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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단고기의 '환화'가
    무궁화를 뜻하는 거라고?
    [푸른솔의 식물생태] 왜곡와 허구들
        2022년 08월 23일 01: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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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이 다소 길지만, 필자가 나누지 말고 한 번에 게재해달라고 요청하여 나누지 않고 올린다. 길지만 의미 있고 중요한 문제제기, 무궁화만의 문제가 아닌 의미를 담고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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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글을 시작하며

    무궁화(Hibiscus syriacus)에 대한 글을 블로그나 기타 여러 곳에 쓰기 시작하면서 몇몇 분들이 무궁화의 역사적 내력으로 고조선과 그 이전에 우리 민족(?)이 세웠다는 환국(桓國) 때부터 무궁화가 국화(國花, 나라꽃)이었다는 주장이 실린 글을 댓글이나 메시지 등으로 보내 주었다.

    인터넷이나 무궁화 관련 서적에도 이런 내용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무궁화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살피면서 신시시대와 고조선에서부터 무궁화가 겨레의 꽃 또는 나라꽃이었다거나 우리 민족과 관련을 맺어 왔다는 식이다. 그러한 주장은 근거로서 대개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구성 부분인 『태백일사』와 『단군세기』에 기록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으며 때로는 이와 비슷한 성격의 『단기고사』나 『규원사화』 등을 들기도 한다.

    『환단고기』를 비롯하여 언급된 문헌들 모두는 최근에 지어졌음에도 마치 오래 전의 문헌인 것처럼 저술 연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었다는 위서(僞書) 논란에서 자유스럽지 않다. 설령 그 서적들이 진서(眞書)라고 하더라도 『환단고기』에는 환화(桓花)와 천지화(天指花)를 무궁화로 기록한 적이 없다. 만의 하나 『환단고기』를 추종하는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환화와 천지화가 무궁화라면 이는 무궁화의 생태적 특성에도 맞지 않고 우리 민족이 기록한 옛 역사서에 반하는 내용이며 나아가 거꾸로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점을 드러내어 줄 뿐이다.

    무궁화는 무궁화다. 식물이고 꽃이다. 다른 어떠한 것도 회색일 뿐이며, 그에 맞게 있는 그대로 푸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만이 무궁화가 우리 민족과 맺어 온 역사를 제대로 설명하고 무궁화와 맺어 나갈 미래이기도 하다. 이글은 『환단고기』가 위서인가 아니면 진서인가라는 논란을 해결하는 것에 중점이 있지 않다. 그것이 진서라고 가정하더라도 식물 무궁화를 기록한 바가 없으며 그렇게 해석될 수도 없다는 점에 대해 논할 것이다.

    * 『환단고기』도 단일하지 않고 여러 판본들이 있다. 아래에서는 편의상 널리 보급되어 읽히고 있는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상생출판(2011)을 기준으로 살피기로 한다.

    <사진> 무궁화 ‘단심'(Hibiscus syriacus ‘Tanshim’)

    Ⅱ. 『환단고기』와 그것에 기록된 환화(桓花)의 내용

    1. 『환단고기』란?

    『환단고기』는 아래의 4개의 책을 묶어 편찬하였다고 한다.

    – 『삼성기』 : 안함로(579~640)와 원동중(?~?)이 각각 ‘상’과 ‘하’를 지었다고 주장되고 있으며, 기원전 7197년에 건립되어 환인으로 불리는 왕이 다스린 3301년 동안의 환국의 역사와 그 이후의 환웅이라 불리는 왕이 다스린 1565년 동안의 배달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음

    -『단군세기』: 고려 말의 행촌 이암(1297~1363)이 1363년에 지었다고 주장되고 있으며, 47대의 단군이 2000여년 동안을 다스린 고조선의 역사를 다루고 있음.

    -『북부여기』: 고려 말의 범장(복애거사, ?~?)이 지었다고 주장되고 있으며,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 6명의 왕에 대한 역사를 다루고 있음.

    -『태백일사』: 조선 초기의 문신 이맥(1455~1528)이 1520년에 지었다고 주장되고 있으며, 환국, 배달국, 삼한, 고구려, 발해 및 고려의 역사를 다루고 있음.

    『환단고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계연수(桂延壽, 1864~1921)가 1911년에 자신이 수집한 문헌 5권을 하나로 묶어 『환단고기』를 스승 이기(1848~1909)의 감수를 거쳐 출간하였는데 그중 1부가 당시 14세이던 이유립(李裕岦, 1907~1986)에게 전해져 보관해 오다가 1979년에 영인본으로 출판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유립이 보관하던 1911년판 『환단고기』는 집세가 밀리자 집주인이 팔아버리는 바람에 원본은 사라졌고 1949년에 오형기라는 사람의 필사본으로 1979년에 영인본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환단고기』는 신석기 시대로 이제 막 농경이 시작되어 보급되던 기원전 7197년경에 동북아, 중국 및 중앙아시아 지역에 걸친 대제국이 존재했었다는 비과학적 내용에다가 서구 문화가 도입된 이후에 번역된 세계(world), 인류(human), 국가(nation), 권리(right), 산업(industry), 공화(republic), 유신(reformation), 문명(civilization), 개화(civilize), 문화(culture) 등과 같은 현대적 단어가 고문헌이라 주장된 곳에서 자주 등장하고, 작성된 시대의 문헌의 원본이 없을 뿐만 아니라 1911년 출간된 간행본도 없이 필사본의 영인본만 존재하며, 이유립이 작성한 1960~1970년대의 논문에는 『환단고기』에 기록된 내용과 상당히 다른 역사적 내용이 주장되는 등을 이유로, 이유립이 1979년 출간 직전에 태백교(커발한교)의 경전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작한 위서(僞書)라고 보는 것이 현재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일식과 오성취루 현상 등의 천문학을 이용하여 그 내용의 진위를 설명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그러한 내용도 『환단고기』의 진서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고 그 과정에서 증산교 등에서 내용을 수용하는 등 역사서라기 보다는 종교 서적의 색채가 강하게 띄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점에 대해서는 나무위키의 ‘환단고기’ 부분과 이문영, 『유사역사학 비판(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 역사비평사(2018)가 참고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앞서 밝혔듯이 『환단고기』에 기록된 ‘환화’가 무궁화인지 여부를 밝히는데 주안점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저술되었다고 주장된 시대에서 저술되거나 편찬된 진서(眞書)라고 가정하고 논의를 해보기로 한다.

