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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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20일 01: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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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수 년 전인가, 시인 황지우는 김수영 상을 받은 소감에서 김수영은 우리 세대에게는 엄한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진술했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눈알이 바로 박힌 사람은 모두 죽은 모진 세월에 살아남은 못난 아버지들, 그래서 ‘아버지’가 없는 세대에게 그나마 명령형으로 다가온 부성(父性)이 김수영이었던 것이다.

    ‘대동아 전쟁’ 시기의 생지옥 같은 식민지에서 성장하고 좌우 대립과 전쟁의 혼란기에 청년기를 보낸 아버지는 생존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비굴해야 하고 동지도 배신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가르쳐 주었는데 우리는 그런 가르침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정신’을 말하는 김수영이 더 절실하게 아버지로 느껴졌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가 남긴 유언이 하필 <풀>이라는 건 그의 정직(正直)을 말하는 듯하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그는 아마 그의 세대를 변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풀은 바람보다 먼저, 그리고 나중까지 존재하고, 풀뿌리는 좌우 이전에, 좌우를 넘어선 곳에 있다. 그래서 누구든 풀뿌리를 말한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말한다. 흑색 깃발의 무정부주의가, 동양의 현자(賢者) 노자가 재발견된다. 그러나 행동으로 무정부주의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스스로 풀뿌리가 되기는 쉽지 않다.

    못난 아들은 스스로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이제 다시 저 풀뿌리로 돌아가기를 주저한다. 화려한 꽃으로 살아온 습관은 이미 몸에 배어 있다. 그래서 항상 풀을 이야기하고 풀뿌리를 이야기할 때마다 난처하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이론과 실천이 따로 놀고 앞뒤가 맞지 않다.

    풀을, 풀뿌리를 찾아서

    2007년 2월 7월 충청북도 옥천으로 나는 풀을, 풀뿌리를 찾아 나섰다. 주간 <옥천신문>은 마침 마감 시간이라 모든 기자들이 자그마한 사무실에서 열심히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안재 대표이사에게 신문사 간판보다 노동조합 간판이 더 크다고 농담을 건넸더니 신문사 간판은 17년 전에 만들어진 거라서 작다고 대답한다.

       
     

    17년이라면! 그렇다. 만만치 않은 세월 동안『풀뿌리 옥천신문』(이안재 대표이사가 옥천신문의 역사를 쓴 책의 이름)은 바람을 견뎌 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 <여의도통신>이라는 딸까지 낳았다. 1999년부터 <옥천신문>이 주도한 실질적 안티조선운동과 올해로 5회째 맞는 ‘언론문화제’는 옥천에 ‘언론의 고장’이란 이름을 더했다.

    안티조선운동은 옥천에서 비로소 대중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옥천신문>에서 ‘조선일보를 해부한다’는 기사를 연재하고 난 후, 2000년 8월 15일, 옥천 출신 시인 정지용의 흉상 앞에서 ‘조선일보로부터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조선일보바로보기(약칭 조선바보) 옥천시민모임’를 결성한 ’독립군‘들은 절독 운동을 시작한다.

    참으로 놀랍게도 옥천의 여론 주도층,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거의 대부분이 이 운동에 찬성하였다. 옥천에서 조선일보의 구독 부수는 반감되었고 이것이야 말로 실질적인 안티조선운동이었다. 옥천은 그 후로 ‘언론(개혁)의 고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겨레신문> 초대 사장 송건호 선생의 고향이라 더욱 그 이름이 그럴싸하다.

    옥천의 기적

    1989년 9월 30일, 주주 222명 참여로 창간. 그러나 지금까지 <옥천신문>이 성장 발전한 것은, 아니 살아남은 것은 세상 물정 어설피 아는 외지인의 눈에는 기적이었다. 도대체 인구 5만 5천명의 농업군에서, 군청이 홍보 예산으로 ‘주민 계도지’를 구입해주던 관행마저 거부하고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런데 그 답은 역시 깊은 뿌리에 있는 것 같다. <옥천신문>의 전사(前史)는 1987년부터 발간된 ‘옥천청년애향회’의 회보였다. 그런 깊은 뿌리가 있었기에 척박한 땅에서도 <옥천신문>이라는 나무는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옥천청년애향회’는 엄격히 말해서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었고 그 이전의 존재, 즉 진정한 풀뿌리였다.

