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의 선생님,
    김금수 아버님을 보내며
    [추모] 선생에 대한 기억들과 생각
        2022년 10월 28일 08:46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오늘 김금수 선생을 마석 모란공원에 모셨다. 짧게는 30~40년 길게는 70여년을 김금수 선생과 삶 투쟁 실천의 인연을 이어왔던 박중기 선생, 남상헌 지도위원, 권영길 대표, 천영세 대표, 이원보 이사장이 끝까지 함께 했다. 선생들의 건강을 잘 챙기시는 게 김금수 선생의 바람일 거라 믿는다. <필자>
    ————————-

    그때가 1988년인지 89년인지 뚜렷하지 않지만 봉환이와 용교, 둘 다 지금 이 세상에는 없지만, 이 친구들과 노동교육협회짧를 처음 찾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별로 다정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살가운 존재는 아닙니다. 그건 친아버지이건 친구 아버지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라는 존재와는 다르지요. 하지만 그때 학생운동에 열심이었던 저에게 김금수라는 이름은 어렴풋이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지만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큰아들 봉환이를 앞장세우고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선생은 눈매가 부리부리하게 크고 호랑이 눈매였습니다. 처음 뵈었을 때는 눈을 맞추기도 어려웠습니다. 어려운 어른, 그게 첫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살갑지는 않지만 다감하신 분이었습니다. 찾아뵙지 못하고 가끔 전화로 인사 드릴 때마다 “아~는 잘 커나? 집에 별일은 없고?” 늘 첫 말씀이 제 생활을 묻는 거였습니다. 아마도 선생은 노동운동의 후배들, 제자들, 사회적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 건조하고 밋밋한 말씀이 지금은 너무 그립습니다.

    “이제는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지겹다…”

    세계노동운동사 6권을 발간하고 난 이후 작년 즈음 찾아뵈었을 때의 말씀이었습니다. 80을 훌쩍 넘긴 그 연세에도 여전히 자료와 책을 읽고 정리하고 쓰는 게 버겁지 않으시냐고 여쭤보니, 이제는 눈 때문에 자료 보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하시며, 평생을 읽고 썼는데 이제는 지겹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지겹다는 뜻이 아니라 눈과 건강 때문에 더 꼼꼼히 읽고 쓰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아쉬움과 그래도 포기하기 싫다는 마음이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습니다. 다른 어떤 말보다 더 따가운 질책이었고 나태함에 대한 죽비였습니다.

    선생의 그늘 아래에서 배우고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거인의 어깨에 올라 그 어깨 너머도 세상을 멀고 깊게 바라본다는 말이 있듯이 선생의 글, 강의, 책, 대화, 가르침은 저에게 큰 울림이었고 자극이었습니다. 선생의 그늘 아래에 있던 분들보다 그늘 바깥에서 보면, 그 나무의 거대함과 풍요로움, 넓고 짙은 그늘의 크기가 더 잘 보이는 법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은 늘 강조하시던, 운동은 ‘대중성’과 ‘이념성’을 양 날개처럼 가져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노동자들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할 세상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확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며 ‘이념과 전략’을 강조하셨던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총노선을 많이 강조하시기도 했습니다. 해방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오늘의, 순간의 싸움이 아니라 대장정과 같은 긴 싸움이고, 그에 맞는 시야와 준비, 활동들을 쌓아가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소위 국민파니 현장파니 중앙파니 하는 노동운동의 입장 차이에 대해서도, 또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 내부의 입장 차이에 대해서 늘 열려 있는 자세로 대하시는 걸 많이 보고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은 황희 정승은 아니었습니다. 너도 맞고, 너도 맞다는 식이 아니라 항상 명확하고 뚜렷한 판단을 가지려 한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아버지의 세대였지만 제 세대나 저의 후배 세대들보다 정신적으로 더 젊고 유연하고 역동적이었습니다.

    박정희에 가장 담대하게 맞섰던 청년들과 인혁당 사건, 한국노총에서의 활동과 쫒겨남,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노동교육에의 헌신, 수많은 민주노조 활동가들을 길러내고 전노협-민주노총의 토대에 기여, 전략적 개입과 사회적 노조주의의 제기와 개척.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 활동 지원과 참여. 파란만장하고 역동적인 삶이셨습니다. 누구보다 좌익적 급진적이기도 하였고 또 때로는 누구보다 가장 대중적이고 현실적이기도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과 논쟁 토론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저 또한 선생의 노동운동 전략과 방향에 이견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누구보다 멀리, 길게 바라보며 오늘을 고민하셨다는 것에는 한줌의 이견도 없었습니다.

    선생이 마지막 소임으로 생각하셨던 게 항일 노동운동가이자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의 불굴의 투사였던 이재유 선생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이재유 선생의 삶과 투쟁, 이념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국민파 노동운동, 개량주의, 노사정 참여론의 대부라고 불리던 선생이 생애 마지막 소임으로 생각했던 게 이재유 선생 기념 사업이라는 게 의미심장합니다.

    항일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계급적이고 가장 비타협적이고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가장 강조했던 게 이재유 운동입니다. 1920년대의 사회주의 운동의 분파적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고 실천적으로 극복한 그룹이 이재유 그룹이었습니다. 또 국내의 노동자 등 민중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면서 조선공산당과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를 재건하려는 것이 이재유의 노선이었습니다. 이재유에 대한 소명의식은 국민파-노사정-개량주의라는 잣대와 틀로 김금수 선생을 가둘 수 없는 이유을 잘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재유 기념사업회(준)의 발족을 보면서, 그리고 그 자리의 어느 종교인의 발언을 보면서 과연 이재유의 정신과 김금수의 소명의식을 우리가 제대로 이어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던 게 솔직한 마음입니다.

    저로서는 아들친구라는 인연으로 30년이 넘게 아버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제가 25살이었으니, 김금수라는 아버님과는 친아버지보다 더 긴 시간을 보냈던 거 같습니다.

    서울역, 삼각지, 경기대, 충정로, 홍제동 등 아버님의 흔적과 자취를 졸졸 따라다니며 질문하고 문제제기하고 이야기를 듣고 꾸지람도 받고 칭찬도 받았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저의 조잘거림을 가만히 들으시다가 한두 마디 묵직하게 던지시던 그 모습….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들입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합니다. 삶의 처음에 그런 의지의 대상은 부모와 가족이지만, 사회에 나아가서도 그런 의지할 수 있는 어른, 선배, 동료를 만나고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건 행운이고 행복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아버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고 행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아버님은 누군가에 의지하려는 자세에 대해서는 질타할 거 같습니다. 언제나 노동자의 주체성, 운동 주체의 자기 정립과 실천을 강조하신 분이니까요. 그럼에도 아버님은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의지처였습니다. 그게 또 아버님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몫을 잊지 않게 해주는 힘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아버님, 이제는 봉환이와 만나서 따뜻한 부자의 정을 나누시길 바랍니다.

    우리들의 선생님, 나의 아버님 김금수 선생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장, 전 진보신당 부대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