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년도 넘은 어느 분회와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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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07일 02: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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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기념일, 나는 서울로 향하지 않고 울산으로 차를 몰았다. 울산의 동구, 거기에는 내가 민주노동당 창당을 함께 기념해야 할 동지들이, 15년이나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현대중공업 주물공장에서 일하는 기능장 김형광에게 아마 7년 만에 전화를 했다. 미안했다.

    민주노동당 창당기념일에 울산으로 간 이유 

    노동자 정당을 만들자고 그럴싸한 말로 꼬드겼다. 아니 거창한 이론을 들어서 ‘교육’을 시켰다. 그러다가 그 이론은 틀렸지만 여전히 노동자 정당은 해야 한다고 다시 둘러댔다. 노동조합 활동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했고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마음속에 반짝이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대의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아직 노동자 정당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애초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5년 동안, 아니 20년 동안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안간힘을 쓰고 온갖 편법을 동원하였지만 아직도 노동자 정당은 꿈으로 남아 있다. 나는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기 위해 민주노동당 창당 기념일, 김형광의 집으로 달려갔다.

    엔진 조립을 하는 허동욱, 벌써 나이가 52살, 딸을 시집보낸 ‘늙은 노동자’가 되었다. 배관을 하는 이주용, 그리고 김해윤, 장길상, 이광재, 모두가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다.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을 한 세월이 얼마인가? 그들은 물론 모두가 동구지역위원회 소속 민주노동당 당원이고 전노회 회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따로 모임을 하고 있다.

    2주에 한번씩 부부 동반으로, 그러니까 모두 12명이 모이는 그 모임을 그들은 ‘분회’라고 했다. 그 분회는 민주노동당 분회가 아니다. 그러면 무슨 분회인가? 그건 진정추의, 민중당의, 한국노동당의, 아니 그 전의 지하조직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의 분회였다. 1주일에 한번씩 열리던 분회는 몇 년 전부터 2주일에 한번씩 열린다.

    15년도 더 된 어떤 분회와 그 분회원들

    역사가 남긴 흔적인가? 아니면 진화의 지층 아래 퇴적된 화석일까? 아니면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는 상록의 나무인가? 15년보다 더 오래된, 진보정당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분회, 진보정당이 없었을 시기에도 존재했던 분회 모임에 나는 참석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지난 20년 세월을 함께 한 먹물 하나를 용서해주기를 청하였다.

    “왜 노옥희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나?” “누구 선거운동이라 안 하고 누구 선거운동이라 하는 건 옳지 않다. 우리는 다만 노동당 선거운동을 할 따름인데 그렇게 급조된 선거는 남을 것이 없는 선거라고 판단했다.” 가벼운 문답 속에는 옳고 그름 이전에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누구 눈치도 보지 않는 노동자의 떳떳함이 있었다.

    김형광이 항상 “장가 잘 갔다”고 자랑하는 부인 남숙자는 “민주노동당, 이제는 포기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한다. 물론 그녀가 포기하자는 건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아니다. 그걸 가로막고 있는 껍데기를 벗자는 거다. “동구에서 먼저 청년당이 아닌 노동당을 만들어 주세요. 그러면 전국에서 노동당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또 사기인가?

    그들에게는 이유 있는 불신이 있었다. 나는 신뢰를, 어떤 당위를 앞세워 강요하거나 오랜 정리(情理)를 앞세워 구걸하지 않았다. 노동자 정당을 만들자고 한 이후 15년 지난 세월 온갖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건 미리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설명된 바 없었다. 그러니 할말이 없다. 김형광은 지금도 민중당과의 통합을 잘못된 거라고 말한다.

    그는 개혁신당 한 일은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청년들을 대거 끌어들인 걸 원망한다. 뚜렷하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들었다. 마음으로 나의 가벼움과 용기 없음과 인내 부족을 힐난하고, 나도 마음으로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는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져 김형광의 집에서 바다처럼 깊이 잠들었다.