    2. 『환단고기』의 환화에 대한 기록

    『환단고기』에서 무궁화을 일컫었다고 주장되는 ‘환화’ 또는 환화를 지칭한 것이라는 ‘천지화’가 기록된 것은 아래의 5곳에 걸쳐 있다,

    (1) 『태백일사』 중 ‘환국본기’의 환화

    衆自相環舞 仍以推桓人 座於桓花之下積石之上 羅拜之 山呼聲溢 歸者如市

    [번역] 이때에 만방의 백성이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와서 모인 자가 수만명이 되었고, 서로 둥글게 모여 춤을 추며 환인을 추대했다. 환인께서 환화(桓花 무궁화)* 아래에 돌을 쌓고 그 위에 앉으시니 모두 늘어서서 절을 하였다. 기뻐하는 소리가 온 산에 가득하고, 귀화해 오는 자들이 저자를 이루었다.

    * 환화 桓花 : 환화는 환국 시대부터 국화 國花였다. 천지화 天指花라고도 했는데 지금의 무궁화 또는 진달래로 본다. 이유립은 환화를 진달래라 했다.

    (2) 『단군세기』의 환화[1]

    五世檀君 丘乙 在位十六年..(중략)…丁丑十六年 親幸藏唐京 封築三神壇 多植桓花

    [번역]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중략)…재위 16년 정축(단기 250, BCE 2084)년, 임금께서 친히 장당경에 순행하여 삼신단三神壇을 봉축하시고 환화桓花24)를 많이 심으셨다.

    24) 환화는 환국 시대의 국화國花였다. 천지화天指花라고도 했는데, 지금의 무궁화이다….(중략)…환화를 진달래로 보는 견해도 있다.

    (3) 『단군세기』의 환화[2]

    十一世檀君 道亥 在位五十七年..(중략)…奉天帝桓雄遺像而安之 頭上光彩閃閃 如大日有圓光 照耀宇宙 坐於檀樹之下桓花之上

    [번역] 11세 단군 도해 재위 57년…(중략)…(재위 원년인 경인 환기 5,307, 신시개천 2007, 단기 443, BCE 1891) 천제 환웅의 유상遺像을 받들어 모시니 머리 위에 광채가 찬란하여 마치 태양이 온 우주를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았다. 신단수 아래 환화桓花 위에 앉아 계셨다.

    * 환화桓花 : 무궁화 꽃, 훈화초薰華草 또는 목근지화木槿之花라 했다(『산해경』「해외동경」) 미주 24)번 참조.

    (4) 『단군세기』의 천지화

    十三世檀君 屹達一云代音達 在位六十一年..(중략)…戊戌二十 多設蘇塗 植天指花 使未婚子弟 讀書習射 號爲國子郞 國子郞 出行 頭揷天指花 故時人稱爲天指花郞

    [번역] 13세 단군 흘달(일명 대음달) 재위 61년…(중략)…재위 20년 무술(단기 571, BCE 1763)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으셨다. 미혼 소년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셨다. 국자랑이 밖에 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기 때문에 당시에 사람들이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 불렀다.

    * 天指花 : 환국의 국화國花인 환화桓花. 지금의 무궁화로 국자랑이 이 꽃을 머리에 꽂고 다녔으므로 화랑花郞 또는 천지화랑이라 하였다.

    (5) 『단군세기』의 환화[3]

    十六世檀君 尉那 在位五十八年..(중략)…五日大宴 與衆 明燈守夜 唱經踏庭 一邊列炬 一邊環舞 齊唱愛桓歌 愛桓 卽古神歌之類也 先人指桓花而不名 直曰花 愛桓之歌 有云

    山有花 山有花
    去年種萬樹 今年種萬樹
    春來不咸花萬紅
    有事天神太平

    [번역] 16세 단군 위나 재위 58년…(중략)…5일간 큰 연회를 베풀어 백성과 함께 불을 밝히고 밤을 새워 「천부경」을 노래하며 마당밟기를 하셨다. 한쪽에 횃불을 줄지어 밝히고 다른 쪽에서 둥굴게 춤을 추며 「애환가愛桓歌(한화를 사랑하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애환가」는 고신가古神歌의 한 종류이다. 옛사람들은 환화를 가리켜 이름을 짓지 않고 그냥 꽃이라 하였다. 애환가에 전하는 가사가 있으니 이러하다.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지난해 만그루 심고 올해도 만그루 심었어라.

    봄이 찾아와 불함산 꽃이 온통 붉으니

    상제님 섬기고 태평세월 즐겨 보세.

    3. 소결론

    『환단고기』의 환화가 기록된 내용 중 『태백일사』의 환화는 고조선 이전의 즉 신시시대의 환국이라는 국가가 성립하였던 기원전 7197년의 기록이라고 하고, 『단군세기』의 환화 또는 천지화는 단군이 통치하였다고 언급된 고조선 시대에 대한 기록이라고 한다.

