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연한 진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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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21일 08: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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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최근 노무현 정권의 성격과 진보의 위기를 둘러싼 최장집, 손호철, 조희연 등의 논쟁에 대한 경제학자 정태인의 견해와, 노무현 대통령이 발표한 ‘대한민국, 진보는 달라져야합니다’에 대한 그의 비판적 논평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노대통령이 말하는 ‘유연한 진보’는 존재하지 않으며, 연대의 대상은 더더욱 아니라고 얘기하고 있다.

    필자는 또 ‘교조적 진보’보다 ‘교조적 시장주의’가 더 큰 문제라며, 노대통령 집권 초기 스티글리츠 세계은행 부총재를 해외경제자문단장으로 초빙하려다, 월스트리트의 눈치를 보면서 초빙을 무산시킨 이들의 횡포를 폭로했다.

    전국을 돌면서 한미 FTA 관련 200여 차례의 강의를 ‘운동’처럼 하고 다닌 필자는 대통령에게 다시 한번 ‘절규’처럼 외친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합니다”라고. 그리고 그 결단은 “한미 FTA 협상을 당장 중단하고 양극화 극복 정책에 전념하는 것”이라고. 필자의 글을 두 차례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중도란 말이 유행이다. 누가 봐도 한 쪽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 중도를 외친다. 마치 이념이 없는 것이, 따라서 철학도 정책기조도 없는 것이 자랑이라는 듯 실용주의를 내세운다. 심지어 이른바 진보진영 일각에서도 ‘모든 진보는 중도’라는 해괴한 테제(?)를 별 논리적, 역사적 근거도 없이 슬그머니 들이민다.

    중도는 없다

       
     ▲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 (사진=인물과 사상)
     

    정치인 뿐 아니라 지식인이 현재의 정치지형에서 중도를 표방하는 건 단순 논리로 이해가 된다. 이른바 ‘호텔링’의 가게세우기 논리가 그것이다. 하나의 거리에 가게를 내려는 사람이 둘 있다. 이 거리에는 모든 집이 같은 간격으로 서 있고 두 가게의 상품은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사람들은 가까운 가게를 이용한다. 그렇다면 어느 위치에 가게를 세우는 것이 가장 이익이 클 것인가가 문제이다. 답은 한 가운데 나란히 세우는 것이다.

    선거에서도 마찬가지로 좌, 우로 선명한 정책을 내세우기보다 가운데쯤 되는 정책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얘기다. 이른바 ‘중도통합’에 목매는 열린우리당의 행태는 이 논리로 그대로 설명된다.

    그래서 주목되는 건 오히려 중도를 표방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이다. 최장집, 조희연, 손호철, 이병천 교수가 인터넷과 신문 지면을 오가며 흥미로운 논쟁을 벌이고 있다. 네 교수의 현실 인식에는 큰 차이가 없는데 뭔가 결론이 확연하게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정치에 무지할 뿐 아니라 무관심하기까지 한 나에게 최장집 교수나 손호철 교수의 ‘한나라당 집권론’은 그저 통렬한 반어법으로 들린다. 실제의 차이가 있다면 ‘반한나라당 연합전선’의 현실성에 관한 인식 정도이다.

    굳이 집어 말하면 정대화 교수 등의 미래구상에 대한 의구심이라고나 할까? 미래구상이 어찌 나갈지 내 알 수 없지만, 내 믿기로 최, 손 두 교수가 원칙 있는 연대, 예컨대 손 교수의 경우 ‘반신자유주의 연대’에 반대할 리 없다.

    그렇다면 ‘연대의 원칙’이 무엇이어야 하는가가 앞으로의 핵심 주제이다. 경제 쪽에서 연대의 원칙은 한미 FTA에 대한 찬반 여부와,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분배정책에 대한 찬반 여부로 최소화하여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연대의 원칙

    진보진영은 한미 FTA에 반대하고 재분배정책에 찬성해야 정상이다. 보수진영이라면 당연히 한미 FTA에 찬성하고 재분배정책에 반대한다. 민주노동당이 전자의 대표이고 후자는 한나라당이다. 핵분열 중인 열린우리당으로 얘기한다면 천정배 의원 그룹이 전자에 가깝고 김한길-강봉균 그룹은 지금 한나라당에 입당해도 전혀 욕할 사람이 없다.

    이제 남은 사람들이 말하자면 진정한 중도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거기에 현재의 열린우리당이 있다. 문제는 전자에 대해서 대통령이 직접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는 데서 폭발력을 가지게 됐는데 이 부분은 뒤에 언급하겠다.

    이 둘 사이에 중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뭔가 있다면 그건 중도가 아니라 잡탕이다. 모든 사회경제시스템의 요소 제도들 간에는 보완성이 있어야 하는데 잡탕의 경제학은 친화성 없는 제도들 간에 불협화음을 낼 수밖에 없다(나는 제도 간의 완벽한 논리적 보완성을 믿지 않는다. 때로는 그 안의 사람들이 공동체적 협력으로 가뿐하게 제도적 마찰을 넘어서기도 한다. 참여정부의 진정한 실패는 바로 이 지점에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쓰겠다).

