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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리카락을 둘러싼 '전쟁'
    [컬렉터의 서재] 단발령, 신체의 자유를 일깨우다
        2022년 11월 08일 10: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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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가 수능시험에서 쉽게 출제되면서 질문 받는 일이 사라졌다. 이로 인해 좋게 보면 편해졌고, 나쁘게 보면 게을러졌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작년 드디어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하러 온 학생이 있었다.

    “선생님! 질문 좀 할 수 있을까요? “

    “응! 좋지”

    질문 내용은 신선했다.

    “선생님,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요. 유교에서는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서 함부로 할 수 없다고 들었는데요…”

    “응..그래서..”

    “그럼 조선시대에 대머리나 탈모있는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보면 좀 부족한 사람들인데, 그런 점에서 차별 받지는 않았나요?”

    “…………”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니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니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니라”

    『소학』 명륜편에 나오는 구절로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함부로 훼상하지 않음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한국사에서 이 구절이 크게 이슈가 된 때가 몇 번 있었는데, 그 중 한 번은 조선 선조 때였고, 또 한 번은 고종 때였다.

    먼저 선조 때 이 말이 회자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년 전인 1572년 선조 교서와 관련이 있다. 교서 내용은 당시 조선에서 젊은 남자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하는 풍속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조선 전기까지 남자들이 귀고리하는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신체 발부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초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 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에게 조소를 받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후로는 오랑캐의 풍속을 일체 고치도록 중외에 효유하라. 서울은 이달을 기한으로 하되 혹 꺼리어 따르지 않는 자는 사헌부가 엄하게 벌을 주도록 하라.

    『소학』 구절이 이보다 더 큰 이슈가 된 것은 고종 때 단행된 단발령 때문이었다. 1896년(고종 32년) 1월 1일(양력), 당시 을미개혁을 추진하던 김홍집 내각은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상투를 자르고 삭발하라는 명령이었다. ‘위생과 작업의 편리’를 위한다는 명분이었다.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고종도 솔선해서 머리를 깎았고, 내부대신 유길준은 체두관(剃頭官)을 거리나 성문 등에 배치하여 강제로 백성의 머리를 깎도록 했다.

    이러한 단발령은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소학』 구절은 가장 강력한 반대 논리였다. 단발령과 그 직전에 있었던 을미사변에 대응해 유인석, 이소응, 최익현 등 일부 양반 유생들은 급기야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구한말 최초의 의병인 을미의병이다. “오두가단 차발불가단(吾頭可斷 此髮不可斷: 내 목은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는 최익현의 일성은 이 을미의병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그것이 가진 근대성과 편리성에도 불구하고 단발령이 이렇게 한국인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킨 이유는 유교적 전통을 부정했다는 이유 때문 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갑오을미개혁 혹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갑신정변 같은 개화파 중심의 개혁이라는 것이 일본과 결탁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국왕권을 제약하면서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발은 왜놈들이 강요한 정책이라고 생각했다. 단발령 강요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은 개화 그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로까지 발전했고, 또 단발령이 일본을 본따 추진한 정책이라는 인식이 전국적으로 확산돼 반일 감정으로 이어졌다. 즉 ‘단발은 개화, 개화는 왜놈이 강요한 것’ 이런 논리였다.

    [사진] 김준근의 풍속화첩 중 ‘단발한 모양’ 왼쪽에서는 단발을 하고 있고, 오른쪽의 남자는 단발한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보고 있다. (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

    을미개혁과 의병 봉기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소위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친일내각이 붕괴하고 새롭게 친러내각이 수립되면서 을미개혁은 넉 달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고종과 친러내각은 기존의 내각대신들을 ‘국적(國賊)으로 규정하고 그들에 대한 체포에 나섰다. 성난 군중들은 을미개혁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김홍집을 광화문 앞에서 ‘왜놈대신’이라 욕하며 돌로 쳐 죽였다. 단발령 때 고종의 머리카락을 직접 잘랐던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도 김홍집과 같이 맞아 죽었다. 단발령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관파천 직후 고종은 단발에 대해 “너희 신민들이 편한대로 하라”고 명함으로서 강제 단발은 철회되었다. 그러나 ‘신체의 근대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단발은 한동안 자율에 맡겨졌다가 1900년부터 정부는 다시 단발령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2차 단발령’이라고 한다. 이 조치로 한성부와 각 아문, 경기도 지역 등의 다수 관리들과 관찰사급 지방관들은 머리를 깎아 이에 따랐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단발령 재공포 후 5년, 단발령 최초 공포 후 10년이 경과하였으나 백성은 물론 다수의 관리들이 여전히 단발을 꺼려 했다. 이에 1906년(광무 10년) 정부는 ‘3차 단발령’을 공포함과 동시에 아직 삭발하지 않은 관리들에게 강제로 머리를 깎도록 지시했다. 이어 같은해 내무대신 이지용(李址鎔)은 각 도에 ‘군수삭발령’을 내려 군수, 참서관, 주사(主事), 서기들에게 삭발할 것을 지시했다.

