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가지 오해와 몇 가지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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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12일 01: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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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노무현정부의 평가와 진보진영의 2007년 대선전략과 관련한 최장집교수의 글과 인터뷰에 대해 조희연 교수가 <레디앙>을 통해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나 역시 <레디앙>에 ‘공포의 동원정치를 넘어서자’는 글을 기고해 논쟁에 참여했다.

    그러자 조 교수가 ‘신보수, 진보세력에 좋은 조건인가’라는 반론을 제기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재반론을 준비하는 중에 <한겨레>가 2007년 2월 9일자에 이 논쟁을 요약 소개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나의 글을 과잉단순화하고 내가 보기에 왜곡한 조 교수의 요약을 기초해 나의 입장이라고 소개함으로써 나를 희화화해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내 의도를 희화화시킨 <한겨레>

       
     ▲ 손호철 서강대 교수
     

    <한겨레>는 내가 한나라당의 집권이 “당연할 뿐 아니라 진보정치의 발전을 위해 좋은 일일 수 있다. 한나라당의 집권으로 신자유주의적 양극화를 더 극단적으로 체험하면 대중이 진보세력에게 돌아설 것이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그것도 시커먼 글씨로 제목으로 뽑아 소개한 것이다.

    나의 원래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리고 아래에서 보여주겠지만 이는 나의 주장을 과잉단순화하고 왜곡시킨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겨레> 2007년 2월 10일자에 나의 입장을 해명하는 글(‘반수구보다 반신자유주의가 핵심’)을 기고했다.

    그러면서 <레디앙>에 준비 중인 나의 반론의 일부를 함께 그 글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 글이 짧은 지면관계상 나의 논지를 명확히 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원래 준비 중이었던 반론을 <레디앙>에 발표한다.

    우선 나는 한겨레의 요약과 달리 “한나라당의 집권으로 신자유주의적 양극화를 더 극단적으로 체험하면 대중이 진보세력에게 돌아설 것이다”는 주장을 편 적이 없다. 그런데 한겨레가 그같이 요약을 한 것은 조 교수의 나에 대한 비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조 교수는 나의 주장이 “80년대 독재가 더 강화되어야, 혹은 한국자본주의가 더 파국적인 상황을 맞아야… 변혁운동의 기반이 강화된다는 인식이 존재했던 것을 상기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즉 내가 마치 경제파국이 와 민중 삶이 극단적으로 피폐화되어야 혁명이 오기 때문에 파국이 오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낡은 파국론에 기초해 있는 것처럼 비판했다.

    조희연 교수의 잘못된 비판

    그리고 이 같은 비판이 <한겨레>로 하여금 내가 마치 “한나라당의 집권으로 신자유주의적 양극화를 더 극단적으로 체험하면 대중이 진보세력에게 돌아설 것이다”이라고 말한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주장은, 조 교수가 생각하듯이, 그리고 <한겨레>가 요약했듯이, 민중이 양극화를 “더 극단적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나의 글의 어디에도, “80년대 독재가 더 강화되어야, 혹은 한국자본주의가 더 파국적인 상황을 맞아야” 하는 식으로, “더 극단적으로 체험해야한다”는 주장은 없었다).

    오히려 민중들이 양극화가 단순히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잘못이라고 느낄 뿐 이들의 신자유주의정책 때문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 결과, 민중들은 양극화에 분노하면서도 그 대안으로 민주노동당과 같은 반신자유주의세력이 아니라 열린우리당과 똑같은 신자유주의세력인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민중운동진영은 단순히 한나라당 집권 저지에 나설 것이 아니라 대선에서 한나라당을 포함한 신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해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만들어 사회적 양극화에 대항해 투쟁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을 비롯한 범여권의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이 신자유주의를 포기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신자유주의를 포기한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신자유주의를 고수하는 한, 수구집권 저지라는 명분 아래 연합이나 지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결과 정권이 넘어가더라도 이는 어쩔 수 없다. 그 경우 단기적으로는 한국정치가 후퇴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민중들이 한나라당의 신자유주의정책에 의해 사회적 양극화를 겪으면서 문제가 단순히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잘못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있음을 깨달아 반신자유주의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 민중들이 신자유주의를 “더 극단적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당 집권 불가피’ 주장하지 않았다

    이에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은 두 번째 오해부분이다. 내가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 교수는 내가 한나라당의 집권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요약했고 <한겨레>가 이를 받아 내가 한나라당 집권을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보도했다.