    중도가 아니라 잡탕이다

    예컨대 한미 FTA를 주몽의 강철검처럼 여기면서 동시에 요즘 부쩍 사회투자국가를 들먹이는 참여정부의 정책이 그렇다.

    사회투자국가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블레어가 대처의 보수당에 승리하기 위해 정치적 수사로 뻥튀기해서 그렇지 교육과 주거, 의료 등에서 기회의 평등을 부여하는 정책, 또는 공급사이드의 복지정책은 이미 스웨덴 등 북구 국가가 실행해 왔던 것들이다.

    에스핑 안데르센이 이미 지적했듯이 이른바 ‘제3의 길’은 북구 사민주의 정책을 선별적으로 수용한 데 불과하다. 뿐만 아니다. 이 정책의 핵심 중 하나인 사회적 일자리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관한 논의는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이미 한국노동연구원을 중심으로 논의돼 온 것이다.

    나라마다 정책의 폭과 깊이에 차이가 나는 것은 그 나라의 사회경제구조가 이런 정책과 얼마나 부합하는지, 정책 인프라가 얼마나 갖춰져 있는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공보육시설이 얼마나 있는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추진할만한 제도가 갖춰져 있는지, 심지어 계층별 소득 실태가 얼마나 파악되어 있는지,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적 타협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 나라의 정치-이데올로기 지형이 어떠한지 등이 관건이다.

    사회투자국가와 보수 언론의 ‘관대함’ 그리고 레임덕

    물론 이 정책을 가장 시행하기 좋은 곳은 이미 그러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는 북구형 국가들이며 가장 시행하기 어려운 나라는 영미형 시장주의 국가이다. 아마 사회투자국가론을 지금 갈고 닦는 사람들에게는 보수당 집권 12년 동안 철저히 신자유주의 경제가 된 영국에서 유행하는 정책이어서 매력을 느낄 것이다. 가장 소극적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니 급진적 개혁에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눈여겨 볼만 하다.

    논란이 많은 정책이라 하더라도(복지국가를 둘러싼 이론적 쟁점이 모두 문제가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지보유세 강화마저 좌파로 몰리는 이 나라에서 이 정책이 시행될 수 있다면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정의론 차원에서 사회적 투자국가의 이론적 자원이라 할 수 있는 아마타 센의 능력이론(capability theory)에 네트워크 이론을 접목하여 사회투자국가론 이상으로 현실적인 정책을 담은 보고서는 이미 참여정부에 제출된 바 있다.

    이 정부에 참여한 수많은 학자들이 위원회 등을 통해 낸 보고서가 대개 그렇겠지만 이정우 당시 정책기획위원장의 지휘로 작성된 <동반성장의 길>이 그렇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 김병준 당시 정책실장(현 정책기획위원장), 김영주 당시 정책수석(현 국무조정실장), 정문수 당시 경제보좌관이 붙인 대통령 참조용 댓글은 똑같았다. 사상적 시비에 걸릴 수 있으니 정책 기조로 채택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철학적 깊이는 몰라도 현실 정책에선 큰 차이가 없는 사회투자국가가 이런 사람들의 포위망을 뚫었다면 그건 확실히 발전이다. 더구나 정권 초기 이정우 교수가 네델란드의 폴더모델(유럽의 기준으로는 가장 시장주의적인 모델 중 하나)을 언급했을 때 보수적 언론이 그야말로 ‘난동’을 부린 것에 비하면 사회투자국가에 대해서 이렇게 관대한 것도 흥미롭다.

    이것이야말로 레임덕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당장 시행될 것 같지 않은 정책에 무관심한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진보진영이 비전 2030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그리 상심할 일은 아니다. 또한 이 점도 후술하겠지만 이들의 무대응은 예의 비일관성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초단기 정책과 중장기 정책이 뒤바뀌다

    큰 줄기로 돌아와서 역시 문제는 이 정부가 양극화를 극단으로 밀고 가는 급진적 신자유주의 정책인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사회투자국가를 외치고 있다는 데 있다. 한미 FTA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치유한다고 주장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초기에는 김영주 당시 수석마저 한미 FTA로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극복책까지 두 개의 정책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불행하게도 양극화 극복 정책은 이후 중장기 정책, 또는 차기 정부의 정책과제로 밀려났다. 원래 중장기 정책이었던 한미 FTA는 초단기 정책이 되고 당장 시행해야 할 양극화 극복책은 중장기로 밀려난 것이다.

    캐나다 서비스 노조는 미국과의 FTA를 추진하는 집단의 정치적 목표는 공공성의 강화를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갈파한 바 있다. 사회투자국가 역시 만능의 강철검이 아니다. 전통적인 소득재분배 정책의 강화와 함께 가야 한다.

    강둑을 터뜨리고는 범람한 물을 퍼낼 바가지를 생산해야 한다고, 2030년까지는 양수기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역설하는 그런 중도, 그런 실용, 대통령의 언어로 ‘유연한 진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대의 대상은 더더구나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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