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애니메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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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2월 01일 02:5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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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영화는 재미로 본다. 이런 재미도 있고 저런 재미도 있지만, 미국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 주는 재미는 경쾌함과 발랄함, 그리고 무엇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누릴 수 있는 재미이다. 물론,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도 나름의 ‘교훈’이 있지만 미국의 상업 영화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속 보이는 감동’이기 쉽다.

디즈니의 만화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 본다면 놀랄 만한 애니메이션이 있다. 바로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다. 그 장르가 다양해서 재미도 여러 가지인데, 사회와 삶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면서도 극적 긴장감 또한 뒤지지 않는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여럿이다.

그 중에서도 기술 문명의 위태로움, 인간 사회의 갈등, 인간과 자연의 긴장을 역동적이고도 재미있게 연출하기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그 철학적 깊이에 놀랄 만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재미로만 볼 수는 없게 한다.

   
  ▲ 에니메이션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
 

SF와 마르크스 주의의 결합

미야자키는 1941년에 도쿄 부근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비행기 공장을 운영했다. 이 비행기 공장은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등장하는 날아다니는 것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행은 미야자키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수직 상승과 하강이라는 미야자키만의 역동적 애니메이션은 기계와 등장인물의 비행으로 표현된다.

한편으로는 그 비행기 공장에서 산업 사회의 계급적 차별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작품에 고도로 산업화된 문명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미야자키는 어린 시절 만화가가 되길 원했다. 그래도 그림을 배우기 위해 미대에 진학하지는 않고 정치경제학부에서 일본산업론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에 일본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사전(白蛇傳)(1958)>에 감동을 받고 애니메이터가 되고자 했다. 대학 시절 아동문학 연구회라는 서클에서 활동하면서 동서양의 많은 문학을 접한 것이 이후의 작품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과정이 없었음에도 미야자키는 ‘그림을 그리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었다. 스스로는 그림에 재능이 없다고 했지만 작화, 원화를 그릴 뿐 아니라 때로는 동화도 직접 수정한다. 애니메이터로 시작했으나 다양한 인문적 지식과 철학적 성찰이 연출 능력을 키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청년 시절 사회주의에 큰 관심을 가졌던 미야자키는 대학에 다닐 무렵 일본공산당의 기관지인 ‘아카하타(赤旗)’의 청소년판인 <소년소녀신문>에 <사막의 백성>이란 제목의 만화를 연재했는데, 그가 밝혔듯이 이 작품은 SF와 마르크시즘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노동조합의 의뢰를 받아 만들어진 이 만화는 ‘단결하면 큰 힘이 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중앙아시아를 배경으로 잔인한 강대국에 맞서는 소수민족의 항쟁을 그리고 있다. 그 그림을 변형해 만들어낸 것이〈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라고 한다. 무엇보다 ‘힘을 합친다’는 연대의식은 많은 작품에서 공동체 사회(마을)로 등장한다.

학교 졸업 후 한때 노동조합 서기로 지내기도

미야자키는 대학 졸업 후 애니메이터로 일하게 된 도에이동화의 노동조합 서기로도 활동하였다. 노조활동은 그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은데 이는 작업 공간에 대한 태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미야자키는 도에이동화에서 만난 다카하타 이사오와 사상적 교감을 나누며 노동조합 활동도 함께했다. 1985년 그들은 스튜디오 지브리를 만들었고, 1990년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과는 달리 스태프를 월급제로 고용하였다.

스태프를 작품마다 계약하는 방식이 아닌, 상시적으로 고용하여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고용을 안정시킴으로써 작품의 질을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이는 스태프들을 한 자리에서 일하게 하여 관리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또한 이는 적지 않은 스태프들을 월급제로 고용할 자금을 투자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브랜드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었다.

이런 ‘파격적’ 고용 방식을 두고 <공각기동대(1995)>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는 지브리를 소비에트의 크렘린에 비유했다. 그는 지브리의 조직화된 구조가 다른 곳에서는 불가능한 양질의 작품을 만들어 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창조성을 저해한다며, “그들이 영화를 만드는 것을 아직도 노조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고 했다.

오시이의 발언은, 지브리의 고용 방식이 작업 효율보다는 그 설립자들의 활동 궤적에 기인한다고 여기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시선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지브리라는 제작사를 통해 미야자키는 다카하타 이사오와 하나로 이해되기도 한다. 도에이동화에서 만난 다카하타는 사회주의 사상에 밝았는데 미야자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작품 성격은 다르다.

다카하타는 <반딧불의 무덤(1988)>, <추억은 방울방울(1991)> 등 상당히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연출했다. 미야자키가 기획한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은 우화적이기 하지만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강해서 다카하타다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다카하타의 작품이 미야자키의 작품보다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평가도 있다.

다카하다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1974)>, <엄마 찾아 삼만리(1976)>, <빨강머리 앤(1979)> 등 TV애니메이션들도 연출했다.

맹목적인 기술 추종의 위험성

   
  ▲ <미래소년 코난>
 

미야자키는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미래소년 코난(1978)>,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이웃집 토토로(1988)>, <붉은 돼지(1992)>, <모노노케 히메(1997)> 등을 연출했다. 이 작품들은 고도로 산업화된 문명의 위협과 어리석음, 파괴적인 전쟁과 독재 권력,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 인간과 자연의 갈등과 공존을,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경쾌하게 그리고 있다.

