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장률 숫자에 우리 명줄을 걸지말자
    [정의 경제] 경제성장 집착 벗어난 경제대안 필요해
        2022년 09월 22일 09: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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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반복되는 성장률 집착

    지난 19일 OECD가 올해 한국경제를 전망하면서 성장률을 0.1% 포인트 올려서 2.8%로 잡았다고 반기는 분위기다. 정부나 한국은행이 2.6%를 예상했고 국제통화기금이 2.3%를 전망했는데 이보다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년에는 종전보다 낮은 2.2%로 낮춰 잡았다. 이제 한국경제도 5% 이상은 고사하고 3% 이상 성장률을 올리는 것은 사실상 힘들어졌다. 과거와 같은 고성장 시대는 끝났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다 최근에는 0.1~2%만 오르거나 내려도 희비가 엇갈리고는 한다.

    앞으로 2020년대에는 한국도 2% 내외의 성장률을 이어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부의 가장 중요한 경제목표는 경제성장률이고 핵심 정책수단과 재정수단들은 일차적으로 여기에 맞춰졌다. 심지어는 무리하게 성장률을 끌어올리려는 시도도 보인다. 예를 들어 논란이 되었던 가덕도 신공항, 제주 제2공항, 새만금 국제공항에 이어서, 경기에 기존 수원 군공항을 경기 국제공항으로 탈바꿈시키자는 시도, 기존 울산공항을 신라권 신공항으로 확장하자는 김두겸 울산시장의 발언을 포함해서, 민선 8기 지자체에서 신규와 확대를 추진하는 공항 프로젝트가 10개나 된다. 공급측에서의 무리한 성장률 끌어올리기다.

    한편 수요 측면에서는 소득 부진을 만회하고자 무리하게 대출을 일으켜 소비를 끌어올리려고 한다. 최근 부동산을 포함해서 자산 거품이 꺼지는 추세가 완연한데도 불구하고, 계속 대출규제 완화를 통해 자산시장을 떠받치려는 시도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인위적 토목건설 수요를 일으키거나 무리한 부채 기반 성장을 추진하게 되면, 파괴되는 생태 환경 부담과 가계원리금 상환 부담이 경제성장률의 이익을 넘어가는 상황이 오게 된다. 이미 뚜렷해진 심각한 기후 위기와 가계부채 위기는 이 같은 방식의 무리한 성장 집착을 하면 안된다는 경고다.

    성장은 고용에도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나마 성장률에 매달리는 근거로 남아 있는 것은 경제성장이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지난 수십년 동안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성장과 고용의 관계는 이제 상당히 의심스러워졌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21세기 들어서 실질 경제성장률과 고용률(15~64세 기준)의 상관관계를 살펴본 결과, 경제성장이 고용률을 올린다는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인 상관관계(피어슨 상관계수 –0.55, 0.01 수준에서 유의함)까지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경제성장이 국가의 제1목표이어야 하고, 경제성장률 0.1~2% 차이에 국가 전체가 희극과 비극을 오가야 하는 이유란 도대체 무엇일까?

    사실 200년이 훨씬 넘는 자본주의 역사 가운데 ‘경제성장률’은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비교적 최신의 개념이고 정책지표다. 국민총생산(GNP) 혹은 국내총생산(GDP)을 연간 단위로 산출하는 방식이 개발된 것이 1929년 대공황 이후 2차세계대전 시기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연간 경제성장률’이 처음으로 공공 영역에 등장한 것은 미국이 1949년이고 영국이 1950년이다. 이어서 1957년부터 유엔이 유럽지역의 실질 경제성장률을 처음으로 비교 발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종전 직후 정책 결정자들은 무엇보다 완전고용이라는 목표를 가장 고민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경제성장을 고려했다.

    그런데 195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성장률이라는 지표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그 자체가 수단이 아니라, 각 정부가 달성해야 할 최고정책 목표이자 1차 과제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국제비교를 통해 경쟁을 촉진하는 지표가 되었다. 이제 경제성장은 모든 경제적 질병의 치료제가 된 것이다. 특히 냉전이 시작되던 이 시기에 경제성장률 지표는 미국과 소련의 체제 경쟁으로 인해 중요성이 증폭된다. 자본주의 미국이나 사회주의 소련이나 한결같이 누가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는지에 따라 자신들의 체제의 우월성이 입증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1960년대 말 경이면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가장 중요한 정부 정책목표로서 경제성장이 자리 잡게 된 것”이라고 생태경제학자 피터 빅터는 그의 저서 <Managing Without Growth>에서 요약한다. 이런 추세는 2020년대인 지금까지 크게 손상 받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지만, 그 역사가 고작 7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번 굳어진 ‘성장 패러다임’은 경제정책은 물론 공공정책 전체에 전방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적어도 20세기 후반기는 어떤 면에서 복지국가가 아니라 ‘성장국가(growth state)’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실에서 무너지고 있는 무한 경제성장론

    사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농경사회가 시작된 이후 인류가 경영해온 경제는 거의 대부분 0%대 성장률을 유지했고 이것이 정상이었다. 심지어 산업혁명 전후 시기조차 평균 경제성장률은 0.6%였는데 20세기 초반으로 오면서 석탄에 이어 석유에너지를 대량 사용하면서 2.2%로 급등하게 된다. 그리고 석탄,석유, 가스 등 전 세계에서 화석연료를 대량으로 태우던 거대한 가속의 시기이자 성장률 신화가 창조되던 1950년대 이후에 글로벌 경제성장률은 무려 3.7%(1950~2010년)로 뛰어오르게 된다.