    Ⅲ. 『환단고기』의 환화가 무궁화인지 여부에 대한 검토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고 가정해도 『환단고기』의 환화와 천지화를 무궁화라고 보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1. 환화가 무궁화인지 여부에 대한 검토

    (1) 환단고기』의 기록에 대한 검토; 무궁화를 기록한 바 없음

    가장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환단고기』라고 주장된 원래 글에는 무궁화가 기록된 바가 없다. 즉, ‘桓花'(환화). ‘愛桓歌'(애환가)라는 명칭만 보일 뿐 그 어디에도 무궁화를 기록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것을 번역(또는 해설)한 사람이 환화를 무궁화라고 주장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를 보급하여 대중화시켰다고 주장되고 있는 이유립은 오히려 환화가 진달래(Rhododendron mucronulatum)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의 대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화가 무궁화라고 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일부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무궁화에 대한 민족 전체의 문화와 인식을 특정한 종교 또는 경향의 것으로 바꾸어 버릴 위험성이 있다. 예를 들어 환화를 무궁화라고 주장하고 있는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의 역자 안경전은 현재 증산도의 교주이다.

    (2) 『환단고기』의 환화를 무궁화로 보는 견해의 근거에 대한 검토; 합리적인 근거가 없음.

    『환단고기』의 환화를 무궁화라고 주장하고 있는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에는 그 근거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있다. 그나마 본문 198쪽의 각주 24)가 근거라면 근거이다. 여기에는 (i) 환화는 환국 시대의 국화(國花)였다는 또 다른 주장과 (ii) 주로 고대 중국인들 신화적 상상을 엮은 『산해경』의 「해외동경」편 중에서 ‘君子國'(군자국)에 훈화초(薰華草)가 있다고 기록되었는데 진나라 때의 곽박이 훈을 ‘근’으로 보기도 했던 점(薰 或作菫)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198쪽의 각주의 논의는 환화가 무궁화라는 주장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 근거도 되지 못한다. 먼저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7197년에 환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있었고 그 제국에 국가 간 대립의 산물로 등장하는 국화(나라꽃)라는 관념이 있었다는 설정도 황당하지만 가사 국화라는 관념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환단고기』 그 어디에도 환화가 무궁화라고 기록된 바는 앞서 살핀 바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순환논법으로 환화가 무궁화이고 환화는 환국에서부터 국화이었다는 주장이 되풀이 되고 있을 뿐이다.

    다음으로 『산해경』의 「해외동경」편의 군자국에 있었다는 훈화초를 환화가 무궁화라는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지만 불행히도 『산해경』은 실제하는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사고전서를 편찬할 때 ‘百不一眞'(백가지 일 중에 단 하나도 진실이 없다)라고 언급한 바처럼 그 주된 성격은 신화적 내용을 가진 소설류로 분류되는 서적이다. 가사 그것에 지리적 요소가 있다고 해도 「해외동경」편의 군자국은 우리나라를 지칭한 것이 아니다. 『산해경』의 「해내경」편에 고조선으로 추정되는 ‘朝鮮'(조선)이라는 나라가 별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라가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중국의 문화를 수입하였고 그 즈음에 유학이 전래되면서 ‘군자국'(또는 군자지국)이라는 명칭으로 인해 그것이 우리나라를 지칭한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그 이후 그러한 인식이 이어져 왔지만, 이는 환국이나 고조선보다 훨씬 후대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것을 근거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실제로 군자국이 실존했고 그것이 곧 우리나라를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중 ‘해제’의 151쪽에 따르면 환국은 중앙아시아의 천산(天山, 파내류산)에 중심지를 두었다고 하는데, 해외동경 즉, 바다 바깥이 동쪽의 수도가 중앙아시아의 천산이라면 『산해경』이 쓰인 지역은 영국이나 아메리카 대륙이 된다는 황당한 결과가 된다.

    게다가 『산해경』의 훈화초의 ‘薰'(훈)을 菫(근)의 뜻으로 해석하여 이를 무궁화로 인식한 것은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의 곽박(郭璞, 276~324)이 저술한 『산해경주』에서 비롯한 것으로 기원후 4세기경의 일이었다. 기원후 4세기 때의 중국인의 해석에 기반하여 시대를 무려 7600여년이나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7197년에 있었다고 주장되는 사건의 해석 근거로 삼는 것은 정상적인 역사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곽박은 ‘薰'(훈)이 ‘菫'(근)의 뜻이 있다고 했을 뿐 ‘桓'(환)이 무궁화와 관련돼 ‘菫'(근) 또는 ‘槿'(근)의 뜻이 있다고 한 바는 없기 때문에 곽박의 견해를 근거로 환화가 무궁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더라도 견강부회일 뿐이다.

    (3) 한자 ‘桓'(환)에 대한 검토; 무궁화를 일컫는 명칭으로 사용된 바 없음.

    또한 ‘桓花'(환화)에서 ‘桓'(환)이라는 한자는 중국에서든 우리나라에서든 무궁화를 지칭한 뜻으로 사용된 바가 없다는 점이다. 중국 후한 시대에 허신(許愼, 30~124)에 의해 편찬된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桓 亭郵表也”(환은 역참 등을 안내하는 푯말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중국 위진 남북조시대의 양나라의 고야왕(顧野王, 519~581)이 편찬한 『옥편(玉篇)』에도 “桓木 葉似柳 皮黄白色”(환목은 잎이 버드나무와 비슷하고 수피는 황백색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무환자나무(Sapindus mukurossi)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 문헌에도 이어져 조선 정조 때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전운옥편(全韻玉篇)』에도 식물과 관련해서는 『설문해자』와 『옥편』의 내용을 함께 실어 비슷한 뜻으로 해설하고 있다. 달리 ‘桓'(환)이 무궁화를 일컫는 말로 사용된 예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혹자는 『환단고기』의 ‘桓'(환)이 우리말 ‘한’에 대한 이두식 차자 표기라고도 하지만, 고려 말의 『동국이상국집』(1241년) 이래로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우리말 표현은 ‘무궁화’이었고 현재 방언에도 무궁화와 비슷한 ‘무궁아’, ‘무개나무’, ‘무우게’, ‘북무화’가 확인될 뿐 ‘환꽃’과 ‘한꽃’ 또는 그와 유사한 명칭이 무궁화를 일컫는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단군세기』가 저술된 것으로 주장되는 1363년 무렵에 저술된 다른 문헌을 살피더라도, 무궁화는 이미 『동국이상국집』(1241년)에서 ‘槿花, 無窮, 無宮'(근화, 무궁, 무궁)이라는 이름으로, 『보한집』(1254년)에서 ‘紅槿'(홍근)으로, 『목은집』에는 고려 공민왕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에서 ‘槿'(근)으로, 『송당집』에는 1383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에서 ‘槿花'(근화)로 기록되었다. 또한 『태백일사』가 저술된 것으로 주장되는 1520년 경에는 『향약집성방』(1433년)에서 ‘木槿, 無窮花木'(목근, 무궁화목)으로, 『사성통해』(1517년)에서 ‘木槿花, 무궁화'(목근화, 무궁화)로, 『훈몽자회』(1527년)에서 ‘槿, 蕣, 木槿花, 무궁화'(근, 순, 목근화, 무궁화)로 기록되었다. 『환단고기』가 저술되었다는 그 시대의 문헌에도 무궁화를 ‘桓'(환) 또는 ‘桓花'(환화)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桓花'(환화)의 ‘桓'(환)에는 현재 남아 있는 문헌상 기록과 방언 등의 민속적 자료에 따르면 무궁화로 이해될 여지는 전혀 없으므로, 『환단고기』를 진서로 보더라도 환화를 무궁화로 해석할 수는 없다.

