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왜 나이고 네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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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03일 11: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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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아이였을 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나는 왜 나이고 네가 아닌가.
    왜 나는 여기에 있으면서 저기에 있을 수 없는가.
    내가 아직 나이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는가.
    언젠가는 나란 존재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낮은 음성으로 흐르던 페터 한트케의 시입니다. ‘저게 진짜 아이의 생각이야?’라고 물을 수 없는 것은 인간 일반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제기되었을 법한 묵직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한 개인은 태어나기도 전에 저 물음에 노출되었으며, 삶에 대한 덧없음은 생명의 탄생이라는 희극 속에 은폐된 비극의 단골 주제라고 해야 할 겁니다. 개인의 우여곡절 많은 삶이란 그저 저러한 덧없음의 변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목숨의 기억』 최인석 지음, 문학동네
     

    최인석의 소설집 『목숨의 기억』에 수록된 중편들은 고스란히 저 ‘아이의 물음’과 겹쳐집니다. 소설 하나하나마다 색다른 ‘기억’이 펼쳐지되 기억의 주된 주체는 아이입니다. 아이의 목소리로 기억을 호출하거나, 어른은 아이의 시점을 기억하면서 삶의 고뇌가 단지 어른의 것만은 아님을 깨닫습니다. 아이들은, 또 아이로 되돌아간 어른은 한결같이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묻습니다. ‘하필이면 왜 살아야 하는가.’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어른 이야기를 듣노라면, 우리 기억에 아로새겨진, 그러나 이제는 희미해진 어느 시대를 떠올리게 됩니다. 엄격한 훈육이 횡행하던 시대 말입니다. 지금은 적어도 자율이 그보다 우월하다고, 강남 어느 곳에서는 자율과 토론이 ‘썩 괜찮은’ 교육 상품으로 대접받는 시대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목숨의 ‘기억들’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애어른이라기보다는 이미 지나간 애어른, 지금 어른이 된 자들의 희미한 기억 정도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이 일반으로 에둘러 말하기에는, 주인공들을 오늘날 아이들과 같이 세우기에는 가당치 않은 것이지요.

    책을 읽으며 어느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는 흠칫 놀랐지요. 그 얼굴은 제게 그리 중요한 존재도 아니고 또 기억에 남을 만한 인물도 아닌데, 불현듯 제 존재의 어느 그림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가정집에서 운영하는 ‘야매’ 피아노학원이 있었습니다. 한 동네였어요. 그 피아노 선생의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깡마른 체구에 성말라 보이는 표정의 사내였지요. 아마도 대학생이었을 겁니다. 어린 제가 보기에도 그는 약간 맛이 간 듯했습니다.

    그 집에서는 사내를 꽁꽁 감춰두었습니다. 정확한 시점은 모르겠습니다. 1979년이나 80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보다는 한참 뒤 일 같기도 합니다. 저는 그 전에 두세 건의 자살을 목격했습니다. 모두 남자였고 청년이었고 알몸이었습니다(축 늘어진 성인의 자지를 목격한 것이 처음은 아닐 텐데, 이상하게도 그 흉물은 무기력하고 슬퍼보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옥상에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묵직한 무게를 담은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위 사내의 자살을 눈앞에서 보고만 것입니다. 왜 그의 얼굴이 제 존재의 숨은 그림자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제겐 그의 얼굴이 두려웠나 봅니다. 그가 나의 미래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리라는 공포. 모르겠습니다. 과연 지금의 나는 저 얼굴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지, 그리고 나는 그와는 달리 세상에 매끈하게 적응한 것인지 불확실하기만 합니다.

