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래와 투쟁과 토론의 기록들
        2007년 02월 03일 10: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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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기타와 청바지는 세계적인 유행이었다. 시기의 차이는 있어도 60~70년대 여러 나라 청년문화의 공통된 유산이었다. 지금에서 돌아보면 장발과, 기타와 싸구려 맥주집의 어두운 공기들이 모두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근사하고 서구적인 것들로 인식됐다.

    어느 나라에서든 이 낡은 청년문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68년 5월 파리의 바리케이트 안쪽에 있었던 이유는 절반은 혁명은 위해, 절반은 그래야 여자친구에게 멋지게 보이기 때문이었다는 ‘혁명가’들의 자기 고백은 그래서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모던 포크운동도 60년대 중반 대학을 근거지로 해서 시작됐다. 1966년 도쿄에서 공연을 한 비틀즈의 영향을 보다 직접적으로 받은 이들은 ‘그룹사운드’로 나아갔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 특정한 신분계층을 이루고 있던 대학생들은 보다 지적이면서도 ‘모던’하고 ‘쿨’한 이미지를 추구했다.

    물론 그 시작은 밥 딜런이나 ‘피터 폴 앤 메리’ 같은 미국의 모던포크 아티스트들을 모방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히피문화에 대한 동경과 모방에서 출발한 포크가 흔들리는 사회분위기와 결합해 급진화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리네 통기타 문화에서 ‘반골’의 냄새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면 일본의 포크는 그보다 더 정도가 심했다. 시대가 달랐으니까. 우리에게 60~70년대가 억압의 시대였다면 그네들에게는 혁명의 시기였다. 그래서 일본의 모던포크는 우리네 통기타 문화에 80년대 대학가의 민중가요나 노래패를 더한 역할을 했다.

    포크를 지향한 모든 음악인들이 정치적이지는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당시 일본 포크운동을 설명할 때 반드시 따라붙는 수식어는 ‘반체제포크’다.

    반체제 포크의 중요한 사건들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69년 2월, URC레이블의 설립이다. 일본 인디레이블의 시초가 되는 URC는 언더그라운드 레코드 클럽의 줄임말로 시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회원제 방식으로 음반을 배포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어차피 메이저 음반사를 통해서는 음반제작을 기대하기 어렵고, 자유로운 창작을 위해 자주제작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반체제 포크의 가사는 항상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기 때문에 실제 대형 레코드 회사와 계약을 하더라도 레코드협회의 자율규정이라는 검열 아닌 검열로 제대로 된 활동을 하기 어려웠다. URC가 오사카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레이블을 중심으로 한 반체제 포크는 칸사이포크라고도 불린다.

    포크 붐이 잦아들면서 70년대 중반 URC도 문을 닫았다. 그리고 버블의 80년대를 거치면서 혁명에 관한 모든 기억이 분서갱유 당할 때 반체제의 노래들도 모두 기억 속에 매장됐다.

    * * *

       
    URC スーパー・ベスト!
    2006년
    1 風をあつめて – はっぴいえんど 
    2 プカプカ(みなみの不演不唱) – ザ・ディランII 
    3 自衛隊に入ろう – 高田渡 
    4 サルビアの花 – 早川義夫 
    5 一本道 – 友部正人 
    6 遠い世界に – 五つの赤い風船 
    7 夢は夜ひらく – 三上寛 
    8 夕暮 – 六文銭 
    9 腰まで泥まみれ – 中川五郎 
    10 悩み多き者よ – 斉藤哲夫 
    11 夜汽車のブルース – 遠藤健司 
    12 時にまかせて – 金延幸子 
    13 悲惨な戦い – なぎらけんいち 
    14 イムジン河 – ザ・フォーク・クルセダーズ 
    15 教訓I – 加川良

    잊혀졌던 URC의 녹음들은 2002년 신쿄뮤직과 에이벡스 레이블이 발매권을 획득하면서 복각되기 시작했다. 이를 전후해 다른 음반사를 통해 발표했던 그 시절의 명작들도 다시 시장에 선을 보이고 관련 서적이 줄이어 출간되면서 포크 재발견 붐이 일어났다.

    한국의 7080마케팅과 배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전공투세대들이 정년퇴직을 맞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다가 젊은 시절 열정을 바쳤던 노래에 대한 향수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낸 것이다. 굳이 일본과 한국의 ‘리바이벌붐’의 차이를 짚어내자면 일본 쪽이 훨씬 나이가 많고 구매력이 크다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음악 자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한국의 통기타가 정권의 탄압 때문이었건 의식의 한계 때문이었건 간에 저항의 분위기 정도에서 그쳤다면 일본의 모던포크는 직설적인 저항의 수단이었다.

