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 자처 국민에 대한 예의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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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20일 02: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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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택시를 타고 집에서 국회로 출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차에 오르자마자 택시기사분이 저를 알아보고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택시기사가 갑자기 저를 가리키면서 “다 좋은데 성씨가 문제다”고 말했습니다.

    순간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챘지만 저의 입에선 엉뚱한 답변이 나왔습니다. “성씨가 한글로는 같지만 한자는 다르다. 노무현 대통령은 노태우 전대통령처럼 성 노(盧)씨를 쓰지만 저는 고기 어(魚) 밑에 날 일(日)자를 쓰는 나라 노(魯)씨이다.” 엉겹결에 한 얘기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궁색한 답변이었습니다.

    택시 안 대화는 다시 정상적으로 진행되었고 이윽고 차는 의원회관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받지 않으려는 차비를 던지다시피 주면서 악수를 청하는 저에게 택시기사분의 마지막 당부가 이어졌습니다. “언제 한번 기자회견할 기회가 생기면 성씨가 다르다는 것을 꼭 발표하라.”

       
     ▲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 (사진=난중넷)
     

    "대통령과 다른 성이라는 걸 꼭 밝혀달라"던 택시 기사

    시중에 많이 나도는 대통령을 소재로 한 우스개 중의 하나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택시기사의 마지막 애길 들으면서 저의 마음은 몹시 착잡했습니다. 노대통령이 잘못한 것도 많지만 국민들은 대통령이 잘못한 것 이상으로 대통령에 대해 분노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월 몇 차례에 걸친 개헌발언에 이어 며칠 전 발표된 대통령의 글에서, 참여정부의 정책이 그리 실패하지 않았다는 강변을 접하면서 제가 오히려 성난 민심보다도 안이한 문제의식을 가졌다는 자탄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통령께서 직접 참여함으로써 비화되고 있는 이번 논쟁의 출발점은 ‘노무현 정부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논쟁은 실패의 결과로서의 현 상황을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극복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진보진영의 역할과 과제는 무엇인가로 귀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진보진영의 대응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 곁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 “노무현정부는 실패하지 않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논쟁의 저변은 갑자기 확대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대통령께선 정녕 참여정부가 실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우리 사회 최대의 문제인 사회양극화에 대해 이번 글에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여정부 동안에 양극화가 심화된 것은 맞지만…그것이 과거 외환위기와 가계부도라는 경제적 위기에서 심화된 것이고 참여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회양극화는 ‘불가피한 현실’이 아닙니다 

    결국 양극화는 YS, DJ정부의 정책실패 과정에서 심화된 것이고 노무현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복지예산 증가등을 볼 때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극화를 속시원히 완화시키지 못한 것은 송구스럽지만 양극화 심화의 책임은 전 정부에게 있고 현 정부는 나름대로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히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글로 하신 말씀을 국민들을 대면한 자리에서 한번 그대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저는 각종 선거방송에 나가서 노무현 후보의 경제정책은 YS, DJ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노선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 사회양극화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노후보의 약속을 더 신뢰하였습니다. 지금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국민들입니다. 양극화를 속시원히 줄이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다름 아닌 참여정부가 그것을 더 벌여놓는 정책을 추진한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여정부의 경제노선인 신자유주의가 왜 문제입니까? 자본의 위기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그 부담을 사회적 약자들에게 전가시키기 때문입니다. 그 필연적 귀결이 사회양극화입니다. 사회양극화는 ‘대통령 글’을 공식 해석한 청와대 관계자의 말처럼 국민소득 2만불 시대에 다른 선진국들도 겪은 ‘불가피한 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묻습니다. 왜 비정규직이 전체 취업자의 60% 이상으로 늘어났습니까? 천재지변 탓입니까? 아니면 국민소득 2만불 시대에 다른 선진국들도 겪은 ‘불가피한 현상’입니까? 아닙니다. 비정규직이 다른 나라의 두배 이상 늘어난 것은 다른 나라들이 비정규직 확산을 규제하고 있을 때 우리 나라는 이를 방치함으로써 비정규직 채용방식을 사실상 ‘권장’해온 것입니다.

    비정규직 증가는 정부가 ‘사실상’ 권장해온 것

    비정규직에 대한 규제가 없는 ‘유연한 노동시장’에서는 비정규직이 확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비정규직 확산을 통해 노동비용을 줄임으로써 자본의 위기를 타개해 보겠다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기 때문에 생긴 예정된 결과였습니다.

    진보진영이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은 개방 자체를 반대해서가 아닙니다. 한미 FTA와 같은 무분별한 개방이 사회양극화를 결정적으로 심화시키는 것이 예정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미 FTA 결과 빈부격차가 더 벌어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국내 대자본의 활로를 위해 이 협상을 체결해야한다는 FTA 찬성론자를 볼 때 차라리 솔직해서 좋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우리나라가 2005년도 한해에 금융자산 100만불 이상의 백만장자 증가율이 세계 1위이면서 동시에 자살률이 세계1위라는 통계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만일 노무현 정부의 목표가 사회양극화를 무릅쓰고서라도 성장을 추진하는 것이었다면 노무현 정부는 그리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IMF 이후 고통을 전담해온 서민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목표였다면 노무현정부는 실패를 예정하고 태어난 정부입니다.

