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손학규 지지 가능한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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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20일 12: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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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회의의 명칭 개정 논란이 정치권의 상황과 연동되고 있다. 나는 민족문학 진영의 역사를 두고 판단하건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자유실천문인협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는 반독재 투쟁, 반외세 투쟁으로 역사를 이어 왔으며, 여기에는 폭압적인 투옥과 참혹한 고문이 각주처럼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투쟁의 전면에 섰던 작가들이 현재의 정치 상황에 대해 침묵하고 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일 터이다. 자신들이 온 삶을 걸고 만들어온 가치와 의미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마는 양상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2006년 상반기부터 ‘손학규 지지’를 둘러싼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로 70년대에 전면으로 나서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선택 여부를 둘러싼 풍문이었다. 예컨대 이승철 시인의 지적으로 표면화된 황석영 소설가의 정치적 입장이 여기에 해당하겠다.

내가 볼 때에는 이러한 사실을 단지 개인적인 친분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무리일 듯싶다. 인간적인 친분에도 역사적인 맥락이 개입하는 것이며, 여권 내에서 뚜렷한 대안이 없는 마당에 그런 밑그림을 그리는 일은 있을 수 있는 현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결코 지지하지 않지만, 그들의 선택과 판단에 대해 무언가를 폭로하는 방식으로 비판하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또한 그 분들이 나름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에도 그리 반대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판단할 몫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당원이 여기에 휩쓸리는 데에는 반대한다. 그럴 거면 왜 민주노동당에 가입하였나. 중요한 시기에 ‘열린우리당’과의 변별력을 확보를 스스로 포기해 버린 당시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같은 맥락에서 실패하였다. 두 당의 지지율 동반 하락이 그냥 생겨나겠는가.)

다만, 현재의 상황을 환기시키면서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겠다. 다들 아는 사실일 텐데,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사상이나 감정 등을 표현한다. 그런데, 1980년대까지 사상과 감정의 자유로운 표현은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언론에는 재갈이 물렸으며, 사상은 검열의 대상이었고, 감정은 정권․방송․언론의 조작에 의해 편파적으로 만들어지는 상황이었다.

이 때 문학이 부르짖은 자유는 대한민국 언론, 사상, 집회, 결사의 자유였고, 이는 대한민국의 자유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자유실천’이란 이름 대신 ‘민족문학’이란 이름을 택할 때 6월 항쟁의 성과가 동반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작가회의가 문협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여기서 마련된다. 문학이 비로소 문학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작가회의는 투쟁을 하였다. 그런데, 문협은 그런 타락한 권력구조에 편승하여 호가호위(狐假虎威) 하지 않았던가. 작가회의의 활동에 적대적이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과 맞서면서 작가회의는 오늘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이 이만큼이나마 민주화를 이루는 데 작가회의(자유실천문인협회)가 보여준 깨어있는 작가정신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 작가회의의 모태인 자유실천문인협회는 군부독재의 탄압 속에서도 생명을 유지해왔다. 1985년 김지하 시인 강연.
 

그렇지만, 그러한 과제가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가는 회의적이다. 물론 노무현 정부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개악한 사례는 있지만, 그게 과연 출판, 언론, 집회, 사상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훼손할 정도에까지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언론이 나서서 노무현 정부의 발목을 사사건건 잡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우리 사회의 질서를 보수언론이 판짜기까지 하는 상황이 아닌가(그렇다고 언론 탓만 해서는 곤란하겠다).

이는 문학의 투쟁 방식과 내용이 과거와 달라져야 함을 의미한다. 심정적인 차원에서 “87년 이전”을 주장할 수는 있으나, 그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동의를 이끌어 낼 수는 없다고 보는 까닭이다.

새로운 내용의 생산은 없이 단지 시민들의 위기의식에 호소하여 표의 결집을 꾀할 수는 있겠지만,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이미 각인된 ‘학습효과’를 생각한다면 그 또한 회의적으로 생각된다. 문학의 자리를 다르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문학은 대체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호흡을 깊이 들이마시고 멀리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 동안 민족문학이 축적한 성과를 계승하여 자본주의 현실과의 투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가령 자본의 욕망이 작동하는 데 대하여 긍정할 것이 아니라 비판해야 한다.

민족(민족주의)의 특수성과 세계(세계주의)의 보편성을 대립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조화롭게 공존하는 질서를 모색해야 한다. 살아있는 자연을 한낱 이용 가능한 대상으로 사유(‘나-그것’)할 것이 아니라 ‘나(생명)-너(생명)’의 관계로 복원시켜 생태학적 가치를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특히 ‘나-너’의 관계를 복원한다는 것은 근대의 ‘이성 중심적 주체’(사회계약론)를 뛰어넘는다는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사유해야 하리라고 본다.

문학은 구체적인 현실을 매개하는 까닭에 이러한 사유가 추상에 머무를 리 없다. 가령, 각자의 취양이나 문학적 입지에 따라 평가의 수준이 달라질 수는 있겠으나, 방현석의 『랍스터를 먹는 시간』이라든가 전성태의 『국경을 넘는 일』, 김연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강영숙의 『리나』 등은 그래서 주목을 요하는 작품들이다.

민족 특수성과 세계 보편성의 긴장 속에서 빚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그렇게 세계와 대면하고 있다.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의미 부여하는 일, 이것이 민족문학을 고려하는 평론가의 몫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반드시 동시에 진행해야 할 내용이 있다. 자신의 성찰에 대한 내용이 그것이다. 그 동안 민족문학은 세계(사회)에 대해 발언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의 아픈 부분을 직시하며 발언해왔다. 감시와 탄압이 가해졌을 때 그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위였다.

물론 이는 지금도 여전히 필요한 사항이다. 그렇지만, 작가가 타락한 세계(사회)의 바깥에서 바라보는 방식으로는 성찰이 힘들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고도화 될수록 더욱 그러하다. 과연 깃발을 들고 나아가는 작가의 내면에는 그 사회의 모순이 똬리를 틀고 있지 않을 것인가.

그러니 도덕적 낙차를 전면에 내건 민족문학은 이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봐야 한다. 성찰을 통해 스스로의 내면을 변화시키면서 동시에 사회의 현실을 바꾸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몇 줄 되지 않는 민족문학의 과제이지만, 나는 이것만 제자리를 잡아도 문화 일반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삶의 방식에 대한 교정 가능성, 인간과 자연에 대한 시선의 변경 등이 동반하는 까닭에 문화혁명의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학은 이런 그림을 그리는 위에서 정치, 경제와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지 않을까.

너무 커다란 이야기인가. 너무 무책임한 소린가. 그렇지만, 나는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최근 일고 있는 작가회의의 명칭 개정 문제를 정치권의 상황에 연동시키는 데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 굳이 그 안에 ‘민족문학’의 명칭 문제가 들어가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부디 민족문학에 대해 큰 판을 새롭게 짜면서 논의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 정치 개혁, 경제 개혁이 따라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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