    이런 강제적인 조치와 함께 스스로 단발하려는 움직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의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서양 풍속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줄어든 데다가 개신 유학자들은 상투를 유지하지 않아도 효행을 준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퍼뜨리고 있었다. 민중들 일부도 스스로 근대화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었다. 『독립신문』은 1896년 5월 논설을 통해 단발을 도배와 장판에 비유하면서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하였고, 배재학당 학생들은 1898년 토론을 통해 단발을 결정하고 학생들 전원이 머리카락을 잘랐다. 같은 해 인천의 계몽단체인 박문협회도 회원들의 토론을 거쳐 단발을 결의했다. 이들에게 단발은 단순한 위생문제가 아니라 ‘근대’와 ‘문명’의 상징이기도 했다.

    [사진] 『대한매일신보』, 1904년 12월 15일 기사. “일전에 종로전기회사 옆에서 어떤 단발한 사람이 오줌을 누는데 정거수가 마침 보고 말하되 ”단발은 개명의 목적이라고 하면서 개나 돼지같이 아무데나 오줌을 누니 이 무슨 목적이오?”하니 그 단발한 자는 무료히 퇴거하였다더라.” 단발을 문명의 상징으로 보던 당시 인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때아닌 호황, 사진관과 이발소 그리고 양복점

    단발령을 계기로 뜻밖에 문전 성시를 이룬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첫 번째는 사진관, 두 번째는 이발소, 세 번째는 양복점과 모자점이다. 왜 호황을 누리게 되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자.

    먼저 사진관. 우리나라에 사진관이 처음 문을 연 때는 1880년대였다. 이때 황철, 김용원, 지운영 같은 선각자들이 사진관을 개설했지만, 크게 인기를 끌진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진과 관련된 미신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돌아 사람들은 사진 찍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뺏긴다”, “사진이 사람 모습을 잘 표현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살과 뼈를 감광 재료로 쓰기 때문이다”, “사진에 몸이 절반만 찍히면 몸이 반 토막 나서 죽는다” 등등 온갖 근거 없는 소문들이었다. 그러나 단발령은 이런 사진관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단발령으로 언제 상투를 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그대로 남기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단발령 이후 일반인을 상대로 영업하면서 가장 유명세를 탄 곳은 해강 김규진이 운영했던 천연당이었다. 이곳은 1907년 문을 연 이후 엄청난 호황을 누렀는데, 이듬해인 1908년 음력 정월 한달 동안에 천여 명 이상의 고객이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을 찾았고, 미처 손님을 다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당시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사진] 초창기 사진관의 모습

    이발소도 사진관 만큼이나 호황을 누렸다. 1895년의 1차 단발령이 거센 반발을 샀다면, 1900년대 이후의 2차 단발령 때는 반발이 그보다 크지 않았다. 개화에 대한 인식이 이미 백성들 사이에 차츰 퍼졌고, 단발로 인한 위생과 편리함도 점차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서울과 지방 도시에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소인 이발소가 하나둘 생겨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발소를 ‘개화당 제조소’로 부르기도 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이발소를 시작으로, 동흥이발소, 두남이발관, 태성이발관, 중앙이발관 등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이발소도 속속 개업하였다. 이렇게 시대는 강제적 단발의 시대에서 자발적 이발의 시대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큰 결심을 하고 이발소에 오더라도 단발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발을 결심하고 왔던 손님들이 칼 질 한번에 대성통곡하는 일도 빈번했고, 부모 몰래 왔다가 부모가 이발소까지 쫓아오는 바람에 반은 깎고 반은 안 깎은 머리를 움켜쥐고 달아나는 웃지 못할 모습도 흔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이발 산업에 일대 혁신이 일어난 것은 1905년경이었다. 일본에서 새로운 이발 도구로 ‘바리캉’이 들어왔던 것이다. ‘바리캉’은 발음까지 묘해 일본어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프랑스 회사 ‘바리캉 드 마르’가 1871년에 발명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단발령 이전에는 ‘이발’이 없었을까? 물론 그건 아니다. 상투를 틀던 시대에도 주기적으로 ‘백호치기(배코치기)’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백호치기?

    단발령 이전에 남자들은 상투를 틀었다. 조선은 상투의 나라였고, 상투는 성인 남자의 상징이었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조선인들의 상투 튼 모습이 신기했던지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중 한 대목이다.

    결혼한 남자는 정수리 부분에서 머리를 모으고, 이마와 뒤통수 부분에서 남은 머리카락을 감싸고 정수리에서 상투 매듭으로 묶습니다. 머리 모양은 말총으로 만든 상투의 망건 부분을 이마에 두른 후 단단히 묶습니다.그 위에 잘게 쪼갠 대나무로 만든 커다란 갓을 씁니다.

