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당이 뒷골목으로 밀려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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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10일 09: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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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음식을 맛본다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경험이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맛을 혀끝으로 느낄 때면 나는 마치 어떤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맛본 기분이 들곤 한다. 물론 이런 맛은 많은 경우 음식을 조리할 때 넣는 향신료나 조리방법에 기인한다.

    많은 사람들은 동남아나 아랍 등 외국 음식에 많이 들어가는 커민, 바질, 사프란 같은 향신료나 코린더(팍치)같은 요리 재료 맛을 싫어하거나 꺼려할지 모른다. 하지만 맛이라는 것이 참으로 오묘해서 가지고 있던 편견을 버리고 이들 음식을 대한다면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다양한 맛의 경험은 삶을 풍부하게 해준다.

    혀가 느끼는 풍부한 맛의 세계뿐만 아니라 그 교감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의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와 공감대를 생각해 보면 어찌 안 즐거울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한국 사회에 전해진 외국음식에 관한 내용을 세 번에 걸쳐 다루려 한다. 물론 항상 내글이 그렇지만 맛보다 그 맛의 의미를 먼저 찾고자 한다. 그 첫번째로 이태원을 중심으로 전래되었던 음식문화와 그 성격에 대한 것이다.

    문화의 전파와 음식

    새로운 음식문화의 출현은 전쟁, 집단이주 등과 같은 사회적 변화를 통해 종종 발생한다.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은 우리사회에 고추라는 새로운 음식재료를 소개하였고, 고추는 우리 음식문화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고추는 이렇게 외래로부터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음식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재료가 된 것이다.

    음식을 포함한 문화의 변화는 문명과 문명, 혹은 서로 다른 문화와의 접촉, 즉 문화접변을 통해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접변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다른 문화가 바로 한 사회에 보급되거나 이식되지는 않는다.

    문화가 전파가 되기 위해서는 접촉되는 다른 사회의 문화수준은 물론 그 문화를 수용하는 사회의 내부의식 정도나 주체의 태도에 크게 의존한다. 다시 말해 문화 수용자의 제시 방식이 한 사회로 보급되는 문화의 성격이나 구체적 내용을 반영한다.

    이태원의 형성

       
     ▲ 이태원 거리
     

    음식문화에 있어서 이태원은 우리 사회의 특별한 위치를 점해왔다. 한국의 여느 지역에서도 맛볼 수도 없는 다양한 국가와 민족의 음식들을 이곳에서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식 레스토랑뿐만 아니라 프랑스, 이태리, 스위스 등의 서구음식점들이 즐비하게 있으며, 파키스탄, 인도, 네팔, 이집트 등 이슬람 문화권의 음식 역시 이태원에서 맛볼 수 있다. 가깝게는 일본, 중국 음식뿐만 아니라 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음식점들이 있다.

    이태원에 이렇게 다양한 이국 음식점들이 몰려있는 것은 지역의 형성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태원(梨泰院)이라는 지명에서 보듯이 본디 이곳은 옛날 관리들의 출장때 숙식을 제공하던 원(院)이 있던 곳이다.

    남쪽에서 여우고개(지금의 남태령)을 넘어 한양 4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가장 빠른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니 그 옛날 이곳에 관리들의 출장 숙소로 삼았던 이유는 충분한 셈이다. 조금 더 이야기 하자면 동쪽에는 살곶이원, 서쪽에는 홍제원, 북에는 보제원이 이러한 역할을 하였다.

    하여튼 이러한 이태원의 지정학적 위치는 해양세력으로 부터의 침략이나 전쟁이 있었을 때, 그들의 군대가 주둔하기에 좋은 지리적 잇점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제시기에는 조선군 사령부가 주둔하였고, 그 이후에는 다 알다시피 미8군이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다. 이렇게 이태원은 우리 사회의 실질적인 권력 핵심이었던 외국 군대가 100여년 가까이를 머무르는 마을이 된다.

    이태원이란 이름의 기원과 관련하여 일각에서는 그 옛날부터 ‘혼혈인의 거주지’였다는 의미에서 이태원(異態園)이라고 불리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이러한 역사를 빗대어 만들어낸 말일 것이다.

    ‘유흥과 권위’라는 이태원의 두모습

    이러한 역사는 일찍부터 이 지역에 이국의 음식문화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토양이다. 하지만 이 지역의 이국적 음식문화는 90년대 초반까지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몇몇 아는 사람만이 이태원에서 세계 각국의 음식 맛보았을 뿐 한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거나 발달되지는 못했다.

    100여년 가까운 역사 동안 일본인, 미국인 거주해왔고, 그렇게 형성된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온갖 나라의 공관과 숙소가 입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문화는 크게 빛을 보지 못한 것이다. 미8군에 주둔하는 군인들과 지원 인력의 규모가 적게는 2만 많게는 수만명 이상의 큰 규모임에도 말이다.