    비로소 바다처럼 깊이 잠들 수 있었다

    1991년 연말, 나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울산에를 왔다. 권용목에게 우리가 만들 한국노동당 대표를 맡아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는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김강희와 그리고 지금 자유주의연대 대표를 하는 신지호도 있었다. 젊은 김강희는 시도 잘 써서 우리가 <사회주의자>라는 비합법 잡지에 싣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울산에는 권용목도 없고 신지호도 없고 김강희는 노동운동을 접었다. 그래도 남은 사람이 있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교육부장 이상도는 여전히 교육부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유기 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들어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사무실에는 그 동안의 역사-우리가 다시 거기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가 있었다.

       
     ▲ 현대자동차노동조합 위원장 사무실에 걸린 역사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어려움 속에 100명으로 남은 ‘전진하는 노동자회(전노회)’가 이제야 정치세력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공식 논의도 하고 노옥희 선거운동도 하고 회원의 절반 정도는 당원으로 가입하기도 하였다. 동구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이제야 시작되고 있는 걸까? 이제사? 아니면 다시 한번 시작하고 있는 걸까?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 옆에는 의외로 아름답고 한적한 해수욕장이 있다. 그 일산해수욕장에서 모래사장을 걸으며 파도소리를 듣고 동해로 떠오르는 달을 보고 있노라면 지난 20년은 순간처럼 되살아나고, 열린우리당이 몰락하고 분열하여 자유주의 진영이 위기를 맞이하면서 찾아온 노동당의 기회가 찰나처럼 스쳐 지나간다.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은 엄연히 제2당이다. 울산시의회에는 민주노동당 의원 4명이 15명의 한나라당 의원들에 맞서고 있다. 북구의회는 3명이 4명에 맞서고 동구의회는 3명이 5명에 맞서고 남구의회는 4명이 10명에 맞서고 있었다. 중구의회는 민주노동당 3명이 한나라당 7명과 열린우리당 1명에 맞서고 있었다. 이 만큼은 쉽지 않다.

    지역에 고통을 안겨주는 중앙의 결정

    북구의회 박병석 의원은 한때 의원직 사퇴를 고민했다. 애는 둘, 기본 생활비란 게 있다. 세비만으로 생활하고 구의원 활동하기 힘들다. 지역구에서 일어나는 경조사 참석은 아예 포기했다. 예전에 영국 의회는 세비가 없었다. 노동당에서 노동자 의원들에게 세비를 지원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의원들에게 무급 휴직을 요구했다.

    중구의회 황세영(현대자동차), 동구의회 서영택(현대중공업), 박대용(현대중공업) 의원도 마찬가지로 고통 받고 있었다. 울주군 전 위원장 하홍권도 현대자동차 5공장 노동자다. 그는 5.31 지방 선거에 출마를 자신 있게 준비해왔다. 이미 두 번이나 출마 경험도 있었다. 그런데 여성할당제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가 통과시킨 “3명 이상 출마하는 지역은 20% 이상 여성 후보를 내어야 한다”는 당규, 그건 창원에서도 오래 준비해온 대공장 노동자를 좌절시켰다. 지역 활동을 해보지 않은 최고위원과 국회의원들이 지역에 고통을 안겨주었다.

    남이 아닌 스스로가 자신에게 족쇄를 채우는 어리석음을 뻔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 중앙위원회에서 반대 토론을 한 권영길 의원은 철저히 무시당하는 봉변을 당하고 나 역시 좌절감을 맛보았다. 울산시당 부위원장 명숙은 “그 규칙이 여성의 정치세력화’라는 순수한 대의를 오히려 손상시켰다”고 말했다.

    명분만 대단하고 목소리만 크면 파괴적 결과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애초부터 현실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하루살이 같은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지역구도 없는 비례대표 의원이 대선 출마부터 선언하고, 다음 총선 지역구 출마를 준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비례대표를 꿈꾸는 사람은 넘쳐난다.

    자유주의 진영의 일시적 몰락과 천재일우의 기회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나라당 지지층의 72%트가 한나라당의 정책이 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가기를 바란다고 한다. 더 보수적으로 가야 한다고 답한 12%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50%를 넘어섰지만 그것이 국민이 보수화되었다는 근거는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자유주의 진영의 일시적 몰락과 그에 따른 분열로 진보정당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채운 족쇄부터 풀어야 한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힘들다. 특히 노동자들이 정치세력화에 참여하려고 하면 이혼을 각오해야 한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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