    -크노헨하우어의 강연문, [코리아], 1901년

    (고혜련, 『우아한 루저의 나라』, 정은문고에서 재인용)

    상투를 트는 방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정수리 주변의 머리칼(속알머리)을 둥그렇게 깎아낸다. 상투를 틀 때 열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을 ‘백호친다(베코친다)’라고 했다. 그런 다음 ‘주변머리’를 모아 빗어 올려 정수리 부근에서 상투를 틀었다. 이렇다 보니 조선시대에도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백호치기를 해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다시피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소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단발령 시행 이후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손님 집으로 찾아다니며 백호를 쳐주던 이들이 이발소를 차리고 제 발로 찾아오는 고객을 맞아 단발을 해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복점, 구두점, 모자점도 동시에 호황을 누렸다. 상투는 기존의 한복 복식과 한 세트였다. 그런데 단발령으로 상투를 자르니, 단발한 머리에 갓과 두루마기가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상투를 자르면 허전한 머리를 감추기 위해, 특히 막 단발한 후 정수리의 백호 친 부분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갓 대신 새로운 모자를 써야만 했다. 단발을 하게 됨으로써 복식도 서양식으로 같이 바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단발을 통해 양복이나 서양식 모자, 구두 등이 쉽게 안착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다. 맨 처음에는 단발한 관리들이 양복을 예복으로 착용함에 따라 서구식 모자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후 각종 학교와 기관에서 제복으로 양복과 서구식 모자를 착용하였다. 이런 흐름과 함께 일반 대중들도 단발한 머리에 어울린다는 이유로 양복과 구두, 서양식 모자의 수요가 폭등해 본래의 가격보다도 두배 이상 비싸게 팔리기도 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단발령이 일본인 양복 제작자와 모자 제작자들의 이익을 위한 목적으로 실시된 것이라는 주장도 당시에 제기되었다. 윤치호의 1895년 12월 26일자(음력 11일) 일기를 보자.

    오늘 아침 이문규와 대화하다가 “왜 모두가 일본인들을 증오하고 있는가? 심지어 일본에 오래 살았던 사람조차 일본인들을 독약처럼 미워한다”고 내가 말했더니 “그들은 너무 얄팍하고 교활하기 때문이지요”라고 이문규가 대답했다. “그들이 만든 상품을 보세요. 일제 상품 어떤 것도 튼튼하거나 오래 가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들의 언행은 일치하지도 않지요. 그들은 우리를 돕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본인 모자 제작자와 양복 제작자를 위해 조선인들의 단발을 원하고 있습니다. 결코 일본은 우리를 개혁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외부의 영향을 받아서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일본보다는 유럽 쪽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문규는 유식한 사람도 관리도 아니다. 그의 감정은 요즘 사태에 대한 대중의 느낌을 보여주는 척도다.

    실제 단발령 이후 일본인 상인들은 특수를 누렸다. 1896년 2월 2일자 일본 호치신문에는 ‘단발령- 양복, 시계, 모자, 조선 문명 일시 약진’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를 통해 당시 단발령이 일본의 수출 증대에도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단발령의 시행으로 특히 일본 이발관이 번창하게 되어서 매일 수십 명의 조선 사람이 몰려들고 각 집마다 20원 내외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또한 양복, 구두, 모자 그 외 양복 부속품도 평소의 두배 이상이나 팔렸으며…..

    근대학교와 단발

    단발령은 근대 교육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식학교라고도 불리는 근대 학교를 가려면 다수의 학교가 단발(삭발)을 입학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많은 저항을 받았다. 행세하는 가문에서는 그 머리카락 자르는 일 때문에 자기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일도 허다했다. 만약 그 근대 교육과 ‘단발’을 함께 실시하지 않았으면 근대교육은 좀 더 이른 시일 안에 보급될 수 있었을 거라는 견해도 있다. 이렇게 근대학교는 단발 문제를 둘러싼 당대 사람들의 갈등이 표출되고 충돌했던 최전선이었다.