    (4) 무궁화의 식물 생태에 비추어 본 환화에 대한 검토; 환화는 무궁화의 생태와 맞지 않음.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환국이 건국될 때 왕으로 추대된 환인을 옹립하면서 환화 아래에서 돌을 쌓고 그 위에 환인이 올라가 앉았다고 한다. 그러나 무궁화는 3m 내외로 자라는 관목인데다 원예를 위하여 수형관리를 별도로 하지 않은 한 아래쪽에서부터 여러 가지가 뻗쳐 나오므로 무궁화 아래에 단을 쌓고 사람이 앉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나무이다. 즉, 『태백일사』에 기록된 환화가 무궁화라는 주장은 무궁화의 생태적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환화를 진달래라고 하는 견해 역시 진달래는 2~3m 내외에서 수많은 가지가 뻗쳐 자라는 관목이므로 마찬가지로 적절하지 않는 해석이다. 현재 전래되는 그 어떤 민속에도 무궁화와 진달래 아래에 사람이 올라 앉을 수 있는 제단을 쌓는 문화는 발견되지 않는다. 민속 이전에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또한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중 16세 단군 때의 것으로 내려 온다는 ‘애환가’의 가사는 더욱 무궁화와는 거리가 멀다. 가사 내용을 살피면 산에서 저절로 자라는 꽃이며 봄에 피는 꽃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궁화는 우리 역사에서 고려 시대에 편찬된 『동국이상국집』의 「오월육일음계림자가(五月六日飮鷄林子家)」에서 집 안에 식재된 무궁화를 노래한 이래로 지속적으로 사람이 재배하는 식물로 기록되었으며, 무궁화는 새가지가 한참 자라 올라간 후 비로소 꽃봉오리를 만들기 시작하여 무한꽃차례로 꽃을 피우기 때문에 봄에 꽃을 피울 수가 없다. 무궁화는 여름이 한참 진행되었을 때 비로소 피는 꽃이다. 긴 진화의 과정에서 무궁화라는 종(species)이 분화된 것은 현생 인류(Homo sapiens)가 생겨난 것보다 훨씬 오래된 수천만년 전에 이미 형성된 것이므로 신생대 이후의 기온 또는 기타 지형 등의 부분적 변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무궁화를 스스로 자생하는 봄꽃으로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환화가 무궁화라는 주장은 식물 생태학의 견지에서도 전혀 타당하지 않은 해석이다.

    (5) 역사적 기록과 전승되는 민속에 따른 검토; 무궁화는 고대사회의 수목신앙의 대상으로 볼 수 없음.

    토테미즘(totemism)은 고대 원시사회에서 인간집단과 동·식물 또는 자연물이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고 집단의 명칭을 그 동·식물이나 자연물에서 따서 붙이기도 했는데 옛 사회에서 숭배되는 동식물과 인간집단과의 여러 가지 관계를 둘러싼 신념·의례·풍습 등의 제도화된 체계를 가리킨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동북아 지역의 식물에 대한 토테미즘을 흔히 수목신앙(樹木信仰)이라고 한다.

    현재에도 우리에게 전승되고 있는 식물에 대한 토템미즘을 살피면 고대 사회의 수목신앙의 대략적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서낭당(성황당)의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서낭당은 마을어귀나 고갯마루에 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 형태로 그 곁에 보통 신목(神木)으로 신성시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신목으로 설정되는 나무는 특정한 종(species)의 나무가 아니다. 어떤 곳에서는 느티나무이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소나무이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여러 나무가 함께 있는 숲이기도 하다. 지역에 따라서 팽나무류, 은행나무, 참나무류, 느릅나무류, 황철나무와 같은 버드나무류 등 종류도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대개는 크고 오래사는 나무(노거수; 老居樹))들이다. 즉, 전래되는 우리 문화에서 수목신앙의 대상은 노거수로 특정한 종의 나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1281년에 저술된 보각국사 일연(1206~1289)의 『삼국유사』에도 나타나 있다.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기록에서 환웅천왕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에 내린 곳은 ‘神壇樹'(신단수) 밑이었다. 이는 신의 제단에 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특정한 나무가 아니라 전래되는 민속에서 비추어 보면 고대사회의 노거수(老居樹)에 대한 수목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神檀樹'(신단수)로 기록하여 박달나무(Betula schmidtii)로 이해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삼국유사』 이후 후대에 나타나는 인식의 단면일 뿐이었다.

