 관념적 담론에 그치고 있다. 그 이유는 공동체성을 거부하는 근대성과 자본주의의 힘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련에 의한 공산주의로 불리는 20세기의 역사적 실패도 있었다. 이런 맥락과 달리 1990년대의 유럽 중간계급 시민들에 의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각자도생 문화를 극복하려는 커먼스(commons) 공동체 운동은 현실성이 강하다. 특히 스페인의 다양한 실험에 주목하게 된다.

    이런 언급을 하다보면 우리나라(한국)도 공동체적이라는 얘기를 사람들이 많이 한다. 맞다. 그러나 속살을 들여다보면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공동체 그룹 안의 약자에 대한 공감이 더 강한 것 같다. 그 이유는 안데스 지역의 잉카제국의 경우, 공동생산, 공동소유, 공동분배의 문화의 틀 안에서 일부 토지의 수확물을 공동체의 노인, 병자, 예술가를 위해 부양한 경험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와 비슷한 지적을 하는 학자가 있다. [깊은 멕시코(Mexico Profundo)]를 쓴 기예르모 본필 바타야(Guillermo Bonfil Batalla)이다. 이 학자는 멕시코의 인류학자로 원주민 문제의 전문가다. 그에 의하면 원주민 문화에서 유래하는 공동체성은 평소에는 잠복해 있다가 어떤 맥락에서 수면 위로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약 500년 동안 지배 권력에 의해 아주 심한 억압을 받아 멕시코 원주민 문화는 처참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근대국가 건설시기인 20세기 초반, 지배계급이 멕시코의 정체성을 메스티소에 두고 “원주민의 비원주민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지역의 작은 공동체들에는 아직도 ”깊은 문화“가 살아남았다. 과거 잉카문명이 존재했던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은 원주민의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는데 특히 볼리비아의 경우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

    공동체성에 대한 이런 지적은 필자도 멕시코에 살면서 개인적으로 체험한 바 있다. 평소에는 멕시코 노동자들이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개인주의적이고 자기밖에 모르지만 자기가 속한 그룹의 어느 약자가 갑자기 불행한 일을 당하면 매우 연대적이고 거의 희생적으로 도와주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우리도 그렇기는 하지만 평소에 우리보다 더 개별적인 행동을 잘 하는 모습과 정반대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그런 인상이 더 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우리와 다른 것은 일본은 20세기 파시즘 국가로서 미셀 푸코가 말했듯이 어렸을 때 학교 선생으로부터 개인위생을 명분으로 신체에 대한 규율을 통해 일본 식민 권력의 철저한 통제를 강화했다면 반면에 라틴아메리카에 대해서 스페인은 16세기 중상주의 국가로서 유목적 떠돌이인 원주민을 정착시킨 뒤에 가톨릭 선교를 위해 선교사들로 하여금 집단위생을 통한 사회적 규율을 강화한 것도 식민권력의 행사 방식에서 커다란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파라과이의 예수회 선교공동체는 소규모 공동체를 독립적으로 유지함으로써 아마 우리보다 훨씬 더 원주민의 자율적 저항이 가능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셋째,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독특함의 하나로 동네(barrio)의 중요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동네는 어디든지 있는 기계적인 동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 특유의 인간적이고 끈끈한 그들만의 연대 공동체를 말한다. 이렇게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동네를 지키려는 자율적 힘이 강하여 동네의 “영토성”이란 개념까지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의 경우, 1990년대 이후 도시의 재개발, 재건축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가 일반 시민들의 시야에서 밀려난 것 같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반지하, 옥탑방, 원룸 등으로 흩어져 버린 것이 도시 빈민의 집단적 저항을 무화시킨 원인인지도 모른다. 라틴아메리카의 동네의 활동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동네 총회에 있다. 중요한 집단적 의사결정을 다수결이 아니라 동네 구성원의 전체 합의 즉 만장일치를 통하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아마도 어느 누구도 집단적 의사표현에서 ‘배제’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 같다.

    넷째, 이런 동네를 통한 공동체적 연대성의 강화는 구어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왜냐하면 20세기 전반기까지 라틴아메리카의 대중은 문맹률이 매우 높았다. 이를 근대화의 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집단적 공동체적 연대성의 강함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대중이 동네를 기타 하나 메고 떠돌아다니던 음유시인을 사랑한 것도 이런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의 메르세데스 소사, 칠레의 빅토르 하라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구어문화를 탄압하던 군부독재에 대해 맹렬하게 저항했다. 그리하여 아직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이런 문화덕분인지 우리나라에서는 벌써 사라진 서커스 등이 큰 대중적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원주민들의 구어문화가 자손대대로 이어지면서 약 500년의 근대성과 자본주의에 저항한 원동력이 된 것 같다.

    다섯째, 잉카 국가는 모든 남자들에게 공동노동의 대가로 여성(신부)을 제공했다. 원주민 문명의 최대 약점이 아마 여성을 이렇게 토지, 가축과 같은 점유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여성에 대한 소위 반페미니즘의 문화적 전통이 원주민 문명의 약점인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여성해방의 중요한 거점으로 변한 것 같다. 왜냐하면 반 신자유주의 사회운동의 주체가 대부분의 국가에서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섯째로 라틴아메리카의 대중이 위에서 열거한 대로 역사를 견인하는 진보적 또는 긍정적 성격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소위 ‘거지근성’으로 불리는 바대로 무조건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로부터 선물 받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가진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대중의 이런 성향을 마케팅에 이용하는 것도 현지에 진출하는 기업들의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위에서 언급한 약자를 특히 배려하는 공동체적 기질을 중시해야 함은 물론이다.

    마지막으로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성향을 진보/보수의 기존의 이분법으로 재단하기 쉽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기득권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이중적으로 애매하고 전략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농촌과 도시의 기층대중의 일상적 삶 안에 녹아있는 그들의 상상력에 접근하려는 우리의 태도인 것 같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실현가능한’ 유토피아를 중시하여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되 현재의 구조와 다른 공동체적 연대를 용인하는 자본주의를 원하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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