    먼저 근대 학교의 입학시 단발에 대한 당시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몇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먼저 대구의 일등 부자였던 장길상은 아들 하나가 근대교육을 받기 위해 대구에서 서울로 유학을 간 일이있는데, 그 아들이 학교 입학 때 상투를 잘랐다. 그러자 장길상은 이 단발을 두고 ‘불효’와 ‘난봉’으로 취급해 학비 조달을 중단해 버렸다. 신학문이나 근대교육보다는 상투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 방정환이 어렸을 때 겪은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보성 소학교에 입학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따뜻한 봄날(1905년)이었는데 하루는 서당에 다니는 나보다 두 살 위(9세)인 아저씨가 서당을 그만두고 오늘부터는 학교에 간다고 자랑을 하기에 학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도 학교에 넣어 달라’고 졸라보았더니 ‘너는 이다음에 가라’고 조부님이 말리시는 고로 넌지시 밖에 나가 숨어 있다가 아저씨의 뒤를 따라 학교라는 곳에를 가보았습니다…….나 혼자 마당에서 돌멩이를 가지고 놀고 있는데 점심 때가 가까워 오니까 .…..… [교장선생님이] ‘그놈 똑똑하게 생겼다. 너 몇 살이냐? 합니다. ‘일곱 살이에요.’ 하니까 성이며, 이름, 집이 어디며, 아버지도 계시냐며 별것을 다 묻더니 내 뺨을 만지면서 ‘그놈 참 귀엽다. 너학교에 안단기련’ 잠자코 있으니까 또 ‘학교에 안단기련, 그래야 좋은 사람 되지. 하면서 내 뺨을 자꾸 주무르기에 ‘단길테예요’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교장님도 기뻐하면서 ‘그래 학교에 다녀라. 그런데 학교에 다니려면 머리를 깎아야지. 자, 나를 보아라. 나처럼 머리를 깎아야지. 머리를 깎을 테냐? 응? 나는 머리를 깎아야 공부가 되나요?’ 하거나 ‘이 학교에는 아무도 머리 깎은 이가 없는데요’하지도 못하고 그냥 철모르고’네’ 하였습니다.

    머리를 깍고 집에 돌아간 방정환은 어떻게 되었을까? 단발하고 집으로 돌아온 방정환은 할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았고,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밤새도록 통곡을 하였다. 어른의 허락을 받지 않고 학교에 입학한 것 때문이 아니라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매를 맞았다는 것은 당시 단발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진] 『황성신문』 1907년 2월 23일자에는 ‘학도늑삭(學徒勒削: 학도들 강제로 삭발)’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방정환이 이 학교에 입학한 후 2년 뒤의 신문 기사이다. 삭발은 당시 학생과 학부모에게 근대학교의 입학을 위해 넘어야 할 최대 장애물이었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저께 사동(篩洞)에 거주하는 이종호씨가 보성소학교 학도 백여명을 자기집에 회집하여 단발하라하니 혹은 통곡하고 혹은 사정으로 간청하되 이종호씨가 듣지않고 모두 삭발하였다더라”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단발 이야기가 나온다. 1910년대 전반 김구가 학교를 세워 계몽활동을 할 때였다. 그가 학생들을 모집할 때 직면했던 가장 큰 문제 역시 단발문제였다. 어쩔 수 없이 그는 학부형들에게 단발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학생들을 모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에 학교를 신설하고서, 학령 아동이 있는 집에 방문하여 다니면서 학부형에게 ‘학생들의 머리는 깎지 않겠다’는 조건부로, 애걸하며 아동들을 모아왔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부모들이 머리를 자주 빗기지 않아서 이와 서케가 가득하였다. 나는 할 수 없이 얼레빗,참빗을 사다두고 매일 몇 시간씩 학생들 머리를 빗겼다. 점차 아동 수효가 늘어남에 따라 학과 시간보다 머리 빗기는 시간이 많게 되니, 그 다음 수단으로 하나둘씩 부모의 승낙을 얻어 머리를 깎아 주었다.

    다수의 근대학교가 학생들을 단발시킨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일단 위생과 편리의 측면도 있었을 것이고, 게다가 근대학문을 가르치는 곳이니 개화와 근대 문명의 상징으로서 ‘단발’은 어쩌면 필요충분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 모집 과정에서의 단발을 둘러싼 갈등을 넘기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 시기 근대 학교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의병들의 습격과 방화에도 늘 마음 졸여야했다. 근대 학교는 빈번하게 의병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명대 김동환 교수의 논문 [근대 의병전쟁의 교육사적 의미에 대한 일고찰](2015)에서는 이 부분을 잘 살피고 있다. 이 논문에 소개된 의병들의 근대학교 공격 사례 몇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례1. 이번 21일에 청풍군에 의병 3천여명이 들어와 한벽리에 3일간 머무르다가 어찌된 일인지 청풍군 보통학교를 파괴하였다더라. 『황성신문』, 1907년 9월 25일자

    사례2. 이번 달 11일 상오 10시에 의병 2백 명이 순흥군에 돌입하여 사립소흥학교를 방화 소각하고 가구 서책과 제반기구를 모두 불태웠으니 교사 중건비를 우선 보조하라고 해당학교 교장 김창수씨가 학부로 보고하였더니….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30일

    사례3. 황의민, 황호연을 잡아들여 학교를 창설한 죄를 따져 물었다.
    김중진이 왜학교 때문에 고심하는 죄를 다스리고 스스로 반성하게 하였다.
    단양고을에 들어가 왜학교 교장 오철상을 죽였다.