    반면에 무궁화가 국가의 상징물로 등장하는 것은 897년에 신라의 최치원(857~?)이 기초하여 당나라에 보내진 「사불허북국거상표」라는 국가 공식 외교 문서에서 ‘槿花鄕'(근화향)을 신라를 지칭하는 나라이름(國號)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이는 초기의 부족들의 연맹국가를 벗어나 중앙집권적 국가 형태가 확립된 이후 각 국가들의 경쟁과 대립 과정에서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의미로 등장한 것이어서 부족연맹 형태의 초기 국가에서 나타나는 토템적 신앙과는 그 역사적 맥락이 전혀 다르다.

    고조선과 그 이전의 시대를 기록했다는 주장되는 『환단고기』 관련 부분에서 등장하는 환화가 무궁화라는 견해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랜 습속으로 전래되고 있는 우리의 민속과 국보로 지정된 우리의 역사 문헌 『삼국유사』에 반하는 것이다. 무궁화라는 식물이 우리 민족사에 등장한 역사적 맥락에도 반하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오히려 『환단고기』가 주장된 시대에 저술된 것도 아니고, 기술된 시대의 실제 상황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으로 드러내어 줄 뿐이다.

    (6) 『환단고기』의 ‘환화’ 기록의 모순점에 대한 고찰; 기록에 대한 신빙성이 낮음.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중 16세 단군 위나 재위 58년(기원전 1610년)에 관한 것으로 주장되는 환화에 관한 내용을 살피면 “先人指桓花而不名 直曰花 愛桓之歌 有云“(선인지환화이불명 직왈화 애환지가 유운)라는 기록이 있다. 번역을 하자면, “옛사람들은 환화를 가리켜 이름을 짓지 않고 그냥 꽃이라 하였다. 환을 사랑하는 노래는 전하는 가사가 있으니 이러하다”는 정도의 의미이다.

    이 문장 있는 그대로 해석을 하면, 고조선 위나단군 시절인 기원전 1610년의 연회에서 춤을 출 때에 환화라는 이름은 없었고 단지 꽃으로만 불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흔히 ‘산유화가’로 불리는 노래 가사가 전승되어 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환화라는 이름은 언제 생겨난 것이고 그래서 옛사람들에게 소위 그 ‘산유화가’가 환화를 사랑하는 노래인 애환가로 인식된 시점이 언제부터인가가 문제된다. 기원전 1610년경에는 환화를 그냥 꽃이라고 했다는 것이므로 그 이름이 형성된 때는 위나단군 재위 58년(기원전 1610년) 이후부터 『단군세기』가 적혀졌다고 주장되는 기원후 1363년까지의 기간 중 어느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는 고조선 5세 단군의 재위 시기인 기원전 2084년에도, 고조선 11세 단군의 재위 시기인 기원전 1891년에도 ‘桓花'(환화)라는 이름이 나타나고, 『태백일사』에는 환국을 건국한 때인 기원전 7197년에도 환화라는 이름이 존재했던 것으로 버젓이 등장한다. 환화라는 명칭 자체가 특정 식물이 아니라 단순히 꽃을 나타낸다고 보지 않는 한 서로 모순된 기록이다.

    또한 『태백일사』에서 환화는 그 아래에 돌을 쌓고 그 위에 환인이 앉을 수 있는 큰나무(거목; 巨木)로 표현되지만, 『단군세기』의 고조선 제11세 단군 시절에는 유상(遺像; 일종의 초상화)에 그려진 檀樹(단수; 박달나무?) 아래에 있고 환웅이 위에 올라가 있는 식물로 묘사되고 있다. 고구려와 신라 등의 옛 유물에서 확인되지 않은 특정한 인물에 대한 초상화를 훨씬 더 이전의 시기에 그렸다는 것도 믿기 어렵지만, 같은 이름의 식물에 대해 한번은 아래에 사람이 앉는 큰나무로 다른 한번은 사람이 위에 올라가는 장식용 작은나무로 묘사하여 하나의 문헌에서 발견되는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다.

    옛 문헌에는 진서인 문헌이라고 하더라도 시대의 한계로 인한 오류나 오기는 종종 발견된다. 그러나 하나의 문헌에서 이와 같이 서로 모순되는 기술이 발견되는 것은 실존하지 않았던 역사를 인위적으로 작출하는 위서의 경우에 주로 나타나는 형태의 모순적 기술이다.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에는 당대의 최고의 지성들이 적었다는 책이라는 주장이 실려 있지만, 실제 그 구성은 곳곳에서 모순되며 구성은 매우 엉성하기 그지없다. 이는 『환단고기』가 진서라고 가정하더라도 환화에 대한 기록이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은 않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것을 근거로 환화를 현재의 무궁화를 일컫었다고 보는 것은 더욱 합리성을 찾기 어렵다.

    2. ‘천지화’가 무궁화인지 여부에 대한 검토

    앞서 살펴 보았듯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는 고조선 13세 흘달단군 시기에 신라 화랑의 기원이 되는 국자랑이 있었다고 하며 신성한 지역인 소도에 천지화를 심고 그 꽃으로 국자랑이 밖에 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에는 이 천지화 역시 환화이고 무궁화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환화에서 살펴보았듯이 천지화를 무궁화로 보는 기록은 『환단고기』 전체에 걸쳐 존재하지 않으며, 천지화를 무궁화로 설명하는 합리적 근거 역시 없다. 그냥 그렇다는 주장만이 있을 뿐이다. 『단군세기』가 저술되었다는 주장되는 그 이전 또는 그 당대의 시기에도 천지화를 무궁화로 기록한 문헌도 없으며 중국이나 우리의 문헌에서 천지화를 무궁화를 뜻하는 명칭으로 사용한 기록도 발견하기 어렵다. 연맹의 성격이 강한 고대 부족국가에서 특정한 종의 식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주장 역시 우리의 역사서와 민속에 반하는 것이다.

    게다가 무궁화 꽃 하나는 하루 피었다가 하루에 지는 특성이 있고 물을 좋아하여 꽃을 꺾는 그 순간부터 시들기 때문에 머리에 꽂아 이용하기는 곤란한 식물 생태적 특성이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단군세기』에는 심은 천지화의 꽃을 꺾어 심지어 머리에 꽂고 밖에 다녔다고 한다. 이와 같이 『단군세기』에 기록된 천지화에 대한 묘사는 무궁화의 생태적 특징과 전혀 맞지 않다.

