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일정 잡자 하니
    수십 차례 "사귀자" 문자
    여성노동자, 일터 내 젠더폭력 불안
        2022년 09월 26일 05: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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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에 많으면 200여 곳의 고객 집을 방문하는데 제보에 따르면 속옷 차림으로 문을 열어주거나 매니저의 등 뒤로 와서 스킨십을 하는 고객이 있고, 점검하는 동안 성적인 농담을 하는 고객들도 있다”(LG케어솔루션 김정원 씨)

    “코레일 출신 남성 역장 2명이 각각의 역무실에 있는 업무용 PC로 근무시간 중 ‘여성 속옷을 검색’하고, 심지어 ‘포르노 사이트까지 들어가 영상을 시청’해왔다는 사실을 감사실에 고발했다. 결과는 ‘견책’처분이었다. 현재 해당 역장들은 여전히 같은 역에서 여성 역무원들과 근무하고 있다. 역장들이 사용한 PC는 공용일 뿐 아니라, 여성 역무원들이 업무하는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 (코레일네트웍스 여성 역무원 A씨)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이후 가전제품 방문 점검원과 역무원 등 여성노동자들은 직종과 관계없이 일터 내 젠더폭력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은 “각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겪는 일자리에서의 젠더폭력을 직면하고 이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사진=노동과세계

    민주노총 여성위원회(민주노총)는 26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사유화하려는 스토킹, 불법촬영이 만연한 가부장적인 여성혐오 문화에서 비롯됐다”며 “당사자 간 스토킹 피해를 넘어 직장동료 사이에서 발생한 젠더폭력이며, 일하는 과정 중에 생긴 사망이기에 일터에서의 젠더폭력에 따른 산업재해”라고 이같이 강조했다.

    특히 “서울교통공사 사장이 안전을 위해 여성은 야간당직에서 빼겠다는, 여성을 일자리에서 배제하겠다고 하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한 것은 우리 사회가 여성안전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이날 회견에서 각 직종의 여성들은 일터에서 벌어지는 각종 젠더폭력에 대해 고발했다.

    고객의 가정을 직접 방문해 소형 가전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김정원 금속노조 LG케어 솔루션지회장은 “고객들의 성희롱은 직접 방문 시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방문 일정을 잡기 위해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면 ‘개인적으로 만나서 술 한 잔 하자’거나, ‘사귀자’는 문자를 수십 차례 보내는 고객들도 있다”며 “하지만 고객이라는 이유로 매니저들은 소극적인 대응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김 지회장은 한 고객이 LG케어 솔루션 소속 직원에게 보낸 메시지를 공개했다. 직원이 방문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메시지를 보내자, 문제의 고객은 “사랑한다. 만나면 좋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는 “(점검 현장에서 성희롱을 당하면) 매뉴얼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나와서 보고하라고 돼있지만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다. 점검 후 고객만족도 평가에서 ‘매우 불만’이 나올까봐 걱정되기도 하고, 매니저를 교체하더라도 결국은 똑같은 여성인 다른 매니저나 팀장이 방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은 회사에 성범죄 알림e에 등록된 고객들의 정보를 요청했지만 회사는 고객 정보유출이라 불가능하다고 했다”며 “이 때문에 매니저가 일일이 본인 담당 구역의 성범죄 알림e에 들어가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하고, 고객의 점검 거부 사유를 사무소에 밝혀야 하는 상황이다. 또한 점검 거부 의사를 밝히더라도 100%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코레일의 역무업무 자회사인 코레일네트웍스에서 일하는 여성 역무원 A씨는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을 듣고 분노와 함께 큰 두려움을 느꼈다고 전했다. A씨 또한 평소엔 2인 1조 근무가 이뤄지지만 다른 직원이 연차나 병가를 사용하면 혼자 근무해야 한다는 구조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A씨는 “2021년 혼자 근무하던 여성 역무원이 고객에게 멱살을 잡히는 일이 있었고, 누군가는 뺨을 맞고 도망가다 운 좋게 외부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에 의해서 구조됐다”며 “이번 신당역 화장실에서 여성 역무원이 공격당한 것도 이런 구조로 인해 순회 시 혼자 점검을 한다는 것을 살인자가 잘 알고 있었기에 계획하고, 저지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직장 내 성폭력에 대한 회사의 대응 역시 심각하게 안일하다. A씨에 따르면, 지난 2018년 여직원과 승객을 대상으로 성희롱 발언을 한 모 팀장은 직원들의 문제 제기에도 제대로 된 처분을 받지 않았고, 여성 직원들과 함께 있는 사무실 내에서 포르노 영상을 보던 역장은 ‘견책’ 처분에 그쳤다.

    각 직종의 여성노동자들은 정부와 기업을 향해 일터에서 발생하는 성폭력과 젠더폭력에 대해 이전과 다른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희은 민주노총 여성위원장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끔찍한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가부장적 인식과 사회문화 때문”이라며 “업무를 성별로 구분하고 성적괴롭힘도 여성들이 감내하도록 부당한 업무를 강요하며, 여성들을 성적대상화하고 사유화하려는 여성혐오문화가 계속되는 한 일터 내 젠더폭력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위원장은 “정부, 서울시, 서울교통공사는 이번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을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거나 접근해서는 안 된다”며 “여성가족부는 무책임한 발언들을 중단하고 지금 당장 공공기관의 젠더폭력 피해 실태를 점검해야 한다. 중단된 여성폭력 신고 핫라인도 제대로 복원하고 피해자에 대한 지원도 확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서울교통공사와 고용노동부는 이번 사안을 산재사망 사건으로 인정하고, 성폭력이 사회의 안전과 일터의 안전을 해치는 중대재해임을 사회적으로 공표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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