    단지 목숨의 ‘기억들’은, 한 존재의 기억을 넘어서 타인의 기억에도 한 발 두 발 걸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요. 심하게 말하면, 우리는 타인과 소통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거부하고 단속하면서, 그 음습한 무의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최인석의 소설이 특정한 국면에 머물지 않고 현재성과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겁니다. 얼핏 보기에 서로 다른 존재들, 목숨들, 기억들로 보여도, 시간과 장소를 떠나 우리들 일반에 아로새겨진 것들이기에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시대와 사회의 규정 안에 있기 이전에, 이미 목숨이라고 하는 불가해한 대상 안에서 만들어진 것일 겁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똬리에 있는 것이 그것만은 아님은 나중에 밝히겠습니다.

    “죽음이라는 현상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사람의 그런 생각과 욕망으로 인해 그 격리는 더욱 가혹하다. 아니, 이런 경우 어쩌면 그 격리가 아니라 차라리 사람의 그런 특성이야말로 가혹한 것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p.9)

    「그림자들이 사라지는 곳」의 화자가 내뱉는 말입니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보다 가혹한 것은 죽음이 무엇인지 캐물으려는 인간의 욕망과 생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죽음의 의미는 선명해지기는커녕 모호해지기 마련입니다. “낱말보다 낱말 뜻풀이가 더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배운 것이 아마 그 무렵이 아니었을까.” (「목숨의 기억」 p.61)

    낱말 대신 죽음을 대입할 때 어린아이의 통찰이 가리키는 바가 분명해집니다. 죽음이라는 말은 쉬워도(죽음은 언제나 삶의 대립 항목으로만 존재할 것이므로) 죽음이라는 의미는 인간이 생사를 모두 고루 경험하지 않는 한 포착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치는 않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개념을 말하는 것은 차라리 쉬울 테지요. 동서를 막론하고 철학사에서는 그것을 쉼 없이 말해 왔으니까요. 진정 어려운 것은 자신이 경험하는 타인의 죽음, 그리고 곧이어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닥칠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소설집의 화자들이 죽음 앞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은 죽음이라고 하는 불가지론의 주제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구체적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맙니다.

    인간이 최초 죽음이라고 하는 문턱을 간접적으로나마 어렴풋하게 느끼게 될 때는 언제일까요. 아마도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면 최초 ‘혼자 남게 됐을 때’가 아닐는지요.

    “아비와 어미가 이혼을 하고, 형이 돌연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중이 되겠다고 절간으로 들어가버린 것은 그해 봄 여름 사이의 일이었다. 누나는 가을에 도망치듯 시집을 가버렸다. 그로부터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아비는 누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와 재혼을 했다. …… 어미는 눈만 뜨면 예배다, 봉사활동이다 교회로 나가버려 결국 밥을 해주는 여자를 제외하면 집에는 늘 나 혼자였다.”(「그림자들이 사라지는 곳」 p.24)

    화자가 처한 사정이 딱합니다. 심지어 교회 활동에 맹목적이던 어미는 결국 휴거를 외치며 집을 떠났습니다. 아이는 세상에 오로지 자신만이 남았다는 것을 너무도 일찍 깨닫습니다. “나는 혼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고독이니 외로움이니 하는 낯간지러운 말로는 결코 표현되지 않는, 처참하고 무섭고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감옥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p.25)

    혼자가 된다는 것은 무서운 감옥과도 같은 것이겠지요. 다만 감옥은 과연 타인과 격리되었을 때를 빗댈 은유일 뿐이던가요. “타인이 곧 지옥이다”라고 말하던 어느 철학자도 있지 않던가요. 소설집의 또 다른 아이는 서로 싸우고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를 보며 철학자의 언어보다 더 생생한 ‘타인의 지옥’을 깨닫습니다. “그놈은 부모랑 살지 않았다. 혼자 살았다. 그러니까 나는 달팽이와 살 수도 없고 달팽이 집에 들어가 살 수도 없을 것이다. 얼마나 좋을까, 달팽이는. 집을 짊어지고 다니며 혼자 살 수 있으니까.”(「달팽이가 있는 별」 p.176)

    「그림자들이 사라지는 곳」의 아이는 결국 혼자가 되었습니다. 남은 친구라곤 가족들이 남기고 간 책뿐이었어요. 책은 언제고 그의 질문에 화답했습니다. 아이가 본 삶의 부조리는 문학에 빈번하게 등장했고, 아이가 본 세상의 모순에 대해 사회과학은 국가, 민족, 가족 등의 개념은 허위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경험은 이제 의미의 문턱에 들어섭니다.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은, 전체 판에서 한 개인이 얼마나 부차적인 것인지를 일러줍니다. 아이는 이렇게 제 가족을 용서합니다.