    한나라당 집권에 대한 나의 주장에는 전제가 있었다. <레디앙>에 썼던 나의 글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열린우리당이건 통합신당이건 자유주의 개혁세력이 신자유주의, 그리고 자신들이 군사독재 시절보다 더 악화시켜 놓은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한”이라는 전제였다.

    다시 말해, 열린우리당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반신자유주의 전선에 합류한다면, 남은 신자유주의세력인 한나라당의 집권에 대항해 함께 싸움으로써 이를 저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열린우리당을 비롯한 범여권의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이 신자유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수구집권 저지라는 명분아래 연합이나 지지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그 결과 정권이 넘어가더라도 이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한나라당에 권력을 내주는 것이 “불가피하며” “당연하다”는 주장인가? (아래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조교수가 말한 자유주의세력에 대한 진보진영의 견인전략 아닌가?)

    조 교수는 내가 평소 존경하는 몇 안 되는 한국의 일류 사회과학자이다. 그 같은 수준의 학자가 이처럼 정치적으로 예민한 주제를 내가 “한나라당 집권이 ‘불가피’하다고 했다"느니, "민중이 더 심하게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식의 80년대의 파국론을 연상시키고 그래서 한나라당 집권촉진 운동을 벌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의 소지까지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느니 하는 식으로 과잉단순화하고 왜곡하여 나를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든 것은 다소 의외이다.

    범여권에 면죄부 주려는 최근 움직임 주목해야

    그러나 조교수 같은 수준의 학자에게 그렇게 보였다면, 그것은 내가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해 나의 주장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고 그럼으로써 그 같은 오해를 자초한 것일 것이다.

    이와 관련, 주목할 것이 있다. 최근 들어 대선 전략 논쟁이 불거지면서 사회적 양극화와 같은 김대중, 노무현정부의 실정이 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경제위기를 가져온 김영삼 정부의 잘못이라느니 세계화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결과라느니 하는 논리로 범여권에 면죄부를 주려는 노력이 일고 있다.

    급기야 양극화와 같은 참여정부의 실패는 ‘구조적 성장통'(한겨레 2월 3일자. 안병욱 교수 인터뷰 중에서-편집자)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성장통이란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시적 통증으로 다 크면 없어진다. 그렇다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계속하면 성장통이 사라져 양극화가 해소될 것이라는 말인가?

    조 교수 역시 참여정부의 실패를 노무현 개인의 불철저함과 같은 단순 요인으로 환원하는 단순함 속에 진정한 위기가 있다고 비판하며 세계화의 구조적 요인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조교수는 “위기분석을 타자화해선 안되며 총체적 대안의 부재 등 진보진영의 ‘우리안의 위기’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말 따가운 비판으로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짚고 넘어갈 문제들도 많다.

    우선 최장집 교수나 나나, 또 많은 노무현 정부 비판론자들이나, 세계화의 힘을 무시하고 양극화를 단순히 노무현 개인이나 노무현 정부만의 탓으로 돌리는 단순환원론자들은 아니다. 당연히 1997년 경제위기가 김영삼 전대통령의 IQ 탓만은 아니듯이 경제적 양극화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탓만은 아니다.

    나 역시 김대중정부의 노동개악은 김대중의 반민중성 탓이고, 재벌개혁은 경제위기 덕분이라는 식의 반김대중적인 분석이나 역으로 노동개악은 경제위기와 세계화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고 재벌개혁은 김대중의 개혁성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친김대중 분석을 모두 비판하면서 김대중 정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조건과 정권의 전략의 복합적 분석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손호철, 『신자유주의시대의 한국정치』, 푸른 숲, 1999)

    김대중-노무현 정권 책임회피는 말이 안되는 얘기

    이 같은 전제하에 몇 가지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김영삼 정부와 현재의 한나라당이 경제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지난 10년간의 양극화의 책임을 그들에게 모두 떠넘기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 추구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책임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한 예로, 론스타게이트가 잘 보여주듯이 알짜 기업들을 헐값에 외국투기자본에 다 팔아버린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세계화 개방전략을 생각해보자.

    물론 해외매각이 경제위기로 불가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지금은 식민지 시대가 아니므로 외국자본은 많이 들여올수록 좋다고 공언하고 나섰고, 위기가 극복되어 외환이 남아돌던 임기후반에도 한전 같은 알짜 기간산업을 민영화해 해외매각하지 못해 몸부림을 쳤다.