    그러면 왜 이태원의 음식문화는 왜 그렇게 확산되지 못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이주의 성격에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하면 일종의 정복과 지배라는 성격일텐데, 정복자의 권위와 폐쇄성은 자신들의 음식문화를 굳이 토착화하기 위한 노력에 힘쓸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자신들의 위락과 유흥을 위해 클럽이나 술집을 만들고 지원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고 중요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단지 그들에게는 가끔 고향 음식 생각날 때 먹을 수 있는 고급 레스토랑만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주는 ‘삶’이 아니고 ‘지배’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거주’를 통해 생활을 하고 그 속에서 삶을 만들어나가는 ‘정주’라는 개념이 불필요했을지 모른다.

       
    ▲ 이태원에 있는 멕시코 음식전문점 ‘타코(칠리칠리)’
     

    이런 의미에서 이태원과 한남동에 사는 군인을 비롯해 많은 다국적 기업, 또는 공관의 외국인들은 맛의 충실한 문화 전달자(culture deliver)로서 역할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길 양쪽으로 각종 바와 클럽들로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풍경은 이태원이 생활을 위한 거리가 아니라 유흥을 위한 공간임을 말해준다.

    그러한 까닭에 식당들은 대부분 뒷골목에 위치하고 있다. 해밀톤 호텔에서 하이야트 호텔로 올라가는 고급 주택가 골목에는 고급스런 파키스탄, 인도, 스위스, 멕시코, 프랑스, 이태리 레스토랑들이 줄지어 있고, 소방소에서 이슬람 사원까지 가는 뒷길에는 인도, 네팔, 아랍 국가 식당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공간 배치는 식당들이 대중을 위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소수를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이태원에는 유흥과 위락 단지 곁에 체면 안 차리고 마음 편하게 음식을 먹을 대중적인 식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들 식당에서 제공하는 메뉴에는 간단하게 먹을 만한 것이 없다. 다들 무게를 잡고 절제를 해가면서 먹어야 하는 나름의 정찬이 제공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태원 외국 식당가의 특징이다. 이는 왜 그동안 한국의 서민들이 이태원에서 이국적인 음식문화를 접하기 어려웠는가를 설명해준다.(물론 예전에 그랬다는 것이다. 요즘은 이태원 식당가도 한국 사람들의 인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다)

    레스토랑, 그 권위의 정치

    이러한 ‘권위적’인 이태원 음식문화는 일부 한국인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기도 하였다. 이를 주도했던 사람들 중에는 정치인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교와 목적을 위해 ‘레스토랑’을 만들었던 것이다.

    1949년 신익희, 장택상, 윤치영 등 거물급 정계인사들이 공동 출자하여 ‘외교구락부’라는 레스토랑을 만들었는데, 이 외교구락부에는 우리 역사에서 굵직한 정치적 사건의 장소가 된다. 70년대 김영삼은 이곳에서 ’40대 기수론’을 주창하였고,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던 ‘민주화추진협의회’는 1984년 이곳에서 결성된다. 이후에도 외교구락부는 ‘세실’ 레스토랑과 함께 보수주의자들의 정치적 공간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 지금도 남산으로 가는 길에는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논리의 비약일지 모르지만, 우리 정치사에서 수용된 ‘레스토랑’의 문화는 이태원의 외국 레스토랑 마냥 서민들이 접하기에는 어려운 문화였음은 분명한 듯싶다. ‘서양’ 권력에 대한 추종과 그 서양인의 레스토랑의 ‘권위’를 빌리려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정치적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혐의는 미국이라는 ‘권력의 핵심’과 가까 하려는 심리적 발로로 이태원과 가까운 남산에 레스토랑을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좀 더 확실해진다. 굳이 서양인의 밥을 먹어가면서 사교와 정치를 할 필요가 있었는가 말이다.

    박정희의 ‘요정’ 정치에 대항하여 ‘레스토랑’ 정치를 했던 사람들의 후손들은 오늘날 권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인가? 그들의 정치에서 ‘신자유주의’란 ‘빠다’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아니면 말고..^^;;;

    역사의 아이러니 이태원

    여전히 남의 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지만, 요즘 이태원이라는 동네가 가지는 역사는 한편으로는 슬프지만 어찌 보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의 모든 곳이 싸구려 자본주의에 의해 우후죽순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시 기능이 파괴되어 가고 있는데, 그나마 외국 군대의 주둔으로 도시를 공적으로 다시 설계하고 계획할 여지가 남아 있으니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철수시킬 수 있는 외국군대보다 사람들 욕망만을 부추기는 자본주의가 더 무섭다.

    하여튼 간에 경제수준이 높아지고 다른 문화에 대한 거부감도 없어지고 했으니 이태원에 가서 다양하고 색다른 맛을 경험을 즐겨들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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