    “그들 모두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되면서 오히려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물건이 되었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세상이란 불가해한 엉터리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일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이곳에서 산다는 일이었다. 이 처참한 고독과 슬픔과 고통을 무릅쓰고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를 나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p.26)

    아이는 관대해졌고 가족은 용서받았습니다. 책은 아이에게 부조리와 모순의 이유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움직이는 거대한 구조에 대해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이 결코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은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와 의지였습니다. 아이는 그 대답을 찾지 못합니다. 그는 결국 자살을 결행합니다.

    “죽는 길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 필요가 없었다. 산다는 노릇은 할수록 손해 보는 도박이었다.”(p.27)

    그러니 “산다는 일은 징그러웠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목숨의 기억」 p.58) 죽음을 생각하노라면 그것은 도저히 잡을 수 없는 뜬구름이건만, ‘죽지 못해 산다’ 하고, 비루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도 합니다. 죽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일상에서 금기시되는 말이지만, 삶의 궁핍합 속에서 이 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회자됩니다. 삶이 누려야 할 목적과 가치는 곰곰이 생각하기도 이전에 증발해버리고, 남는 것은 오로지 고통뿐입니다.

    도대체 산다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 절망과 슬픔, 배신과 원한, 외로움, 고통, 그런 것이 순서대로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기차를 타고 있는데, 기차가 아무리 가고 가도, 몇 십 년을 가도 내가 가고자 하는 역은 나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뭐 하러 계속해서 그 기차를 타고 있어야 하는가?”(「내 님의 당나귀」 p.234)

    죽음 앞에 선 병실의 아내를 지켜보며 화자는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맙니다. 혼자로 남겨졌을 때의 공포, 나를 억압하고 괴롭히던 타인이라는 감옥, 그 죽음과도 같은 세계에서, 오히려 이제 개인은 타인의 죽음 앞에서 목표를 상실합니다. 그들은 죽지 못해 살아온 고아들이요 노동자들이며 빈민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먹고 살겠다고 막다른 골목으로 이른 데가 하수구. 하수구 구멍을 막고 그 자리에 들어선 튀김집. 그곳에서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아내는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 아니던가요.

    “내가 순이와 함께 공들인 그 튀김집, 그리고 이제껏 악착같이 살아낸 그 세월들이 오직 무의미할 뿐이라는, 그렇게 포악을 부리며 살아서 우리가 이놈의 세상에서 건져낸 것이라고는 바로 지금 순이의 자리와 나의 자리, 이런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절망감으로, 내가 판자쪽으로 틀어막은 저 하수구에서 콸콸거리며 흘러내리던 오물처럼, 더러운 냄새와 함께 눈물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p.233~4)

    물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게 삶의 궁핍함만은 아닐 테지요. 그것을 딛고 일어서려는 자들의 의지마저 너무도 쉽게 꺾이고 맙니다. 그런 게 세상인가요. 죽음보다 더 지독한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요.

    「그림자들이 사라지는 곳」에서 아이는, 아이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할미의 죽음 뒤 꿈을 꿉니다. 할미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어서 가자니까. 거그 가면 참 좋다. 묵을 것도 많고 구경할 것도 지천이다.”(p.17) 할머니는 세상보다 저승이 좋다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아이가 깨달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지요. 아이는 에미와 애비를 찾고 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며 할미 품에서 빠져 나옵니다.