    의병 이강년의 기록, 1907년, 『창의사실기』

    사례4. 음력 11월 4일 의도(義徒) 2천여명이 (남궁억이 설립한) 양양군 현산학교에 돌입하여 교사 및 제반 물품을 파괴, 불태우고 기본금 2만5천9백6십 9냥을 약탈해 갔다더라.

    『황성신문』, 1906년 5월 21일

    사례5. 안동협동학교 교사 안상덕, 김기주 양씨가 피해받은 사실(폭도가 난입하여 두 사람을 포살한 일)을 자세히 들어본즉 협동학교 설립이후로 혹 머리깍은 자도 있고 혹 머리깎지 않은 자도 있어 형식적으로라도 단체하기 위하여 양 교사가 머리깍기를 권면하였더니 부근 인사들이 격노하여 양교사를 살해하겠다고 풍색이 위험한지라 두사람은 타처로 십여일 피해있다가 인민의 격노한 상태가 멈춘듯하여 학교로 돌아온 당일에 피해를 입었다하며 생도 1명과 해당군의 재무서서기 권영주씨도 피해를 당했다하였더라.

    『황성신문』 1910년 7월 24일자.

    이렇게 근대 학교는 학생들을 모집하는 과정에서는 오랜 관습에 젖어있던 대중들의 낡은 생각과 부딪쳐야했고, 학교 설립 후에는 의병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의병들이 근대 학교만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단발 그 자체가 공격 대상인 경우도 있었다. 의병전쟁기 복식과 두발은 누구의 편인지 가리는 중요한 표식으로 작용하였다. 의병진영과 이를 진압하는 일본군 사이에서 일반 백성의 경우에는 의병인지, 아닌지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때로는 의병에게, 때로는 일본군에게 그 신분을 증명해야 하고 그들의 두발 등 표식은 때로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단순히 단발하고 근대학교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때로는 개화로 몰리고, 친일로 몰려 갑자기 습격받고 죽는 일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아래 『대한매일신보』 기사들을 보면 두발이 생과 사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명색(無名色)의 삭발인(削髮人)을 의병이 보면 일진회로 의심하여 해를 가하고 전쟁처에 존발인(存髮人; 단발하지 않은 이)를 일병(日兵)이 만나면 의병이라고 의심하여 가해하니 존발삭발(存髮削髮)이 모두 인민에게 화근이로고 (『대한매일신보』,1907년 9월 10일)

    보성학교 학원(學員) 이중효씨가 그 종형 이중세와 공주 등지에 갔다가 공주군 신도내 등지에서 의병에게 붙잡혀 보자마자 일진회라 하고 결박하거늘 이들이 학도단발이지 일진회원이 아니라 하되, 의병이 믿지 않고 장차 총으로 쏘려할 때에 그 처남 모씨가 의병과 친분이 있어 적극 해명하여 간신히 피해를 모면하였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8년 1월 12일자)

    독자들께서는 위 두 기사 중에 단발과 관련하여 ‘일진회’와 연관시키는 내용이 다소 의아할 것이다. 사실 의병이 단발한 근대학교를 공격한 주요 이유도 일진회와의 관련성 때문이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관범 교수의 설명이 도움이 된다. 그는 단발령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시기별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그에 따르면 처음 단발령이 시행되었을 때의 반발은 ‘폭압적 근대’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런데 이 양상은 1904년을 계기로 ‘매국’의 의미가 결합되었고 여기에 1906년 이후에는 계몽운동의 애국적 열기까지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단발의 국면이 바뀐 것은 1904년이었다.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결성된 일진회는 스스로 단발로 무장한 가운데 조선 관리들의 수탈을 비판하고 일본군을 위해 봉사하였다. 8년 전에는 백성들이 단발을 한 관리를 무서워했다면, 이제는 관리들이 단발한 백성들을 두려워하였다. 일진회의 극적인 순간은 을사늑약 전야 발표한 매국적인 성명이었고, 단발은 이 시점에서 근대와 더불어 매국의 함의를 얻게 되었다. 폭압적인 근대와 부정적인 매국의 굴곡을 넘어 단발에 애국계몽의 열기가 결합된 것은 1906년 이후였다.

    – 노관범, 단발령 전야, 『고전통변』(김영사,2014)

    이렇게 단발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동일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유교적 전통에 대한 부정으로, 어떤 이들은 근대, 문명, 진보, 계몽의 상징으로, 또 어떤 이들은 친일매국의 상징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머리카락의 모양’은 단순한 외모가 아니라 한 인간이 가진 사상의 신구(新舊)와 일본에 대한 인식의 총체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머리를 자를 것인가 말 것인가 혹은 근대학교에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실존적 고민을 요하는 문제였다.