    또한 앞서 살폈듯이 『단군세기』의 16세 위나단군 시절에는 이름이 없이 그냥 꽃이라고 했던 식물이 그 이전의 시기인 13세 흘달단군 때에는 그 이름이 천지화로 기록되어 있다. 이 역시 내용이 서로 모순되어 합리성도 신뢰성도 결여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3. 소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환단고기』에는 환화 또는 천지화를 무궁화로 기록한 바가 없고 무궁화라는 주장에 대한 합리적 근거도 찾기 어렵다. 글자로서의 ‘환’과 ‘천지’를 무궁화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된 예를 찾기도 어려우며, 고대 부족국가에서 특정한 종의 식물을 대상으로 나라꽃으로 삼았다는 것 역시 『삼국유사』와 전승되는 민속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같은 문헌에서 내용이 서로 모순되어 최소한의 신뢰성조차 갖추지 못한 주장이다.

    Ⅳ. 참고사항: 『환단고기』와 유사한 문헌에 기록되었다는 무궁화에 대한 검토

    『환단고기』 외에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관한 기록이라고 주장되는 몇 문헌들이 추가적으로 존재한다. 이들 문헌을 『환단고기』에 기록된 환화 또는 천지화가 무궁화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로 삼기도 하므로 이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1. 『규원사화』에 기록된 ‘薰花'(훈화)에 대한 검토

    『규원사화(揆園史話)』는 1675년(숙종1년)에 북애노인(北崖老人)이라는 호를 가진 이가 쓴다고 주장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상고사를 재구성한 책이다. 그러나 1889년에 일본 육참본부에서 나온 『만주지지(滿洲地誌)』의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어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일제강점기 초기에 적혀진 위서(僞書)로 보고 있다. 심지어 『환단고기』를 대중화시켰다고 주장되는 이유립조차 『규원사화』를 위서로 보았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 무궁화와 관련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되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庚寅歲壬儉伐音元年種薰華於階下以爲亭使 경인년(기원전 1771년) 임검 벌음 원년이다. 훈화라는 꽃을 뜰 아래에 심어서 정자로 삼았다.

    <漫說> 郭璞贊之則曰有東方氣仁國有君子薰華雅好禮讓禮委論理 <만설> 곽박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동방에 기운이 어진 나라가 있는데 군자가 많고 훈화가 피는 아름다운 나라이고 예의와 양보를 좋아하는데 예는 논리를 따라서 했다고 했다.

    윗부분은 발해의 역사서인 『조대기(朝代記)』를 참조하여 기록한 것이라 하고, 아래의 <만설>의 내용은 북애노인(?)이 스스로의 생각을 적은 것이라 한다. 『산해경주』를 적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곽박(郭璞)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이 글의 저자는 고조선 벌음 임금의 원년에 뜰 아래 심었다는 ‘薰華'(훈화)를 무궁화로 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산해경』의 「해외동경」편의 훈화초를 무궁화로 보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원후 4세기경인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에 곽박이 『산해경주』에서 ‘薰'(훈)을 ‘菫'(근)으로 해석한 것에서 비롯한다. 또한 우리와 중국의 옛 문헌에서 ‘薰華'(또는 薰華草)를 무궁화(목근)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산해경』과 관련하여 논의할 때이며, 그외 일반적으로는 ‘薰'(훈)을 그대로 해석하여 향기있는 꽃 종류를 뜻하였다. 그런데 무궁화는 향기가 없는 식물이다. 만일 북애노인(?)의 주장대로 고조선 때인 기원전 1771년에 훈화를 무궁화로 기록한 것이라면 이 기록의 1차적 사료는 고조선 자체에서 발생한 역사서나 자료 등이 아니라 기원후 4세기 이후의 『산해경주』에 의거하였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즉, 그 기록의 신뢰성에 의문이 있게 된다.

    한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산해경』에 군자국이 기록된 것은 「해외동경」편이고 「해내경」편에 조선이 별도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산해경』의 「해외동경」편의 기록을 고조선과 연결시킬 방법은 없다. 따라서 정말로 일부의 주장대로 『규원사화』의 ‘薰華'(훈화)가 무궁화를 뜻하는 것이 맞다면 이것은 『규원사화』가 위서이거나 진서라고 하더라도 내용은 허위가 된다. 그럴듯한 자료를 그럴듯하게 붙여 놓는다고 하여 실재했던 역사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2. 『단기고사』의 ‘槿樹'(근수)에 대한 검토

    『단기고사(檀奇古史)』는 발해의 시조 대조영(?~719)의 아우 대야발이 719년에 쓴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연대기라고 주장되는 역사서이다. 원문은 발해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주장되고 있으나 1949년에 번역되었다고 주장되는 국한문혼용체만 현존한다. 이 역시 역사학계에서는 실제 저작자를 알 수 없으며 조선 성리학자들에 의해 주창된 기자조선이 버젓이 실제 역사로 등장하고, 고조선의 후단조선(?) 21세 여루 단제 40년에 “조대체(趙文體)가 자본론(資本論)을 저술하여 헌상하였다” 와 같은 당대의 사실이라고는 차마 믿을 수 없는 기록들이 많아 위서로 취급되고 있다. 여기에 기록된 무궁화에 관련 내용은 아래와 같다.