    노무현정부가 실패했는냐의 여부만큼 이번 논쟁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정체성이고 이에 대한 대통령 스스로의 인식상 혼란입니다. 이번 글에서도 드러났지만 대통령은 왼쪽 사람들에겐 스스로 신자유주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오른쪽 사람들에겐 “당신들이 말하는 좌파는 아니다”고 애기합니다. ‘좌파 신자유주의’는 대통령이 스스로 비꼬아 만들기 전에 이러한 애매한 처신에서 먼저 비롯된 형용모순입니다. ‘우파 반신자유주의’라 해도 같은 사람을 가리키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좌파 신자유주의’는 애매한 처신에 따른 귀결

    사실 저는 대통령께서 탄핵 중이던 2004년 5월말 연세대 특강에서 스스로 진보주의자를 자처했을 때도 대통령의 인식상 혼란에 대해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저는 이 때 언론을 통해 “국민들은 대통령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아야 하며, 노대통령이 노동자를 대하는 것이나 경제관을 보면 진보라고 말할 자격조차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또 “보수와 진보는 특히 경제문제에서 갈리는데 경제정책 기조는 노태우 대통령 이후 지금까지 달라진 게 하나도 없고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경제기조는 ‘DJ교과서’ 그대로라서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특히 대통령이 스스로 진보주의자를 자처한 것에 대해 “공부를 안 한 탓이다. 학자들이 들으면 웃는다”고 지적하면서 대통령은 “자유주의적 개혁파이면서 개혁적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했습니다. 결국 이 지적 때문에 유시민 의원으로부터 “대통령은 고시도 합격했고 당신보다 더 많이 공부했다”는 질책을 듣기도 했습니다.

    늦었지만 당시의 거친 표현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상의 혼란이나 한계가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현실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대통령의 이번 글에서 진보진영이 유연해야 한다거나 진보진영도 스스로 돌아보고 반성할 대목이 있다는 지적은 참으로 귀하게 듣고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적을 하면서 스스로를 유연한 진보로 자처하는데 대해서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노대통령, 당신은 유연한 진보가 아닙니다

    진보도 유연해야 하는 건 필요하지만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보의 유연성은 아닙니다. 오히려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전략적 유연성은 오늘날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주요 척도 중의 하나입니다. 이들을 받아들이면서 유연한 진보를 자처한다면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 열사에 비해 최남선이나 이광수가 유연한 민족주의자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정치의 불안정성은 무엇보다도 낡은 정치구조의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즉 한국정치의 비극은 정체성과 기본노선이 거의 비슷한 두 세력이 권력을 반분하고 대립하며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대한 두개의 보수정당이 권력을 담당해온 역사는 깁니다.

    일찍이 노무현 대통령은 제 13대 국회에서 95%의 법안을 여야가 합의처리 했다고 증언한 바도 있습니다. 제 17대 국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첨예하게 대립한 것 같지만 실제 민생현안 대부분은 두 당의 합의로 처리되었습니다.

    얼마 전 대통령 스스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경제정책에서 차별화는 불가능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사이에서 경제정책의 차별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만 사는 나라입니까?

    이 나라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만 사는 곳입니까

    신자유주의에 대해,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해, 한미FTA에 대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거대 양당과 전혀 다른 대안을 요구하는 절반이 넘는 국민들, 노동자, 농민, 영세자영업자들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보수와 진보는 경제문제에서 가장 크게 갈라집니다. 그런데 경제정책에서 차별화가 불가능하다는 대통령의 고백은 스스로 한나라당과 별다를 바 없는 보수주의자라는 증언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나라당이 겉으론 보수정당이지만 속으론 “유연한 진보”라는 말씀입니까? 대통령의 해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민주세력과 독재세력으로 대립하던 역사적 시기가 종료한 지금, 범여권과 한나라당의 양대구도는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와해되는 긴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 저항하여 사멸해가는 거대한 낡은 세력들이 철지난 이념과 방식으로 기득권과 낡은 보수양당체제를 유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을 친북좌파세력으로 몰아붙이는 한나라당의 색깔공세도 그러하고 반한나라당이니 민주대연합이니 하는 철지난 포장으로 재기를 도모하는 범여권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스스로를 유연한 진보로 자처함으로써 낡은 기득권을 연장하는 게임에 뛰어들었습니다. 물론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노무현 정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권은 진보정권이어야 한다는 바램이 여전히 강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무현 대통령이 진보를 자처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아무리 5일장이라지만 가짜약을 들고 같은  장에 연달아 나타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문제는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인식 차이

    국민들이 대통령에 바라는 것은 두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이런 논쟁에 참가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지금 문제 되는 것은 대통령과 진보진영의 인식의 차이가 아니라 대통령과 국민간의 인식차이 입니다. 그리고 부족한 것은 대통령과 진보진영의 논쟁이 아니라 대통령과 국민간의 대화입니다. 방송을 통해 일방적으로 말씀하시는 회견이나 강연이 아니라 대화와 소통을 국민들은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경청(傾聽)이란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을 말합니다. 귀를 기울이려면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국민들을 가르치겠다는 자세에선 경청이 불가능합니다. 기자회견과 강연에선 경청이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경청은 대화의 절반이기도 합니다.

    참여정부 1주년 평가 토론회에서 “참여정부가 지난 1년간 잘한 일은 당선된 것 밖에 없다”고 혹평한 기억이 납니다. 물론 참여정부의 출범 자체의 의의도 크다는 판단이 깔린 평가였습니다. 남은 일년이라도 국민들이 바라는대로 간다면 참여정부는 박수를 받으며 마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건승을 빕니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노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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