    1910년 경남 곤양 사립 현산학교 풍경

    이제는 내가 소장하고 있는 단발령 관련 자료를 살펴보고자 한다. 2022년 1월 나는 경매를 통해 단발령과 관련된 훈령 한 점을 수집하였다. 대한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기 두 달전 1910년 6월 2일 경남 곤양 군수 김선재(金善在)가 사립 현산학교(峴山學校·하동 김양초등학교 전신) 교장 정규영(鄭奎榮) 앞으로 보낸 훈령(곤양군 훈령 제203호)이다. 가로 20cm, 세로 27.5cm 크기의 이 훈령 제목은 ‘학생 단발의 건’으로 되어 있다. 훈령은 ‘이전 훈령에 학생들 단발을 행하라고 하였으나 아직 단행하지 않았다고 하니 듣고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다’고 시작한다. 이어서 단발의 당위성을 설명한 후 재차 훈령을 보내니 이전 훈령에 의거하여 바로 실행(‘卽日踐行’)하여 학교의 의모(儀模)를 바르게 세우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 훈령을 통해 당시 사립학교는 관립학교와 달리 설립자의 의지에 따라 단발을 강제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교장 정규영은 왜 학생들의 단발을 실행하지 않았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유학자였다는 점, 게다가 그의 스승이 위정척사계열의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평소 그가 민족주의 경향이 강했다는 점과 관련있어 보인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잠시 살펴보자.

    정규영은 1860년 하동군 금남면 대치에서 태어나 영남 유림의 태두 면우 곽종석(郭鐘錫)의 문하로 통정대부 비서감승(정3품)과 하동향교 정교직에까지 오른 유림이자 경남 최고의 갑부로써 그의 아들 정재완과 함께 전 재산을 민족과 조선 독립을 위해 바친 인물이다. 그는 1919년 3월 스승 곽종석과 심산 김창숙(金昌淑) 등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유림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제1차 유림단 의거(파리장서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독립 운동가였다. 정규영은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명중 85번째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그 공을 인정받아 그는 2013년 박근혜 정부 때 건국포장을 추서받기도 했다.

    정규영이 현산학교를 설립한 것은 경술국치 한 해 전인 1909년이었다. 그는 나라의 장래는 교육에 있다고 판단하고 1909년 4월 향리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 자신이 운영해오던 서당 육영제(育英齊)를 폐지하고 그 자리에 일족인 정해영, 정희협 등과 함께 출자, 4년제 사립 현산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이후 6년간 교장직을 맡으며 육영, 계몽사업 등으로 민족혼 고취에 심혈을 기울이며 전 재산을 털어 광복을 위한 거친 삶을 산 선각자였다.

    [사진] 1910년 6월 2일 곤양군수가 현산학교 교장 정규영에게 보낸 훈령(박건호 소장)

    학생들에게 단발을 시키지 않은 것이 교장 정규영의 유학자로서의 소신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지역 주민들의 완고한 반대 때문이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곤양군수가 훈령을 내려 한차례 학생 삭발을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당시 곤양군수는 정부의 방침 때문인지 학생 단발을 적극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이는 이 훈령의 끝부분을 보면 더 잘 드러난다. 이에 따르면 곤양 군수가 미리 학생 수에 맞게 모자를 구매해 진주우체국에 보관해 두었으니 돈내고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근대학교 학생들은 단발한 머리에 교모를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훈령의 끝 부분 내용은 이렇다.

    “경성모자 30개를 이미 구매가능하여 현재 진주우체국에 있으니 모자값 2,160전과 소포세 160전, 배달비 60전 합계 2,380전을 보내어 모자값을 치룰 것”

    이렇게 곤양군수는 학생 단발에 적극적이었다. 재차 삭발을 촉구하면서 학생 수에 맞게 모자까지 미리 사서 보관해두었으니 돈내고 받아가라는 곤양군수 그리고 단발에 소극적인 교장 정규영의 갈등은 이후 어떻게 귀결되었을까? 흥미진진하지만 이후의 일은 알 수가 없다.

    일제 강점기의 단발

    내가 수집한 단발령 관련 자료로는 일제 강점기 것도 하나 있다. 이 자료는 충남 대덕군 유성면(현 대전) 면사무소에서 유승곤이란 인물에게 보낸 등사본 편지 한통이다. 어떤 편지를 보낸 것일까? 일제 강점기 단발정책이나 상황부터 간단히 살핀 후 편지내용을 보자.

