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산 조봉암의 서훈을
    다시 강력하게 촉구한다
    [기고] 독립운동가, 농지개혁 실천가
        2022년 10월 31일 02: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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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죽산 조봉암 선생의 따님인 조호정 여사께서 아버지의 서훈을 보지 못하고 별세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걸출한 독립운동가로 7년이나 옥고를 치렀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하여 농림부 장관, 국회부의장을 지냈으며, 특히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농지개혁 사업을 진두지휘하여 대한민국 농민들이 소작제라는 수천년에 걸칠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후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며 진보당을 이끌다가 간첩으로 조작되어 처형되었으나 2011년 대법원에서 재심으로 무죄판결을 받은 인물이다.

    진보당 사건으로 재판 받는 조봉암 선생. 오른쪽은 조호정 여사

    대법원 판결에 나온 죽산에 대한 평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피고인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제헌국회의 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과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52년과 1956년 제2,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또한, 피고인은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개혁의 기틀을 마련하여 우리나라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대법원 2011. 1. 20. 선고 2008재도11 전원합의체 판결]

    공식적으로 죽산이 서훈되지 못한 이유는 1941년경 죽산이 생계를 위하여 재직한 비강조합장(비강은 왕겨를 말하는 것으로 왕겨는 당시 연료로 사용되었다.) 재직 당시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기록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나왔다는 것이라고 한다. 국방헌금 납부에 대해서는 유족측은 이를 믿을 수 없다고 부인했다고 한다. 또한, 죽산이 1945년 1월부터 8월까지 일제의 예비검속으로 구금되어 있었으며 해방 후 출소할 때 건국준비위원회의 몽양 여운형이 직접 죽산을 맞이했다는 기록까지 있다고 한다. 즉, 가장 위험한 인사로 분류되어 무려 7개월간 구금되어 있었던 죽산이 정황 상 일제에 협력했다고 볼 여지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헌헌법 제84조를 보면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내에서 보장된다.”라고 되어 있다. 이 제헌헌법 조항처럼 대한민국 주요이념의 두 축이 자유와 평등이라고 할 때, 죽산은 평등의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죽산을 서훈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평등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죽산의 서훈은 세 번이나 거부되었고, 따님이신 조호정 여사는 끝내 아버지의 서훈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이는 결코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평등한 대한민국을 위해 바친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에 대한 공정한 대우라고 할 수 없다. 자유롭고 평등한 대한민국은 죽산과 같은 인사들의 희생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도 우리 공동체가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후손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윤석열 정부에게 충심으로 촉구한다. 박근혜, 문재인 정부에서 하지 못한 죽산에 대한 서훈을 결단하라. 이것이 진정한 국민통합의 길이고 공정과 상식에 부합한 길이다. 윤석열 정부의 숙고와 결단을 촉구한다.

    필자소개
    변호사. 전 정의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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