    “니 에미 애비한테 가. 실컷 살아봐라, 요놈아. 여그가 그렇게 좋은 덴 줄 아냐, 니가?”(〃) ‘실컷 살아봐라’라며, 악다구니로 살고자 하나 결국 진창에 빠질 인간의 삶을, 앞으로 아이가 겪어야만 할 숱한 날들을 할미는 저주합니다. 물론 그 저주는 인간이 인간에게 의당 갖는 연민의 정서에 바탕하는 것이겠지요.

    세상에 알 수 없는 것은 낱말 뜻풀이만이 아닙니다. 아이의 부모는 싸웠고 택시를 모는 아비는 며칠 째 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엄마의 마음은 어떻게 생겼느냐는 물음에 어미는 ‘숯검댕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제 마음의 생김새는 어떤지 도저히 알 수 없나 봐요. “나는 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달팽이가 있는 별」 p.178)

    아이가 모르는 건 아이의 마음만이 아닙니다. 또 다른 아이는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아이는 자살하러 산에 갔을 때 두 명의 같은 반 친구를 만납니다. 결국 자살 시도에 실패하여 집에 돌아와서야 그 중 한 아이가 이미 자살했음을 알게 됩니다.

    또 다른 아이는 살아 있습니다. 아이가 본 것엔 헛것과 실재가 뒤섞여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나중에 또 다른 아이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의 복장이 바로 오래 전 환상 속에서 본 바로 그 옷차림임을 알게 되면서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혼자로 남겨지고 곧 세상을 증오했으나 책을 통해 세상을 용서하게 된 아이, 그러나 결국 그 부조리함을 견디고 일어서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자살을 결행하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야 자신이 본 환상의 세계를 성찰하기에 이릅니다.

    “어쩌면 사실은 모두 나 자신, 저 가혹한 격리 너머에 존재하는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나의 그림자들, 나의 추억, 아니면 다 타버려 팍팍한 재같이 스러져버린 미래였을까.”(「그림자들이 사라지는 곳」 p.52)

    나와 같은 그들, 나일지도 모르는 그들. 나와 그들의 삶을 겹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또는 나와 타인을, 타인과 타인을 구분 짓지 못하는 최인석 소설집 등장인물들의 착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내 각시 데려갈라고요.” “집에 가자, 순기야.”(「달팽이가 있는 별」 p.199) 정신이 반쯤 나간 영득이는 동네에 새로 시집 온 각시를 자기 각시라 믿습니다. 영득은 스스로 결혼한 적이 있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믿지 않았어요. 저런 얼빠진 인간이 결혼했을 리가 없으니까.

    소설은 그가 실연당한 아무런 이유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단지 영득이는 미쳤을 뿐이고 미친 남자를 여자는 용납할 수 없어 버린 것으로 추정될 뿐입니다. 「목숨의 기억」의 아이는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었습니다. 아이는 할애비와 할미를 아비와 어미로 부르며 자랐어요.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치매에 걸린 할애비는 아이더러 아비라고 부릅니다.

    꽃을 따달라고 조른 아이에게 꽃을 따달라고 응석부리며, 자전거를 가르쳐 준 할애비가 자전거를 태워달라고 조릅니다. “그렇게 나는 할애비의 치매 속에서, 그의 아비가 되었다. 또한, 나와 할미는, 역시 할애비의 치매 속에서, 부부가 되었다.”(p.73)

    아이는 어릴 때 찾아온 여자를 생모라고 굳게 믿기도 합니다. 생모는 그에게 여성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한 최초의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는 나중에 몽정 속에서 어미를 꿈꿉니다. “그렇게 그녀는 손님으로 나타나, 염병할 여편네가 되었다가, 나의 어미가 되었다가, 나의 연인이 되었다. 나는 궁금했다. 다음에 만날 때 그녀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p.64)

    나중에는 아비의 친구라고 알던 작곡가를 아비라 믿게 되었다가, 다시 작곡가는 그 친구가 아니라 아비였음을 그 친구에게서 듣게 됩니다. “나는 더 깊은 혼란에 빠졌다. …… 도대체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아비인가, 빵떡모자 뺑덕 아저씨인가?”(p.101~2)라며 자포자기 심정에 빠집니다.