    독일 경제사학자 마티아스 슈멜쩌의 말대로 이제 “현대사회는 자신들의 제도를 안정화시켜주는 경제성장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성장은 자본주의 현대성을 지탱하는 강력한 안정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게 된다.

    하지만 1980년대 접어들면서 선진국을 중심으로 성장률은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1~2% 내외, 심지어 일본은 20년째 0~1%성장률로 사실상 제로성장에 수렴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970년대 10.5% -> 1980년대 8.9% -> 1990년대 7.3% -> 2000년대 4.9%, 2010년대 3.3%로 일관되게 낮아지고 있고 이 추세라면 2020년대는 2%대를 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중국조차 한국의 뒤를 따르고 있다. 이렇게 무한 경제성장론은 이미 현실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익은 적은데, 기후위기라는 막대한 비용을 초래한 성장만능론

    문제는 과도한 경제성장 집착이 생태와 기후에 미친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이다. 경제성장 즉, 경제규모의 팽창은 온실가스 배출의 약 80%를 차지하는 화석연료의 대량 소비는 물론이고 각종 천연자원과 연료소비의 팽창을 수반했고, 그 결과로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위험경계선인 350ppm을 한참 지나서 현재 420ppm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지구 평균온도가 산업혁명 이전 대비 이미 1.1도 이상 올랐다. 최근 빈발하는 극단적인 기후들(가뭄과 홍수, 폭염과 혹한, 이상 태풍과 산불 등)이 그 일차적 영향이고 해양 산성화, 해수면 상승 등의 추가적 위험들도 다가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국제 기구나 정부들은 글로벌 경제가 앞으로도 매년 3% 정도 성장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이 얘기는 앞으로도 대략 24년마다 한 번씩 경제규모가 두 배가 된다는 것이고 2100년이 되면 경제규모는 다시 현재의 8배로 팽창한다는 얘기다. 마디아스 슈멜쩌는 이것을 ‘희망’이 아니라 ‘악몽’이자 ‘판타지’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런데 기존 주류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경제성장을 지속하면서도 기술혁신으로 에너지를 효율화시키고, 자원을 더 적게 쓰면 되지 않냐고? 이것이 흔히 말하는 경제성장과 에너지사용/탄소배출의 탈동조화 논리이고 한국 정부도 공식적으로 이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주장은 전혀 입증되지 않은 논리다. 물론 독일을 포함한 일부 국가들은 경제성장이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탄소배출은 줄어들고 있다. 물론 한국은 경제성장과 탄소배출이 지금까지도 동시에 증가하고 있지만.

    독일과 한국의 GDP 성장률과 CO2배출의 탈 동조화 정도

    그러나 독일이나 영국처럼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탄소배출이 줄어드는 나라에서조차 기후위기를 막는데 충분한 정도(연간 – 7~10%이상)는 여전히 아니다. 그래서 최근의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몇 나라들에서 절대적 탈동조화를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대기중에 계속 탄소배출을 추가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녹색 성장과 성장 패러다임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설사 모든 나라들이 탈동조화를 한다고 해도 위험한 기후변화를 피하기에는 불충분하다”

    기후위기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문제이자 정치문제다.

    지난해와 올해 연속으로 발표된 IPCC 6차 보고서가 말해주듯이, 기후위기는 이제 더 이상 과학의 문제가 아니다. 기후위기 원인이 인류가 대량의 화석연료를 사용한 결과라는 사실은 더 이상 명백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밝혀졌다. 기후위기가 얼마나 빨리 시작되고 있고, 위험 한계선이 어디인지, 한계선을 넘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도 충분히 밝혀졌다. 과학이 할 기초적인 역할은 다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유럽에서 과학자들이 연구실을 나와서 기후위기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거리 캠페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기후위기 원인과 위험이 충분히 밝혀진 지금, 기후위기 해결을 가로막는 제1장애물은 지금처럼 억지로라도 성장률을 끌어올리려는 경제정책, 무한성장주의 정책이다. 이런 식의 성장제일주의로 얻는 사회적 이익보다 생태파괴와 기후위기 가속화로 얻는 손실이 압도적인 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기업과 금융은 여전히 성장으로 이익을 보겠지만 그들이 사회적 생태적 손실을 책임지지는 않는다.

    결국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제1과제는 경제정책의 전환에 있다. 더 이상 고용도 불평등도 해결해주지 못하면서 기후위기만 가속시키는 무한성장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숙고와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어려울 것이다. 경제성장이 경제는 물론이고 현대사회 시스템의 ‘안정화 장치’로 견고히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경제비전을 그려봐야 할 시점을 더 늦출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이는 정치적 결단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미 뉴질랜드 같은 나라들은 국가정책에서 GDP 성장을 여러 목표 중의 하나로 내려놓은 선례가 있지 않은가? 경제성장률에 시민 삶의 명줄을 매던 시기는 지났다. 앞으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준거점은 증세냐 아니냐, 확장재정이나 건전재정이냐가 아니냐 보다는 무한성장에 매달릴 것인지, 기후를 위해 경제규모를 적절히 통제할 것인지에 두어져야 하지 않을까? 시대가 달라지면 기준도 지표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특히 재창당을 결의한 진보정당인 정의당이 이번 기회에 선도적으로 기존 성장 패러다임과 결별한 경제 비전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 ‘정의로운 경제’ 연재 칼럼 링

    필자소개
    전 정의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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