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첩당' 욕하며 카드 서명은 재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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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05일 10: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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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세대를 지칭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전쟁 직후에 태어난 세대를 가리킨다. 나는 1954년 6월 1일생, 그러므로 1953년 7월 27일 종전이 되었으니 나야말로 순수한 전후 세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벌써 내 아들이 27살 청년이 되었다.

    1954년 6월 1일 생

    2007년 1월 22일부터 4일간의 부산 방랑길을 동행해 준 나연준과 김형원도 27살 청년들이다. 나연준은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김형원은 조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학생이다. 한창 좋은 나이, 그 젊음이 부럽고 그들, 아들 세대가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 정서, 희망 따위가 궁금하다. 우린 서로를 궁금해 했다.

    두 사람의 나이에 나는 부산 연산동의 보안대 지하실에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았고, 군수사령부 헌병대에 수감되어 군법회의 재판을 받았으며 주례교도소에 갇혀 있다가 계엄사령관의 형 집행 면제 조치로 석방되었다. 1979년 10월 18일, 부마항쟁 당시 나는 마산에서 500여 시민들과 함께 마산경찰서로 붙잡혀 들어갔다.

    며칠 후에는 부산에 설치된 합동수사본부로 호송되었다. 부마항쟁은 몇 달 전에 발표된 남민전(南民戰)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판명될 예정이었고 그 그림에 나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자못 위험한 상황에서도 걱정이 없었고, 오히려 새로운 체험이 신기하기도 했고 즐겁기도 했다. 이유 없이 행복했던 그 시절이 바로 청춘이 아닐까?

    영도다리 끝에는 가수 현인의 동상을 세우고 ‘굳세어라 금순아’를 들려주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라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 홀로 왔다.”아들 세대와 함께 아버지 세대의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녀석들은 ‘일사이후’란 말을 알까?

       
      ▲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서…
     

    두 세대가 함께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

    우리는 뜻밖에도 가까이서 생생한 설명을 들었다. 1950년 12월, 눈보라가 휘날리는 흥남부두에서 최용국 민주노총 부산본부장의 부모님은 6남매를 데리고 미군 수송함을 탔다. 여덟 식구가 헤어지지 않고 같은 배를 타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비규환, 여차하여 다른 배를 탔다 하면 바로 노래의 주인공들처럼 되었을지 모른다.

    처음 피난민 여덟 식구는 거제에 내려졌기에 최용국 본부장은 거제에서 1953년, 전쟁 중에 태어났다. 그리고 곧 부모님은 먹고살기 위해서 부산으로 나왔다. 1.4후퇴를 일시적 후퇴로 알고 살림살이를 함흥의 집에 그대로 두고 내려오신 부모님은 부산에서 터를 잡고 아홉 남매를 키웠다. 그래서 최용국 본부장은 부산사람이 되었다.

    또 한 사람의 전후 세대, 차성환은 지금 부산 민주공원 관장이다. 겸손하고 온화한 그가 남민전의 전사(戰士)로 동아그룹 회장 최원석의 집을 털려고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지만 그는 시인 김남주, 전교조 전위원장 이수일과 함께 10년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그래도 우리가 절반은 성취한 행복한 세대가 아니냐”고 했다.

    무려 33년 전에 만난 정의헌은 아직도 꼿꼿한 모습 그대로 노동운동 일선에서 일하고 있다. 몇 년 전에는 민주노총 부산본부장을 하더니 지금은 ‘전국지역 업종 일반노동조합 협의회’ 의장의 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저 그렇게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묵묵히 조직하면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부산지하철노동조합 출신 노동운동가 강한규는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이제는 건강을 회복하여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부설 노동상담소장을 맡고 있다. 부산시의회 의원을 하던 박주미는 가톨릭 센터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가 좋은 환경에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눈으로 봄으로써 나의 행복지수도 올라갔다.

    자갈치 시장서 만난 사람들

    한때 혁명을 꿈꾸는 청년이었던 이동환은 지금 박원순 변호사가 하는 ‘아름다운 가게’ 부산경남본부장이란다. 그의 혁명은 아직도 조용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동환은 1992년 민중당 후보로 부산에서 출마했다. 그 후에 오랫동안 부산 경실련 사무처장을 했다. 지난 15년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는 서울 가고 있었다.