이와 달리 최고 정점에 오른 작품성을 보여주면서 베를린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0)>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은, 한편으로는 미야자키의 면모를 이어가고 있지만, 사회, 정치적 문제 등과 같은 다소 무거운 주제에서는 벗어났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미래소년 코난>은 초강력 전자력 병기가 세계의 절반을 일순간에 소멸시킨 200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만든 ‘거신병’이라는 무기로 세계가 불타버린 먼 미래가 배경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로 이어진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도 기술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때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전쟁과 파괴 기술 때문에 인간 사회가 위기에 처했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그 파괴 기술을 독점하여 남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이들 작품들은 인간적 가치가 발전할 수 있도록 기술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착취 사회와 공동체 사회의 대비

미야자키의 작품은 억압과 착취의 사회와 조화로운 공동체 사회를 대조하기도 한다. <미래소년의 코난>의 인더스트리아와 하이하바,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원작인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도르메키아, 도르크와 바람계곡이 그러하다.

인더스트리아, 도르메티아, 도르크와 같은 도시와 국가는 <붉은 돼지>의 주인공이 스스로 사람이길 포기하고 차라리 돼지가 되어버린 이유를 제공한 전쟁과 파시즘 국가와 관련이 있다. 그것들은 악독한 계급 사회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나 국가를 폭력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이기도 하다.

이런 대군사 제국에 저항하는 사회는 다분히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하이하바와 바람계곡과 같이, 개인이 상품가치를 지니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그리고 있다. 미야자키는 “일정한 공동체 속에서 일정한 일을 하고 있으면 능력차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회가 된다. 어지간한 게으름뱅이가 아닌 한에는, 마을이 굶주릴 때에는 함께 굶주리고 마을이 풍요로울 때에는 자신도 풍요로워지는” 사회상을 그리고자 했다.

미야자키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또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마스크를 뒤집어쓴 채 곰팡이로 뒤덮인 음침한 폐허를 지나는 한 여행자의 독백, “마을이 또 하나 죽었군.” 이 대사로 시작하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1950년대 발생한 미나마타병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미야자키는, 대표적인 ‘공해병’을 낳은 이 사건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오염 물질의 끔찍함을 목격함과 동시에, 강력한 복원력으로 그 오염 물질을 빨아들여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자연을 보았다.

미야자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개봉 10주년 기념으로 하게 된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당대를 반영하지 않은 예술작품이란 없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70년대에 등장한 환경론적 세계관이 반영된 작품이다”라고 했다.

당대를 반영하지 않은 예술작품은 없다

이처럼 미야자키는 인간과 자연의 긴장감을 많이 다루었다. 그렇다고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평면적으로 그리지는 않았다. <모노노케 히메>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걸 뚜렷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숲을 파괴하고 무기를 만들지만 그것도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의 그러한 행위에 저항한다. 인간이 자원을 이용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산업 기술 문명을 이룩했다는 것 자체가 자연과의 대립을 영원히 피할 수 없게 한다. 대립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웃집 토토로>는 전후에 사라져가는 일본의 숲을 소재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방식을 동화적이고도 신비롭게 그리고 있다.

   
  ▲ <이웃집 토토로>
 

미야자키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의 국경 분쟁은 과연 그 국가들의 사회주의가 진실한가를 의심하게 했다. 그래도 그는 1990년대 이전까지는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결국 동구권의 몰락은 그에게도 고통이었다.

왜냐하면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붉은 돼지>를 제작한 후에는 “정치를 좌우로 가르지 않는다. 다만 물질문명에 비판적이라는 진보적 경향은 남아 있다”고 했다.

미야자키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자연을 착취하지 않는 인간 사회의 이상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작품을 통해 이상주의적인 사회주의를 그렸을 뿐 그다지 실천적 활동을 보여 준 사회주의자는 아닐 지도 모른다.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게다가 그의 어느 작품에서도 ‘흑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인종주의’의 혐의를 받고 있다. 미야자키는 단지 ‘색감의 문제’라고 하지만 오히려 이 말이 ‘검은 피부색’은 아름답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한 그와 교감으로 평생 동료로 지내고 있는 다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의 무덤>이 전쟁의 가해자인 일본을 마치 피해자인 양 그렸다며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배급을 위해 미국의 거대 미디어 재벌 디즈니사와 제휴를 맺은 점, 무엇보다 지브리의 설립자들은 상업적 성공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 이 때문에 그들의 작품에 드러나는 주제의식과는 별개로 그들이 과연 사회주의 사상을 실천하는 이들인가 의심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에는 이러한 주제의식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고 평가 받기는 하지만- 미야자키의 작품에 드러나는 주제의식, 이상적 사회상이나 인간관계는 사회주의 철학에 가깝다.

미야자키는 자신이 꿈꾸고 있는 바를 작품에 담았다. 오히려 미야자키는 현실 사회주의나 사회주의 정당과의 관계를 중시하지 않아 자신의 꿈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을지라도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칭 사회주의자들이 미야자키에게 배워야 할 덕목은 그의 작품 속 주제의식보다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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