    “16년에 단제께서는 고역산(古歷山; 지금의 平南, 江東, 平壤)에 행차하시어 제천단(祭天壇)을 쌓으시고, 주변(周邊)에 근수(槿樹; 무궁화)를 많이 심었고”[1984년 번역본 『단기고사』, 62쪽]

    『단기고사』에서 언급된 ‘槿樹'(근수)에 대한 기록은 고조선의 전단조선(?) 시기인 제5세 구을(丘乙) 단군 때에 있었던 일이다. ‘槿'(근)이 무궁화를 일컫는 것은 맞지만, 무궁화는 산지에서 식재하여 키울 수 있는 식물이 아닌데다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토테미즘에 따른 수목이 숭배되었던 시기에 특정한 종의 식물을 제례의식과 관련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는 기록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현재 전래되고 있는 민속 문화에 반하는 것이어서 위서 논란과 더불어 가사 진서라고 하더라도 신뢰성은 없는 내용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언급할 부분은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중 ‘환화’가 나타나는 부분 그리고 『규원사화』와 『단기고사』는 모두 발해 초기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조대기』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기록된 역사서라고 주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같은 책을 저본으로 하여 편찬된 역사서가 무궁화를 지칭하는 명칭이 모두 제각각일 수 있으며, 어떤 곳은 야생 속에 그대로 존재했다고 기록했는데 또 어떤 곳은 식재했다고 하는 불일치가 발생할 수 있으며, 무궁화가 등장하는 시기도 모두 제각각일 수 있는가? 오직 공통성이 있다면 무궁화와 관련된 기록만 보더라도 역사학, 식물학, 민속학과 문헌학 등 모든 측면에서 모두 신뢰성이 없다는 점이다.

    3. 기타 무궁화에 대한 기록으로 주장되는 문헌에 대한 검토

    (1) 진주소씨 족보의 무궁화 기록(?)에 대한 검토

    1979년에 청계천의 어느 중고 고물가게에서 1320년에 편찬되었다는 진주소씨(蘇氏)의 족보가 소현섭이라는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족보의 서문에는 『扶蘇譜(부소보)』라는 불리우는 그 족보가 1320년에 편찬되었다는 것, 그 이전인 1103년에 『瑞風譜(서풍보)』라고 불리는 족보 편찬이 있었다는 것, 또 그 이전인 947년에 『東槿譜(동근보)』라고 불리우는 족보 편찬이 또 있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한국의 소(蘇)씨와 중국의 소(蘇)씨는 모두 갈천씨를 이어서 환국(桓國)의 제(帝)가 된 적제 축융 소복해의 후손으로 환국에서 왕으로 지냈고, 고조선에도 유사한 영화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족보의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만을 있고 그 복사본은 마치 최근에 필사된 것처럼 아주 깨끗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문헌 역시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이에 관련된 무궁화의 기록은 947년의 편찬된 족보의 제목이 ‘東槿譜'(동근보)로 되어 있고, 『부소보』에 기원전 4,000여년경에 환국의 영토에 蘇木(소목)이라는 불리는 나무를 심었는데 그것이 곧 ‘扶蘇'(부소)이고 또 이것이 곧 木槿(목근; 무궁화)이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蘇'(소)는 중국 후한 시대의 허신에 의해 편찬된 『설문해자』에 “蘇 桂荏”(소는 ‘차즈기’이다)라고 기록한 이래로 초본성 식물을 뜻할 때에는 약용 및 식용 식물인 차즈기(소엽 또는 자소; Perilla frutescens var. crispa)를 일컫어 왔고,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인 1236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향약구급방』 이래로 일관되어 있다. 또한 ‘蘇'(소)가 목본성 식물을 뜻할 때에는 중국 당나라 때 편찬된 『신수본초(新修本草)』 이래로 콩과의 약재식물인 蘇木(소목 또는 소방목; Caesalpinia sappan)을 일컫어 왔다. 우리나라의 『동의보감』에서도 중국에서 수입되는 약재로 기록된 것이었다. 그외 달리 ‘蘇'(소)를 무궁화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된 용례는 중국이나 우리의 옛 문헌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어렵다.

    그리고 『동근보』가 편찬되었다는 947년은 897년에 최치원 선생께서 중국 당나라에 보내는 외국문서인 「사불허북국서상표」에서 신라의 국호(나라이름)를 ‘槿花鄕'(근화향)으로 지칭하여 국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한 직후이었다. 나라이름에 사용된 무궁화가 불과 몇 십년 후에 신라의 왕가도 아니었고 그 아래에서 벼슬하였다는 특정한 집안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는 주장은 신뢰성을 가지기 어렵다. 897년 이래로 최근까지 진서로 판별된 우리의 여러 옛 문헌에서는 무궁화는 나라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오로지 이 족보에서만 특정 집안을 상징했다는 주장이어서 다른 문헌과의 교차검증에서도 신뢰성은 확연히 떨어진다.

    따라서 위 족보가 진서라고 가정하더라도, 그 기록 내용은 쓰여졌다고 주장되는 당시의 인식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다. 진실성을 담보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2) 『심당전서』의 무궁화 기록(?)에 대한 검토

    『심당전서(心堂全書)』는 이고선(李固善, 1906~1982)이라는 향토학자가 집필한 한문으로 된 책으로 1981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의 인용문헌에 『환단고기』가 언급된다고 하여 환단고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환단고기』가 진서라는 점을 입증하는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책이다. 그러나 고조선이나 고대국가에 대한 실제 내용은 『환단고기』와는 단군의 이름조차 전혀 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의 무궁화에 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庚午七年 命郤泰養馬于鞍山植槿于南崗名曰槿域 즉, 경오년에 극태에게 명하여 안산에 말을 기르게 하고 남강에 무궁화를 심으니 근역이라 한다.

    辛酉五十四年命植槿于國內山川 즉, 신유 54년에는 국내 산천에 무궁화를 심게 하였다.