    열렬한 ‘노빠’ 시인 노혜경, 노사모 대표인 그가 노무현의 지지층 붕괴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요즘 심사가 어떠할지 궁금했다. 그러나 어렵사리 전화로 연결된 그녀는 재작년말 서울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 반대편의, 그만큼 열렬하고 궁금한 사람,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도 창원, 서울로 강의를 다니고 있었다.

    여러 차례 출마한 전교조 선생님 박순보, 초대 민주노동당 부대표을 맡기도 했던 그는 “할 만큼 했다”는 후배들의 양해를 받으며 호텔 서울교육문화회관의 사장이 되었다. 나의 벗들 가운데 민중당 후신 진보정당추진위원회 부대표였던 김영수 목사, 부림 사건의 이상록, 대우정밀 노동조합의 이성도는 이미 세상을 떠나버렸다.

    해운대 시장과 자갈치 시장에서 만난 부산시민들은 신중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정치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삼성 재벌의 뿌리, 제일제당 공장터가 이제 54층짜리 주상 복합 건물로 바뀌고 있는 공사장에서 만난 노동자들도 역시 입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 과묵과 신중 이면에는 면전에 대 놓고 할 수 없는 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모처럼 입을 열면 부산사람 특유의 막말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상인들, 자영업자들의 불평불만은 여론을 주도하며 극단적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 증오는 대통령과 집권여당을 향하고 있었고 민주노동당은 ‘간첩당 아니냐’라는 한 마디로 무시했다. 그러면서도 카드수수료 인하운동에는 서명을 하는 재빠름도 보여주었다.

       
     ▲ 부산 자갈치 시장
     

    한 마디로 무시당하는 민주노동당

    전후세대가 들으면서 자란 노래 ‘이별의 부산 정거장’에서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 가득 찼던 산비탈에는 양옥들이 세워지고 체면을 내버리고 국제시장에서 날품을 팔고 노점상을 하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피난민들의 애환은 전설이 되고 그 손자 세대가 ‘부산국제영화제’를 뒷받침하는 관객이 되어 광복동을 메우고 있다.

    금정산을 등산하는 ‘늙은’ 부산시민들은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니 외로운 여자 아이었나?”라고 격려하는 오십대 후반, 육십대 초반 아주머니는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지혜로운 시민이었다. 그들에게 행복한 노후를 보장하는 진보정당이 있음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

    1985년, 나는 사상공단의 작은 공장에 다녔다. 아름다운 을숙도가 눈 아래 펼쳐진 엄궁동 단칸방에서 아내와 나는, 가끔 부부싸움도 했지만, 행복했다. 내 친구, 전교조의 문필이론가 정은교가 신혼여행을 하면서 우리 집에 들렀던 것도 그 때였다. 사상공단에는 여전히 매캐한 매연이 뒤덮고 있었지만 청춘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22년의 세월은 청춘의 흔적이 사라지는 데 충분한 시간이다. 잃어버린 청춘을 찾아 헤매던 나는 결국 청춘과의 아름다운 동행을 꿈꾸는 쪽으로 나아갔다.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사무실에는 청춘들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름 하여 ‘나들목’, 부산의 젊은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자유로운 소통과 대화, 토론의 네트워크라고 한다.

    여러 젊은이들과 주고받은 대화들, 간혹 그들의 치우치거나 유연치 못한 사고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지만 금방 마음이 통함을 느끼곤 했다. 모처럼 대화다운 대화를 한 것이다. 누군가와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 더욱이 젊은 세대와의 정신적 교류를 나눌 때의 즐거움은 최상의 것이다.

    신기한 게 없어지는 나이에 행복하게 사는 방법

    부산으로 나는 잃어버린 청춘을 찾으러 갔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대신에 다음 세대, 청춘과의 아름다운 동행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2500년 전에 이미 공자나 플라톤이 선생이 가장 행복한 직업임을 몸으로 입증했는데 선생이란 곧 다음 세대와 함께 놀면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늙고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세상에는 신기한 것이 없어지고 삶은 따분해지며 행복지수는 급격하게 떨어진다. 그러나 육체적 유전자와 지적, 사상적 유전자를 남기고 싶어 하는 본능을 활용하면 행복할 수 있다. 노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우리나라, 노인들의 기초생활을 보장하고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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