    여러 집회에서 나온 구호처럼 한나라당, 그리고 새천년민주당, 현 열린우리당으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개혁세력은 각각 “나라 망친 놈”과 “나라 팔아먹은 놈”으로 둘 다 책임이 있다.

    세계화 ‘구조 요인’ 강조가 은폐하는 것들

    세계화 책임론도 문제가 많다. 물론 구조적 힘은 중요하다. 그러나 세계화라는 구조적 조건을 강조하는 것은 적극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편 두 정권의 책임을 은폐하는 부작용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세계화라는 추세라고 다른 나라도 우리처럼 집값이 폭등하던가(오르고 있지만 우리처럼 폭등은 아니다)? 노대통령의 주장을 변형시키자면, 다른 나라들의 건설업자들은 우리처럼 탐욕스럽지 않고 다른 나라에는 조중동이 없어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집값이 폭등하지 않는 것인가?

    또 노대통령의 주장처럼 세계화한다고 우리처럼 모두 미국과 FTA를 맺으려고 난리인가? 영국과 미국처럼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추구한 나라들은 우리와 마찬가지지만 스웨덴 등 북구의 경우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양극화는 그 이전과 별로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모두는 세계화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세계화라는 구조적 변수에 대한 강조는 조 교수의 의도와 달리 신자유주의와 양극화는 불가피하다는 구조적 패배주의를 유포해 여권에 면죄부를 준 뒤 “따라서 반신자유주의투쟁은 포기하고 반수구투쟁, 반한나라당투쟁에 나서자”는 신비판적 지지론으로 나갈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세계화 강조 구조적 패배주의 유포, 신비지론 될 가능성

    다만, 조 교수의 주장중 경청할 부분이 있다. 이는 ‘우리 안의 위기’와 관련해 민주노동당이라고 세계화 시대에 얼마나 다른 정책을 펼 수 있느냐는 간접적인 문제제기이다. 맞는 이야기이다.

    브라질의 PT당이 그 예이다. 브라질의 룰라대통령처럼 우파보다 더 우파적인 정책을 약속해 집권을 하고 또 그 같은 정책을 펼 바엔 집권을 안 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만에 하나, 민주노동당이 집권해 김대중, 노무현정부식의 신자유주의정책을 편다면 당연히 민주노동당 역시 투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조 교수는 나와 최 교수가 한나라당의 집권을 당연시함으로써(위에서 보았듯이 나는 이를 당연시 하지 않았고 최교수역시 내가 보기엔 당연시 하지 않았다)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한나라당의 집권과 ‘신보수당 정권시대’(조교수는 한나라당을 신자유주의와 구별해 신보수주의로 부르고 있는데 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이 문제는 논쟁의 핵심이 아니므로 피해 갈 것이다)의 등장은 당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 “진보세력, 그 일부로서의 노동자계급운동의 총체적인 패배의 결과”로 성립되는 것이므로 이를 저지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요약해 보여줬듯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확히 그것이다. 다시 말해, 한나라당의 승리는 진보세력이 패배할 때 생기는 사태로 진보세력이 반신자유주의 세력을 결집시키고 자유주의 세력까지 견인해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나서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진보세력의 총체적 패배의 결과”에서 진보세력이 누구냐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반신자유주의 세력일 것이다. 그런데 조교수의 경우 신자유주의를 열심히 추구하는 범여권의 자유주의세력도 진보세력의 일부(자유주의세력의 패배, 한나라당의 집권=자유주의 세력을 포함한 진보세력의 패배)로 생각하고, 이에 따라 진보세력의 패배를 막기 위해 한나라당 집권을 저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들은 진보세력이 아니다. 세상에 신자유주의적인 진보세력도 있는가?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한나라당의 집권만이 아니라 범여권의 정권재창출에 의한 자유주의적 신자유주의세력의 수명연장 역시 “진보세력, 그 일부로서의 노동자계급운동의 총체적인 패배의 결과”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나와 최장집 교수의 주장이 “어차피 한나라당이 이길 것이니 반수구 투쟁 포기하고 반신자유주의 투쟁이나 하자”는 것이라면 조교수의 주장대로 패배주의이다. 그러나 위에서 봤듯이 그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와 양극화는 불가피하다는 구조적 패배주의를 유포해 여권에 면죄부를 준 뒤 “따라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포기하고 반수구투쟁, 반한나라당투쟁에 나서자”는 식의 반수구후보 전략이 진짜 패배주의가 아닐까?