    아이의 혼란은 기실 원죄와도 같은 것임이 나중에야 밝혀집니다. 간첩이 아비의 친구인지 제 아비인지, 할애비 또한 혁명의 일원이었는지 아닌지, 어미로 믿고 있던 여자가 생모인지 공작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들은 내가 아니고 저기 언저리쯤 있는 막연한 존재들이요, 나는 나만이 아니요 어느 순간 그들 속에 나로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일까요. 혹여 이것은 대한민국 ‘자아의 역사’인 것입니까.

    어쨌든 묻게 됩니다. 혼란은 존재 자체에서 오는 것인가요, 존재가 딛고 있는 땅 위 세상에서 온 것인가요.

    고아끼리 외롭지나 않게 살아보자며 결합한 부부는 하수구 구멍 위에 튀김집을 차렸습니다. “하수구 냄새?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수구 냄새가 더 지독한지, 돈 냄새가 더 지독한지 한번 두고 보자, 하는 심산이었다.”(「내 님의 당나귀」 p.227)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더 지독한 것은 하수구 냄새였을 뿐. 그들이 겨우 돈을 만진 것은 유효기간이 지난 재료를 사용하면서부터였습니다. 튀김을 잘못 먹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 여자에게 화자는 모진 언어 폭력을 휘두릅니다.

    “그때 누군가가 여보,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가 거기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순이를 발견했다. 당신이야? 당신 맞아? …… 터덜터덜 가게로 돌아오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p.242~3)

    그제서야 그들은 돈 냄새를 알게 되고 작은 집한 채를 장만하게 됩니다. “과연 돈 냄새는 하수구 냄새보다 지독했다.”(p.230)

    이처럼 최인석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존재 혼동은 부조리함으로 가득한 세상에 기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화자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을 겪고 또 그것을 통찰합니다. 이런 암울한 세계에서 영득이와 아이의 관계로 대변되는 동화적 세계는 그것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현실과 대비되어 환상으로 남게 되겠지요.

    “그렇게 함부로 아무거나 던지면 안 돼. 말하는 돌멩이를 골라야 하는 거야. 가만 귀 기울여 들어봐. 그러면 말소리가 들려. 작지만 분명히 뭐라고 뭐라고 속삭인다니까. 그런 걸 골라두었다가 저녁 무렵에,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 하늘로 던지는 거야. 그러면 그게 금방 별이 되어 반짝이는 게 보여.”(「달팽이가 있는 별」 p.196)

    아이는 이미 그것이 환상임을 압니다. 별이 되는 돌멩이란 세상에 없으니까요. 아니 아이가 아는 돌멩이란 우주에 던져져서는 안 될 더러운 것들뿐이니까요. “나는 돌멩이를 찾아 귀에 가져다 열심히 들어보았다.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아버지 어머니가 밤새 다투던 지긋지긋한 소리뿐이었다. 이건 아니다. 나는 땅바닥에 돌멩이를 내던졌다. 이런 것이 별이 되었다가는 우주가 싸움터가 되고 말 것이다.”(p.196) 아비의 고발로 영득이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음을 알게 되기 전부터 아이는 알고 있었을 겝니다.

    “지금만이 아니다 여기만이 아니다 언젠가 언젠가 저기 저 너머 내가 살 곳 내 꿈이 살아 있는 곳…….”(「목숨의 기억」 p.92)

    아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노래. 이 불행한 가족사만큼 저 노랫말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심지어 장기수가 되었다가 늘그막에 풀려나온 아비의 친구는 오래 간직해온 신념조차 회의하기에 이릅니다.