    1896년 단발령이 첫 시행된 이후 단발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어났다고는 해도 여전히 상투를 고수하는 자들도 다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는 다시 단발령을 시행하지 않았고 상투를 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뒀다. 다만, 순사를 포함한 공무원이나 학생 등의 경우엔 무조건 단발을 해야 했다. 당시에는 상투보다는 단발이 더 인식이 좋았던 걸로 보이는데, 소설 『만세전』에서는 주인공 이인화가 상투 튼 노동자에게 상투 자르는 게 편하지 않냐고 묻자 노동자는 “상투라도 있으면 내지(内地) 사람들이 ‘무식한 놈인갑다’ 하고 그냥 봐줍니다요”라고 웃어 넘기는 대목이 나온다.

    이 시기 단발한 한국 남성들 사이에서는 짧은 스포츠머리보다는 요즘의 젊은 남성들처럼 머리카락 기장을 어느 정도 길게 하여 드라이하거나 크림을 발라 단정하게 하는 스타일이 대체로 유행했는데 이는 일본과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상투를 튼 사람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1926년 결발자(結髮者;상투튼 사람)와 단발자 비율을 정리한 흥미로운 통계 자료가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한반도 서안의 대도시, 평양, 목포 등의 도시들은 거의 대부분 단발임에 비해, 개성, 진주 등 대도시 주변의 농촌이나 내륙 지방 도시들은 다수가 상투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부여와 안동, 남원 등의 경우에는 결발자의 비율이 대단히 높게 나타나고 있다.

    <표> 1926년 10월 말 현재 각 지방별 단발과 결발 비율 (단위: %)

    이제 내가 수집한 자료를 살펴보자. 이 자료 역시 경매를 통해 수집한 자료이다. 시기는 일제강점기 충남 대덕군 유성면사무소에서 유승곤이란 인물에게 보낸 등사본 편지로 제목은 ‘단발 여행(勵行;권장하여 행함)에 관한 건’이다. 크기는 B4 정도이다. 이 편지를 통해 일제 강점기에도 여전히 단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내용은 이렇다.

    [사진] 소화 연간 대덕군 유성면사무소에서 유승곤에게 보낸 편지 (박건호 소장)

    단발 여행에 대하여는 근래 당국의 철저한 지도장려의 결과 점차 결발자(結髮者;상투한 자)의 수가 감소됨은 당국의 장려보담도 인민 각성과 세태 진보의 현상으로 사료하는 바이라. 과연 고래의 관습을 일시에 폐한다함은 물론 어려울 줄 사료되나 성인(聖人)도 여세 추이(與世 推移)라는 정신하에 확호(確呼)한 결심으로 단행하면 그다지 곤란과 수치도 없고 사회가 환영하는 바입니다. 하루바삐 자발적으로 삭발하여 현세를 인식하시는 유자(儒者)의 체면을 존중하심을 위요(爲要)하압. 금후로는 도군면 기타 관계 관청에서 유발자(有髮者) 명부를 비치하고 적극적 방침을 취하여 기어이 단행할 방침이니 명부에 이름이 기재되어 허다한 구설에 이르지 않도록 (하기 바랍니다.)

    이 편지를 보낸 시기는 편지 봉투에 찍힌 ‘소화’ 연호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데 대략 1926년 이후의 자료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소화 몇 년’이라는 구체적인 연도 표기가 없어 더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다. 이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흔히 알려졌듯 단발에 대해 일제가 단순히 묵인한 것이 아니라 역시 지속적으로 단발을 장려하거나 강요했다는 사실이다. 면사무소에서 이런 편지를 보낸 대상은 글 중간 중간에 나오는 표현들, 예를 들면 ‘유자(儒者)의 체면’등을 통해 봤을 때 당시 결발을 가장 많이 유지한 계층이었던 ‘유림’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 끝부분에서 면사무소에서는 ‘여전히 상투를 틀고 있는 사람 명부를 작성하여 이들에 대해 적극적 방침을 통해 단발을 단행할 방침’이라고 다소 협박조로 협조를 구하고 있다. 유승곤은 이 편지를 받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일제의 방침에 순응하여 단발하였을까? 아니면 이 편지를 무시해버렸을까? 역시 이 자료로서는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여성들, 단발을 통해 여권 신장을 주장하다

    일제 강점기 남성들의 단발 문제가 이제 숨고르기를 하는 단계였다면, 1920년대 들어 새롭게 여성들의 단발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등장했다. 물론 여성들의 단발은 남성들의 단발령처럼 정부의 강압적인 정책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단과 의지로 단발을 감행했다. 단발하는 여성들이 등장하자 세인들은 반은 놀라움으로, 반은 빈정거림으로 그들을 대했다. 그들은 단발한 여성들을 모던 걸(modern Girl)에 빗대 모단걸(毛斷 girl) 또는 모단녀(毛斷女), 모단랑(毛斷娘)이라고 불렀다.

    1921년은 한국 여성사에서 기념비적인 해다. 이 해에 허정숙이 한국 여성 중 최초로 공개 단발을 했던 것이다. 이 공개 단발로 세상에 충격을 준 허정숙은 1921년부터 각지에서 여성 단발운동이 벌어지자 이를 지지하고, 적극 주도하였다.