    2006년 말 발표된 CD "URC 슈퍼베스트(URC スーパー・ベスト! )"는 옛 URC 음원들의 복각 작업의 완료와 함께 이 레이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노래 15곡을 모은 교과서적인 성격의 앨범이다.

    아무래도 음반의 성격상 요시다 타쿠로 처럼 일본 포크 운동의 중요한 기둥이지만 URC레이블과는 인연이 없었던 사람들의 작품이 실려 있지 않기 때문에 이 한 장으로 반체제 포크의 모든 것을 맛볼 수는 없다. 그러나 흔들리는 시대의 음악이 어떠했는지를 뒤늦게 체험하기는 부족함이 없다.

    첫 곡인 해피엔드はっぴいえんど의 ‘바람을 채워風をあつめて’는 이 4인조 밴드의 두 번째 앨범(71년)에서 선택됐다. 64년 도쿄올림픽으로 인해 변한 도시의 풍경을 ‘카제마치’라는 가상의 도시에 옮겨 노래한 앨범으로 서울올림픽을 위해 변두리로 내몰린 도시서민들을 노래했던 정태춘의 정서를 떠올리면 적합할 것 같다. 그러나 노래의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밴드인 만큼 단순한 구성의 화음이 아니라 크로스비, 스틸즈 앤 내쉬 같은 미국 포크 록의 여향이 강하게 읽혀지는 음악을 들려준다.

    이 노래가 수록된 해피엔드의 두 번째 앨범(“카제마치로망風街ろまん”)은 일본어로 된 록의 효시, 혹은 최고의 성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또한 ‘바람을 채워’는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 사용되면서 발표된 지 30여년 만에 세계인들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뻐끔뻐끔プカプカ’을 부른 딜런IIザ・ディランII는 오사카의 유명한 포크 클럽 “딜런”에서 활동한 팀이다. ‘다방’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이 클럽의 이름은 밥 딜런에서 따온 것이다. 70년대 중반 문을 닫을 때까지 포크뮤지션들의 교류와 각종 공연장소로 애용된 명소다.

    다카다 와타루高田渡의 ‘자위대에 들어갑시다自衛隊に入ろう’는 60년대 일본 반전가요의 최대의 성과다. 일본인들이 반체제포크라는 말을 듣거나 그 시절을 떠올릴 때 연상하는 대여섯 곡들 중에 하나가 이 노래다. 다카타 와타루 자신의 입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집회에서 셀 수 없이 불려졌던 노래기 때문이다.

    가사는 반어적인 표현으로 남자 중의 남자는 일본을 지키기 위해 자위대에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인데 이 가사를 곧이곧대로 이해한 자위대 측에서 자위대 홍보광고에 사용하자고 제안했던 일화가 있다.

    토모베 마사토友部正人는 URC 레이블을 대표했던 가수 중의 한명이다. 데뷔하기 전 학생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는 투쟁의 시기뿐만 아니라 투쟁이 막을 내린 시대의 감성까지도 자기 음악의 중심으로 놓았다. 훗날 일본의 밥 딜런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다섯 개의 붉은 풍선이라는 뜻의 이츠츠노아카이후센五つの赤い風船은 혼성포크그룹이다. 이름도 그렇지만 이 음반에 수록된 ‘먼 세계에遠い世界に’라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우리네 대학가요제의 전형적인 입선작들이 떠오른다. 미국의 것을 수입했지만 그것을 아시아인의 감수성으로 다듬은 손길이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이어지는 미카미 칸三上寛의 노래 ‘꿈은 밤을 연다夢は夜ひらく’는 일본의 유명한 엔카를 패러디한 것이다. 노래말에는 사르트르와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신좌익들의 상징과도 같았던 심야상영의 야쿠자영화와 애니메이션 ‘내일의 죠’가 등장해 그 시대의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다.

    나카가와 고로中川五郎는 프로테스트송의 대부라고 불릴 만큼 정력적으로 반전운동에 참여했던 가수다. 이 음반에 실린 ‘허리까지 흙투성이腰まで泥まみれ’도 피트 시거의 원곡을 번안한 반전가요다. 진흙수렁이 깊어진 줄 모르고 병사들에게 무조건 건너라고 압박하던 대장이 결국 수렁 속에 빠져 죽는다는 내용으로 날이 갈수록 베트남이라는 수렁 속에 빠져드는 미군의 처지를 풍자한 것이다. 미군이 똑같은 짓을 이라크에서 되풀이하면서 이 옛 노래를 새롭게 하고 있다.