    “거기 있는 게 정말 내 자식인지, 내 마눈란지…… 잘 모르겠다. 저 공화국이 정말 내 공화국인지, 내가 그리워한 그 나란지 모르겠어. 이놈의 데도 그놈의 데도 캄캄하긴 마찬가지 아니냐. 니 애비 노래대로, 여그가 다가 아니다. 지금이 다가 아니여. 이런 게 다라면 어디 사람 맥 풀려 살겄냐. 안 되지, 이런 게 다여서는 절대 안 되는 거여.”(p.102~3)

    아이의 입과 기억을 빌려 최인석은, 남루한 현실의 기원이 되는 과거조차 오늘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가히 비극적 성장소설이라 할 만합니다. 다만 최인석의 소설이 한 시대의 후일담에 그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무엇보다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물음에서 인간이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히 설명된 것은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에 고통 받는 인간들을 반복하여 생생하게 그려냈기에, 시간을 달리하여 사는 우리가, 또는 겉치레나마 풍요로움을 걸치고 있는 오늘의 우리가 이 책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건 아닐는지요. 어쩌면 우리는 저 너절한 주인공들과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세련된 존재라 하더라도, 저들의 낮은 그림자가 우리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 존재 어느 끝엔가 달랑달랑 매달려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세상의 이치가 언젠가는 송두리째 우리 자신을 배반하리라는, 그 두려움 때문은 아닐까요. 때문에 소설집의 비극적 세계관은 매우 현실성을 띱니다. 독자는 소설을 통해 지나간 시대를 반추하며, 나아가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묻게 됩니다. 최인석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결국 세상의 막다른 골목뿐이란 말인가요. 목숨의 ‘기억들’이란 그저 죽음의 형상들일 뿐인 걸까요. 여기서 「내 님의 당나귀」 화자의 성찰은 그것이 아님을 방증합니다. 화자는, 역겨운 세상보다 더 역겨운 것은 세상에서 자신을 온전히 지켜내지 못한 데 있다고 말합니다.

    “내 아내가 고아였는지 아니었는지도 모르고, 순이 아비가 정말 순이 아비였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하수구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하수구에서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요, 죽을 것이다. …… 하수구 구멍 따위가 새삼 역겨울 것이 무엇이랴. 가장 역겨운 것은 나 자신, 이놈의 누추한 연명이 아니냐. …… 갈 곳은 여전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이냐.”(p.257)

    아무리 세상 자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한들, 여전히 현실을 견뎌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려는 듯합니다. 인간에겐 여전히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현실 대척에 선 아름다운 유토피아를 고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요컨대 작가는 과감히 세상을 작두질하지 못합니다. 유토피아를 말하는 순간 세상은 이미 도마 위에서 싹둑싹둑 재단된 이후일 테니까요.

    다만, 이 디스포피아에 가까운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 것, 적어도 그 현실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는 인간의 벼랑 끝 의지를 그려낸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할 수 있지는 않을는지요. 아래의 인용을 보자면, 최인석은, 질기게 살아남는 생존의 의지만이 반복하여 영원히 회귀하는 것이라고, 또는 그것만이 대대로 물려주고 지켜야 할 인간의 가치가 아니냐고 조심스레 묻는 것은 아닌지요.

    더 나아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조용한 읊조림은 아닐는지요. 그 목소리가 비록 처연하게 들리지만 말입니다. 슬프고 비정하되, 또는 맹목적이며 투명한 미래를 약속하지 않되 그것은 진실에 가깝습니다. 진실은 이렇게나마 읽는 이를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를 문학이 표현할 수 있는 진실의 바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유한하지만 그 꿈은 무한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은 때가 되면 사라지지만, 그가 꾼 꿈은, 그것이 아름답고 지극한 것이라면, 결코 사라지지 않아, 꽃씨처럼. 또다른 자리에, 또다른 사람의 가슴에 떨어지고, 그렇게 꿈으로, 꿈으로 이어지다가 언젠가는 피어나는 것 아닐까.”(「목숨의 기억」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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