    1922년에는 기생 강향란의 단발이 큰 화제가 되었다. 1900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난 강향란은 한남권번(漢南券番) 소속 기생으로 있다가 어느 청년의 지원으로 배화여학교에 다녔다. 진학을 거듭하며 학업에 매진하던 중 청년과 이별하여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삶의 낙을 잃고 자살 시도도 실패한 끝에 강향란이 얻은 결심은 계속 공부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학비도 없고 배울 데도 마땅치 않았던 강향란은 스스로 단발을 하고 남장을 한 뒤 1922년 6월부터 남자 강습소를 다녔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여자라는 사실이 들통 났다. 1922년 6월 22일, 동아일보 3면에 실린 단발에 남장한 강향란의 기사로 온 경성이 떠들썩했다. 단발 여성을 향한 호기심과 냉소의 시선 속에서 강향란은 “여자도 굵게 살자면 남자만 못지않다, 이전의 기생생활을 버리고 남자처럼 살아보고 싶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여성의 남성화는 조선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비난이었다. 이후 그녀는 중국 상하이, 일본 도쿄를 오가며 여성운동에 힘썼고 부산에서 신문기자로 활약했으며 잠시 영화배우로 나서기도 했다.

    1923년에는 황해도 해주의 야학강습소 여교사 이춘봉(李春鳳)의 단발(斷髮)이 화제가 되었다. 당시 조선일보 1923년 3월 26일자는 “이것(단발)을 본 여러 군중들은 물밀듯 모여들어 혼잡을 이루는 동시에, 그 해괴함을 놀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더라”고 보도했다. 이춘봉에게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허정숙은 단발의 편리함, 단순함, 위생성과 머리 감을 때의 간단함을 이유로 들어 반박하였다. 그러나 단발을 최대의 불효와 패륜으로 규정한 유림들은 ‘사회를 금수처럼 만들려 한다’, ‘뉘집 딸이냐’며 허정숙을 비방했다.

    허정숙은 이에 굴하지 않고 주세죽, 김조이와 함께 1925년 8월 다시 공개 단발을 감행했다. 그러나 당시 언론과 여론은 그들 편이 아니었다. “…이 다음에 출가한 후에 남편이 술먹고 주정하면서 머리채 끌며 때릴가 하야 예방주사로 깍어버렸소. …끌채를 안 잽히려거든 빤빤히 삭발하시야…”처럼 빈정거리거나(조선일보 1925년 11월 7일자), “단발하면 후년(後年) 대머리(禿頭)가 된다”는 외신기사를 소개하기도(조선일보 1927년 5월 3일자)했다. 허정숙은 이러한 단발 반대 기사를 근거없는 편견이라며 서양 여성들의 단발한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으로 1926년부터는 다수의 여성 인사들의 단발 동참이 이어짐으로써 단발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그리고 이란 여성의 단발투쟁

    한국사에서 남성들의 단발이 국가 정책으로 추진된데 비해 여성들의 단발은 여성들 자신의 결단에 따른 것이었고, 신체의 자유 획득이라는 여성 해방운동의 성격을 띄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의 단발 투쟁이 시작된 지 대략 100년이 되는 올해 2022년 11월 현재 이란 여성들이 히잡을 태우고 단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는 지난 9월 16일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붙잡혔다가 22세 나이에 숨진 마흐사 아미니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이란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의 일환이다. 시위대가 외치고 있는 “여성, 삶, 자유”라는 구호는 이 시위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히잡을 벗을 권리로 시작한 시위는 인권과 자유를 요구하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고 있다. 히잡 의무화가 여성을 속박하는 굴레만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자유를 박탈하고 억압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위가 세대, 성별, 지역, 계급을 뛰어넘는 전국민적 항쟁으로 발전한 배경이다.

    이란 여성의 투쟁에 전세계의 여성들도 연대하고 있다. 그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열리는 집회 현장과 SNS를 통해 히잡을 불태우고 본인 머리카락을 잘라 연대를 표시하고 이란 정부에 항의하고 있다. 이슬람 율법에선 여성의 긴 머리카락은 아름다움을 상징하며 반드시 숨겨야 한다. 히잡 착용을 강요하는 이유다. 머리를 깎는 건 이에 대한 강력한 항의 표시다. 국가가 개인의 신체와 표현 수단을 통제하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신체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투쟁은 일어나는 법이다. 100년 전 우리나라의 여성들이 단발을 통해 기존의 억압체제에 저항했듯이, 이란 여성들의 투쟁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다.

    [사진] 이란 여성들이 히잡을 태우고 단발을 하는 시위를 전개하는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 이에 연대하는 여성들의 단발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인터넷 사진)

    *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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