    만약 옥천청년애향회가 진정한 풀뿌리가 아니었다면 오한흥 회장의 뜻이 아무리 훌륭하였더라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역의, 지역 유권자의 관점에서 지역구 출신 국회의원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모니터하자는 취지로 20개 지역 신문사의 공동 출자와 참여로 인터넷신문 <여의도통신>을 만들었다.

    또 다른 풀뿌리는 옥천군에서 가장 작은 안남면에서 지역공동체 회복과 주민자치 실현을 목표로 활동하는 사람들, 주교종 안남면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 송윤섭 어머니 학교 교장(민주노동당 옥천군위원회 위원장 겸임)과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안남면 주민자치센터에서 만난 그들은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1966년 인구 16,000명이었던 안남면은 2006년에 인구 1,600명으로 줄었다. 40년 만에 인구가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이런 쇠락이 새로운 시작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주민자치센터 시범지역으로 선정되어 이장들과의 마찰을 극복하고 ‘안남면과 함께 하는 작은 음악회’를 면민 행사로 만들어 비로소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옥천의 이런 분위기 속에 5.31 지방선거 당시 오한흥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선거에 ‘풀뿌리 옥천당’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하였다. 초록정치연대가 낸 (무소속) 이진영 후보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풀뿌리 옥천당’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반어적 표현이었지만 선거관리위원회는 가차 없이 고발하였다. 이 땅의 국가주의는 여유가 없다.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우진교통

    김재수는 한창 때 청주의 유명한 ‘좌파’ 노동운동가였다. 그리고 마흔 아홉 나이가 되도록 변함없이 좌파로, 아마도 교사를 하는 아내 덕분에 살아왔다. 그런데 그는 지금 엉뚱한 위기에 처해 있다.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우진교통의 대표이사가 된 일부터 뜻밖의 일이지만 지난 2년 동안 대표이사 경험이 위기의 원천이다.

    임금 체불로 시작된 8개월간의 파업 끝에 자본가들이 (체불 임금 대신) 주식의 50%를 넘기면서 150억원의 부채를 안고 자기 자본은 잠식된 회사의 경영권을 노동조합이 갖게 되고 민주노총 충북본부 사무처장 김재수는 정책국장으로 직책을 바꾸어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우진교통에 파견되어 대표이사를 맡게 된다.

       
     ▲ 우진교통의 노사 경영평가회의 모습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은 민주노총의 이념과도 관련이 있는 매우 중요한 사업,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된 나날을 보냈다. 민주노총의 대원칙에 따라 임금 삭감이나 인원 감축이 없는 구조조정을 하면서도, 재무 관리와 자재 관리를 철저히 하여 경영 첫해 3.500만원의 흑자를 기록하여 구경영진의 무능과 부도덕함을 입증했다.

    사양산업 버스회사에서 실험되고 있는 유고형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공개입찰로 경유와 버스를 구매하는 투명 경영으로 흑자로 돌아섰다. 그러나 성공은 오히려 230명 노동자들의 마음에 죽어 있던 이기심을 되살려내어 내부분열의 씨앗이 되고 자주관리를 위기에 빠뜨리니 좌파 김재수의 신념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풀뿌리 진보’

    1만 원짜리 돈에도 있는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은 누구나 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고 …” 그래서 누구나 깊은 뿌리를 갖고 싶어 한다. 그건 이데올로기나 정치세력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보수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흔히 생각한다. 반면에 진보는 아직은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진보는 뿌리를 내려야 한다. ‘진보의 뿌리 내림’은 여러 가지 노력들이 특히나 스스로 뿌리나 거름이 되고자 하는 실천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충북에서 먼저 뿌리였기 때문에 진보가 된 사람, 오한흥을 보았다. 먼저 진보였기 때문에 뿌리가 된 사람들도 여럿 살고 있다. 충청북도에서 ‘풀뿌리 진보’는 자라고 있었다.

    무정부주의자 신채호의 무덤이 있는 충북에서 무정부주의는 실천이 되고 삶이 되어 마음의 밭을 넓혀 줄 것인가? 진보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로서 자리 잡아 갈 것인가? 나는 재작년 당직을 그만두면서 “민주노동당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밑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지만 청주를 떠나며 새삼 그 말을 되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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