    『심당전서』에 따르면 위 문장의 무궁화 식재에 대한 내용은 제1대 단군인 천일태제(天一泰帝) 때의 기록이고, 아래 문장의 무궁화 식재에 대한 내용은 제3대 단군 태일성제(太一聖帝) 때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런데 제1대 단군시기에 기록되었다는 槿域(근역)이라는 말은 신라의 최치원에 의해 신라 국호로 사용된 ‘槿花鄕'(근화향)을 이어받은 것으로, 조선 중기에 청나라의 관계를 재정립할 때 조선의 나라이름(국호)로 사용된 용어이었다. 조선 중후기의 외교문서를 집대성한 『동문휘고(同文彙考)』에서 사용례가 처음으로 발견되며 그 중 근역을 조선의 국호로 사용한 최초의 외교문서는 1765년의 것이다. 그런데 그 용어가 어떻게 고조선 시대에 거슬러 올라가서 기록될 수 있을까? 이것은 기록된 시대의 실제의 역사가 아니라 사후의 시점에서 과거의 역사를 억지로 만들어 내었다고 볼 수 밖에 없게 한다.

    게다가 제3대 단군 시기에 있었다는 기록 중 무궁화(槿)를 국내 산천에 심었다는 이야기는 더욱 황당하다. 앞서 살핀 것처럼 옛문헌에서 무궁화는 화훼식물이자 약용식물로 집안이나 정자 옆 그리고 울타리용으로 식재하던 식물이었다. 그 어디에도 사람의 관리가 되지 않는 자연속에 방치되던 식물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무궁화는 물빠짐이 제대로 되지 않는 습한 곳을 싫어하므로 냇가(川)에 식재하는 경우 뿌리가 썩어 대개는 고사하는 생태적 특성이 있기도 하다. 무궁화를 산과 들에 아무렇게나 식재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는 국가가 나서서 무궁화 삼천리강산을 만들겠다고 나선 1960~1970년대에 있었던 일이었다. 『심당전서』의 기록은 이 짧은 현대사의 한 단면을 반영한 기록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했던 과거 역사의 진실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Ⅴ. 글을 마치며

    하나의 문구가 있다. “고조선과 그 이전의 시기부터 무궁화는 겨레의 꽃으로 사랑받아 왔다”. 아마도 위에서 언급된 문헌에서 주장된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진서라고 굳이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위 문헌의 기록들을 무궁화와 연관시키는 이유는 오래전부터 겨레의 꽃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문구에는 치러야 할 값비싼 대가가 있다. 인류가 획득해 온 여러 분야의 과학과 학문이 가르치는 바와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위서가 아니라 주장된 그 시대를 반영하는 진서라고 입증해야만 위 문구는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가사 위 문헌들이 진서로 입증된다고 하더라도 이 글에서 논한 여러 의문들에 대해서 답을 해야 한다. 이러한 입증과 의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은 채 반복된 문구의 언급은 무궁화가 우리 민족의 공동체와 맺어온 실제 관계에 대해 오히려 의심만을 불러 일으킨다.

    위 언급된 신뢰하기 어려운 기록들은 오히려 실재하였고 현재의 우리에게도 전해지고 있는 진실된 옛 문헌의 기록이 밝혀주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 즉, 150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화훼와 약용 등의 목적으로 우리 공동체와 맺어 온 맺어 온 실제 관계 그리고 상징성으로 우리 민족과 무궁화가 맺어온 역사- 실제의 옛문헌과 유물로서 확인되는 최치원에 의해 897년에 근화향이라는 명칭으로 무궁화를 나라이름에 처음 사용됨으로써 공동체를 상징하는 의미를 가졌고, 그것이 계속 이어져 조선의 나라이름을 근역이라 하였으며, 대한제국에 이르어 오얏꽃과 더불어 훈장과 문관대례복 등에서 국가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채용되었고, 나라를 잃게 되자 좌와 우를 막론하고 민족 독립과 국권회복을 상징하는 단결의 구심점이기도 했던 바로 그 역사-를 흐리게 한다.

    나아가 무궁화는 전세계 온대지역에서 여름을 장식을 정원용 화훼식물로 식물의 생태적 특징에 맞추어 심어 가꾸어 사랑을 받고 있는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식물생태에 맞지도 않은 신뢰하기 어려운 자료들은 무궁화의 재배와 관리에 대해 세계적 보편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문제점을 노정시킨다. 세계의 보편성으로부터 멀어져 오로지 우리의 공동체만이 무궁화를 야생의 상태에 방치하거나, 심지 말아야 할 그늘과 습한 지역에 아무렇게나 식재하거나, 꽃봉오리가 달리는 다 자란 가지를 함부로 잘라 꽃을 피우지 못하는 천떡꾸러기로 만들어 놓고 있다. 작금에 무궁화라는 식물에 대해 유기와 학대라고 불러도 과장이 아닌 현실은 위 허구로 가득찬 주장들의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세계의 강대국의 틈새에 끼인 약소국이 갖는 갖은 고통과 어려움을 오로지 옛날의 영광된 제국이 있었다는 것에서 위로받고 싶은 믿음에 근거한 가치관 또는 민족종교라는 외피로 신앙에 기대어 현실을 설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의 공동체는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그것을 탓할 바는 아닐 것이며 이 글이 그들을 설득해서 생각을 바꾸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존재했던 확인되는 역사에 근거하여 무궁화가 우리의 공동체를 묶어 주는 상징적 기능을 했으며 아직도 그 상징성이 유의미한 가치가 있다고 신뢰하는 사람 그리고 인류가 보편적으로 확인해 온 정원식물로서 무궁화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 그러한 분들께 감히 호소드린다.

    위서의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고, 무궁화 자체의 식물 생태에도 맞지 않으며 신뢰성이 없는 문헌의 기록에 의존하여 무궁화를 설명하고 무궁화를 대하는 것은 무궁화를 사랑하고 아끼는 일이 아니라는 것. 우리 민족 공동체 전체가 함께 공유하고 아끼는 무궁화가 아니라 소수의 가치관과 신앙의 보조물로 만드는 일이라는 것. 그것은 또 다시 무궁화를 해결되지 않는 논란과 어둠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행동이라는 것. 또 다시 무궁화를 방치, 유기와 학대의 길로 이끌어 국민 다수로부터 계속 외면받도록 하는 행동이라는 것. 그러므로 단호한 결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2022년 8월 20일에 쓰다.)

    * <푸른솔의 식물생태 이야기> 칼럼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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