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보수'가 살아가는 방법
        2007년 02월 16일 11:43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사전에서 ‘보수’가 어떻게 정의돼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평생 가야 사전 한 번 뒤적여 볼 일 없는 사람들도 ‘보수’가 무엇인지는 안다. 지난 세기에 ‘보수’란 군부독재의 다른 이름이거나, ‘대발이 아빠’가 보이는 문화적 후진성 같은 것이었다.

    요즘 들어서는 노무현 정권이 ‘진보’라는 욕을 들어먹으면서, 국민들의 보수-진보 관념에 혼란이 있기도 하지만,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시대 상식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 신문 사설과 청와대 브리핑에서 어떤 고매한 공방이 오가든 국민들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모두를 현존 지배질서의 수호자, 보수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보수-진보 구분이 생활상의 경험이나 시쳇말에서 나오는 것은 한국의 보수와 진보, 특히 보수가 서구에서 유래한 과학적 개념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는 서구 선진 사회의 보수와는 천양지차다. 그들은, 외국 보수들이 공유하고 있는 철학적 전통과 정치적 노선에서 보자면 돌연변이에 가깝다. 그들은 ‘보수적 가치’를 모른다.

    일반적으로 보수는 국가나 민족의 가치를 중요시한다. 때때로 이러한 가치가 주변 나라에 대한 위협으로 화할 정도로 국가와 민족은 보수의 절대 가치에 속한다. 비스마르크의 독일 민족국가 건설 노력이 그러했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한 일본 보수의 팽창적 국수주의 역시 보수와 국가주의(민족주의)의 상관 관계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한국에서 보수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민족이나 국가 같은 건 잊고 산다. 보수 논객 복거일이 ‘영어 공용화’를 주장하기 몇 년 전인 1994년 프랑스에서는 보수 정객 투봉(Jacques Toubon)의 주도 아래 프랑스어 전용법이 제정되었다.

    ‘안보 투사’ 김용갑 의원의 두 아들은 군대를 안 갔다. 한반도 위기 때마다 도상 훈련된다는 미국민 대피 계획에 포함된 ‘한국 사람들’이 진보에 속할지 보수에 속할지는 물을 필요도 없다. 사실이 어떠하든 우리 국민들은 보수적인 지배 계층이 자식 군대도 안 보내고, 여차하면 나라 버리고 도망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라 굳게 믿는다.

    “스웨덴 자본가들은 ‘말에 채찍질을 가하지 않으며 달리게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스웨덴 자본가들은 남아공 노동자들과 대화하기 위해 스웨덴 노조의 힘을 빌린다. 스웨덴 노조는 남아공 노동자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교육하고, 스웨덴 자본은 그를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스웨덴 자본은 전 세계 어디에서든지 노조를 만들라고 권한다. 그래야 파업 때 대화상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재영, 「스웨덴, 노동계급이 만든 최선의 자본주의 나라」, 『이론과 실천』, 2002

    스웨덴 경총의 간부가 이처럼 말하는 것은 ‘공존’이라는 것이 체제 지배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체제를 유지하고 안정시켜야 하는 보수의 입장에서는 의견이 다르거나 자신에게 도전한다 할지라도 사회구성원을 배격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 따라서 남는 선택지는 공존과 경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 한국의 자본은 어떠한가? 한국 최고의 지배그룹 삼성은 노동조합 설립을 원천봉쇄하고 있고, 정부는 그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을 잡아가뒀다. 그래서 ‘자유민주 질서의 수호자’인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을 양심수로 선정했다. 한국의 ‘보수’는 500만 명을 학살한 위에 세워졌고, 한국의 지배자들은 여전히 제거와 배제라는 보수답지 않은 가치를 선호한다.

    굳이 근대 보수의 철학적 기원을 찾자면 “존재하는 것은 합리적이다”는 헤겔의 명제 정도가 되겠다. 하지만 보수적인 헤겔조차도 “만물은 유전(流轉)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가르침을 더 원칙 삼고 있는 것을 볼 때, 보수가 모든 변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는 기존(旣存)의 유지를 위한 도전과 창조를 함께 내포한다.

    평등을 주장하는 좌파를 탄압한 크롬웰은 다른 한편으로 국왕을 처형하고 귀족원을 폐지시켰다. 노무현이 가장 존경한다는 링컨, 공화당원 링컨은 노예를 해방시켰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가 주야장천 읊어대는 ‘2만 달러 시대’는 30년 전 박정희의 ‘1천 불 달성’을 숫자만 바꾼 것 뿐이지 않는가? ‘진보’라는 가당찮은 영예까지 안고 있는 노무현 정부가 이런 지경이니, 한국 보수에게 도전과 창조 같은 걸 기대하기는 너무도 가당찮은 일이다.

    이처럼 한국의 보수 세력이 보수적 가치에서 일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한국 보수가 지켜야 하는 체제, 즉 대한민국의 현실을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일으켜 세운 것이 아니라,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멀건이 구경하다가 남으로부터 넘겨받거나, 빼앗거나, 우연히 주웠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만들며 배웠어야 할 가치를 배울 기회를 가지지 못했고, 만들지 않았으므로 지키기 위한 논리를 알지 못한다.

    한국 보수가 지켜야 하는 자본주의 국민국가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도입된 것이다. 자본주의 국민국가의 근본인 토지개혁은 조선공산당 출신의 조봉암에 의해 입안 추진되고, 북조선 인민군에 의해 완성되었다.