       

    ▲ 70년을 전후해 도쿄 신주쿠역에서는 주말마다 포크게릴라라는 이름의 반전집회가 열렸다. 우리의 촛불집회와 비슷한 성격이지만 단순히 변조된 집회가 아니라 문화와 정치를 결합시킨 성공적인 사례였다.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노래를 부르고 연설을 듣는 이 집회는 일본 신좌익운동의 상징이 됐다.

    엔도 켄지遠藤賢司는 지금도 큰 인기를 얻으면서 활동을 계속 하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록커다. 보통 엔켄이라고도 불리는 그에게 일본인들이 붙여준 애칭은 ‘불멸의 남자’다. 데뷔 40주년을 코앞에 두고 있는 그는 지난 달 60~70년대 공연활동을 10장의 CD에 정리해 발표하기도 했다.

    1970년에 발표한 ‘밤기차의 블루스夜汽車のブルース’는 지금도 그가 무대에서 빼놓지 않고 부르는 노래다. 참고로 그는 국내에서도 인기를 얻은 만화 <20세기 소년>의 주인공 켄지의 모델이기도 하다.

    카네노부 사치코金延幸子는 이 음반의 유일한 여성가수다. 당시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싱어송라이터였던 카네노부는 쥬디 콜린즈나 양희은 같은 전형적인 ‘예쁜 목소리로 노래하는’ 포크가수다. 카네노부는 해피엔드와 함께 URC에 소속된 아티스트들 중에서 이념적인 측면보다 음악적인 측면을 대표하는 가수였다. 1972년 한 해 동안의 짧은 활동을 통해 대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채 도미했던 그는 90년대 초반 다시 일본 음악계에 복귀했다.

    나기라 켄이치なぎら健壱도 카네노부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정치적인 주제를 노래했던 아티스트는 아니다. 코믹한 분위기의 노래로 항상 무대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능력을 보여줬던 그는 배우로도 이름을 날렸다. ‘비참한 싸움悲惨な戦い’은 일보의 국기로 신성시되는 국기관에서의 스모를 신랄하게 비꼰 노래로 포크로는 드물게 히트차트에도 오를 정도로 인기를 얻었지만 스모와 국영방송인 NHK를 욕보였다는 이유로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에도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방송에서는 90년대 후반 들어서야 해금됐다.

    지난해 국내 개봉했던 영화 <박치기>를 통해 널리 알려진 노래 ‘임진강イムジン河’도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던 초기 포크곡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 노래가 발매정지와 방송금지 처분을 당한 것은 일본인들의 술수 때문이 아니라 남한과 북한, 그리고 이들을 대리한 조총련과 민단의 알력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해야 영화 <박치기>에서 방송국의 제제에도 불구하고 라디오를 통해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단순히 일본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 재일한인․조선인을 포기하거나 이용한 남한과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를 함께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속에 삽입된 임진강은 포크 크루세이더ザ・フォーク・クルセダーズ의 원곡이지만 이 음반에 수록된 것은 1968년 10월 오사카에서 열린 포크 크루세이더스의 마지막 공연 실황녹음이다. 원곡과 달리 실황은 한글 가사로 시작해 노래의 배경을 설명한고 일본어 가사로 넘어간다. 이 녹음은 포크 재발견 붐을 타고 공연 35년만인 2003년에야 음반으로 제작됐다.

    * * *

    물론 이 음반의 주된 용도는 지나간 시대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품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다른 의미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에게 60~70년대의 일본포크는 공식적으로 접근이 차단된 금단의 영역이었다. 김대중 정권이 일본문화를 개방하기 이전까지 일본어로 된 노래는 그것이 체제의 것이든 반체제를 지향하든 무조건 금지됐었다.

    그러나 ‘해금’이후에도 단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최근에는 한류라는 현상에 대해 반성적으로 되돌아봐야 한다는 의견도 대두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한류가 양방향이 아니라 일방적인 흐름이었다면 그건 상품의 유통이지 문화의 교류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흐름에서 우리는 미래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 앨범은 아직 국내에 수입되거나 발매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우리들에게도 소개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일본인들이 이런 음반을 기획할 때 단순히 추억을 더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세대 간의 대화라는 희망 섞인 바램도 담았다면, 민족 간의 대화라는 희망도 꿈꿔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는 과거의 재발견이라면 우리에게는 일본의 재발견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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