    조 교수는 한나라당의 집권과 관련해, 유럽의 파시즘의 경험에 빗대어 한국판 파시즘의 가능성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나 역시 다른 글에서 이 같은 우려를 표명해 왔다. 그러나 파시즘은 단순히 진보진영이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포기하고 반파시즘 투쟁에 나서 신자유주의적 자유주의 세력에 비판적 지지를 보내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 향수로 상징되는 파시즘의 위험은 오히려 자유주의세력에 의한 신자유주의정책으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어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민주주주의냐”는 생각이 서민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데 있다(손호철, 『해방 60년의 한국정치』, 이매진, 2006 중 ‘두개의 개혁, 두 개의 전선’).

    반수구 후보전략이 진짜 패배주의

    따라서 파시즘을 저지하는 길은 단순히 진보진영이 우선 시급한 불부터 끄자며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포기하고 자유주의 세력에 비판적 지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통해 사회적 양극화를 개선하는 것이다.

    조 교수는 중도개혁세력과 보수세력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맞는 이야기로서 나역시 한국사회는 ‘진보’, ‘개혁적 보수’(자유주의세력), ‘냉전적 보수’(수구)라는 삼분구도로 되어 있다고 주장해 왔다. 나아가 1997년 이후 우리 사회에는 두 개의 전선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민주개혁을 둘러싼 ‘민주전선’(진보+개혁적보수 대 냉전적보수)과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신자유주의전선(진보 대 개혁적 보수+냉전적 보수)이라고 주장해 왔다.(손호철, “두 개의 개혁, 두 개의 전선”)

    이와 관련, 보수세력에 대한 중도개혁세력의 상대적 진보성을 강조하는 조 교수의 논지나 미래구상의 반수구 국민후보 전략은 민주개혁전선에 주목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민주전선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부차적 전선이고 주전선은 신자유주의전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나의 주장이 중도개혁세력에 대한 ‘타격전략’으로서 이들에 대한 ‘견인전략’이 없다고 비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범여권의 자유주의 개혁세력(중도개혁세력)에 대해 “신자유주의정책을 포기하고 반신자유주의 전선에 합류하라, 그렇지 않으면 반신자유주의 투쟁 대상의 일부로 간주해 투쟁할 것”이라고 경고하여 신자유주의 정책을 포기하도록 압박하는 것이 견인전략이 아니고 무엇인가?

    반수구 대선전략은 ‘투항’하는 것

    이 같은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아니라 한나라당 집권을 막기 위한 반수구 대선전략을 주장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투쟁을 포기하고 자유주의세력에 투항하는 ‘투항전략’, 이들을 견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 의해 견인되는 ‘피견인전략’일 뿐이다.

    다시 말해, 오는 대선에서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 전선을 중심으로 한나라당, 그리고 (범여권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범여권과 같은 신자유주의 세력을 공격해야 하며, 이 같은 대전제 하에서 국가보안법 문제, 대북정책 문제 등 민주개혁전선을 부차적 전선으로 해 한나라당을 공격해야 해야지, 그 역은 안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이외에 대안이 없다”는 숙명론적 패배주의에 대해 나는 많은 대안이 있고, 문제는 있는 대안조차도 강제할 사회적 힘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조 교수는 그런 대안은 있을지 모르지만 ‘총체적 대안’은 없다고 답했다. 상당히 공감이 간다. 그리고 나는 이 부분이 독자들이 조교수의 문제제기 중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공감은 하면서도 좀 다른 입장이다. 나는 공산주의의 실패를 목격하면서 인간의 지적 기획이라는 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재의 상태에 대해 반대하는 운동”일 뿐이라고 느끼게 됐다.

    그리고 ‘총체적 선험주의’에 기초한 일관된 총체적인 대안 프로그램을 미리 만들고 이에 의해서 운동을 이끌고 한 사회를 일사분란하게 건설해 나가는 것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산재한 다양한 저항의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저항(물론 주전선, 부차적 전선 등은 있어야 하지만)과 그 속에서 형성되는 대안들의 누적을 통해 사후적으로 ‘총체성’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조 교수는 국가가 무균열적이고 일괴암적(monolithic)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맞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유독 이에 대항하는 대안만이 무균열적이고 일괴암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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