    북조선군이 침략했을 때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과 고급 관리들은 국민을 버리고 도망쳤다. 철수했던 미군이 되돌아와 전쟁을 하고 나니, 이승만 일당은 저희들이 버린 국민을 부역자라 학살하고, 뒤늦게 북진통일을 외쳤다.

    ‘한강의 기적’은 누가 만들었는가? 한국 경제성장의 진정한 주역은 저곡가에 의해 도시로 쫓겨난 노동자들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과 세계 최고의 저축률, 세계 최고의 교육열이다. 잘 짜여진 관료제와 재벌에 대한 집중 투자는 누가 만들었는가? 정체불명의 파퓰리스트 박정희의 ‘사회주의적’ 작품이지 않는가? 보수 전통의 계승자 윤보선은 홀홀히 ‘반공’을 외치고 다녔을 뿐이다.

    1987년에 보수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들은 시위대에 맞서 있었거나, 그도 아니라면 시위대 맨 끝 멀찌감치에서 “학생들 수고가 많아”라며 박수나 쳐주던 사람들이다. 연금돼 있던 김대중이 내란을 선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군부독재에 돌멩이를 던지던 이들도, 군화발에 짓밟혀 죽은 이들도 보수는 분명히 아니었다.

    나라를 세운 것도, 나라를 지킨 것도, 먹고 살 길을 연 것도, 말 한 마디 잘못했다 잡혀 가지 않을 자유를 쟁취한 것도 보수는 아니다. 다만 그들은 남들이 지쳐 있을 때, 그것을 차지했을 뿐이다.

    요즘 들어 꽤 괜찮은 보수, ‘뉴라이트’가 생겼다는 풍문이 돈다. 평소 자신과 말 겨룰 똑똑한 보수 만나기를 염원했던 민주노동당의 주대환(전 정책위 의장)은 이렇게 말한다.

    “뉴라이트가 필요하고 바람직하다고 해서 아무나 뉴라이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New에는 객관적 근거가 필요한 것이다. 우선 뉴라이트에는 최소한의 자유주의가 필수 요소일 것이다. 그렇다면 뉴라이트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주장해야 한다. 간첩죄나 반란죄를 다스리는 데는 형법으로 충분하다고, 사상탄압의 도구로 쓰여 온 국가보안법은 폐지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 뉴라이트는 종합부동산세 납세 거부를 선동하는 사람들을 꾸짖어야 한다. 도대체 정당한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보수를 보수라고 할 수나 있겠는가? 가당찮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비추어서 아직은 턱없이 낮은 부동산 보유세조차 내지 않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교육을 하고 다녀야 제대로 된 뉴라이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영국의 복지정책이라면 항상 떠올리는 ‘베버리지 보고서’를 쓴 베버리지는 보수당원이었음을 아는가? 한국에서 베버리지 같은 보수주의자를 기대하는 건 시기상조인가?” – 주대환, 「New 라이트? 무엇이 New인가?」, <레디앙>, 2007

    안타까운 일이지만, 주대환의 기대는 시기상조다. 뉴라이트라는 사람들이 지금껏 보여 온 모습은 올드라이트보다 더 극렬하고 전투적인 것이었다. 안병직 교수의 ‘대안교과서’는 올드라이트의 극우적인 이념보다 훨씬 위험하고 불순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그들의 뉴라이트는 대처와 레이건의 New Right, 즉 초보수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현대 한국에서 ‘보수’는 철학이나 경제이론, 정치사상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우리 국민에게 보수의 정의를 설명하라 하면 머뭇거리겠지만, 누가 보수인가를 묻는다면 흔쾌히 대답할 것이다.

    정치에서 보수는 권노갑 최형우에서 노무현과 그 가신들로 면면히 이어지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떡 만지다 보면 떡고물 묻는다”는 물리법칙을 손수 실천한다. 경제에서 보수는, 이사들 죽 세워놓고 ‘쪼인트’ 까는 정주영이나 ‘먹튀’ 정태수 같은 재벌 총수들을 일컫는 말이다.

    언론에서 보수는 한글 맞춤법도 모르면서 우김질 뿐인 엉터리 논설을 쏟아내는 논설위원님들이다. 교육계에서 보수는, 열병식 같은 조회 좋아하는 재단 이사장이나 수 십 년 동안 ‘족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교수님들이다.

    문화계에서 보수는, 찐빵모자 쓰고 파이프 물고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지만, 작품 한 편 내는 거 없이 감투에 눈이 벌건 사람들이다. 운동권 출신의 신보수는, 예전에는 사람 평이 별로였고, 요즘 처신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이 뭉친 곳이다.

    보통 국민들에게 ‘보수’는 불의나 부패의 동의어이거나, 그런 짓을 일삼는 천박한 인간 군상이다. 한국의 보수는, 급격한 사회변화 과정에서 비겁하게 살아남은 이기주의자끼리의 폐쇄적인 공동체이고, 그들의 권력과 이권 독점을 확대하기 위한 온갖 거짓말이다.

    물론 우리 국민은 보수를 미워하지 않을 뿐더러, 그들의 지배 아래에서 살기를 즐긴다. 대개는 그들 아래에 있어야만 생명과 생계가 보장된다는 아픈 역사적 경험 때문이고, 더러는 그들처럼 권력과 이권에 접근하고 싶은 미몽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진보’가 우리네의 생명을 지켜주지도, 생계를 보장해주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진보가 힘이 없어, 보수는 왜곡되었고, 국민은 불행하다.

    *이 글은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