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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해자에서 생존자 그리고 감시자로
    [책소개]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D /동녘)
        2022년 08월 13일 12: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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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 디지털 성범죄에 너그러운 사법부를 비판하는 이 해시태그는 ‘n번방’에만 해당될까? ‘n번방’ 이전에 ‘소라넷’, ‘AV스눕’, ‘웰컴투비디오’로 이어진 ‘선처의 역사’가 있다. 그 긴 시간 동안 사법부는 성범죄 가해자에게 너그럽지 않았던 순간이 드물었다. 이 책은 이러한 사법 시스템을 둘러싼 자세한 관찰과 분노의 기록이다. ‘마녀’로 알려졌고, 지금은 ‘연대자 D’로 불리는 익명의 활동가인 저자는 전국을 누비며 수많은 성폭력 사건의 수사와 재판 과정을 지켜봤다. 그의 눈에 비친 사법 시스템의 생생한 풍경은 우리가 기사로만 접했던 성범죄 재판이 실제 법정에서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전에 수사와 기소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 모든 과정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판결문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보여준다. 이를 통해 사법 시스템이 어쩌다 ‘그들만의 성채’가 되었는지,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은 한 성폭력 피해자의 생존과 연대에 관한 치열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피해 이후 말·시간·자리를 잃고 홀로 4년간 법정 싸움을 견딘 저자는, ‘그때 내 옆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되뇌며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이후 사법 시스템 감시에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다 ‘방청연대’라는 말을 만들었고, 수사·재판 모니터링 교육을 기획하며 피해자부터 판사와 검사, 변호사와 활동가 등 시스템 내외부의 다양한 사람들을 연결해나간다. 경계가 없어 보이는 그의 활동은 ‘잊히기 위한 연대’, ‘대체 가능한 연대자’라는 목표를 향한 ‘계산된’ 발걸음이다. 누구보다 완벽한 ‘그림자’가 되고 싶어 했던 그의 이야기는, ‘좋은 일’, ‘필요한 일’ 정도로 여겨지는 ‘연대’에 어떤 전략과 윤리, 성장과 책임, 진화가 필요한지도 치열하게 묻는다.

    그 판결은 대체 뭘 먹고 자랐을까?
    비법률가 시민이 들여다본 법정의 풍경

    성폭력 피해자들이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사법 시스템의 간극은 이미 알려져 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도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거기까지라는 점이다. 언젠가부터 외부의 비판은 ‘솜방망이’라는 단어에 멈춰져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용어부터 논리까지 ‘전문 영역’으로 여겨지는 사법 시스템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비법조인 시민’의 눈으로 꼼꼼하고 꾸준하게 사법 시스템을 들여다본 저자가 제일 먼저 주목하는 이들은 판사다. 그가 보기에 한국의 재판부는 ‘재량’이 많이 보장되어 있으며, 처벌이 ‘솜방망이’가 된 원인도 상당 부분은 여기에 있다. 예컨대 2020년 대법원은 디지털 성범죄에 최대 29년 3개월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양형기준을 마련했지만, 판사가 재량으로 법정형을 2분의 1까지 깎을 수 있는 ‘정상참작감경’ 제도가 존재하는 한 엄벌이 요원하다는 사실을 여러 사례로 보여준다. 피해자의 의사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합의’ 또한, 그 과정에서 추가 가해에 빈번하게 일어나는데도 이런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재판부가 드물고, 오히려 가해자가 합의에 실패하든 성공하든 실제로는 양형에 유리하게 반영되고 있는 점을 지적한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라는 말은 흔히 판사의 독립과 재량을 강조할 때 사용된다. 그러나 저자는 과연 판사들 스스로는 이 말을 지키고 있는지 되묻는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 사이트의 운영자였던 손정우에 대한 범죄인 인도청구 재판의 불허 사유에서 볼 수 있듯 시민들의 상식과 동떨어진 논리가 담겨 있는가 하면, 가해자를 선처할 때 ‘진지한 반성’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리며 판에 박힌 듯 부실한 판결문을 내놓는 모습도 전국 법원에서 목격된다고 꼬집는다. 피해자가 법원에 나와 말해주길 바란다면서도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를 어떻게 보호할지는 고민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들을 준비는 하고 있는지도 묻는다. 이렇듯 저자가 일반 시민의 ‘상식적인’ 관점으로 들려주는 법정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솜방망이’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 사법 시스템을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알고 보면 다르다, 알고 비판하면 달라진다”
    ‘그 판결’ 뒤의 보이지 않는 톱니바퀴들

    성폭력 사건 재판을 보도하는 기사를 읽다 보면 재판부의 이름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 ‘법대로’는 대개 ‘판결’로 받아들여지므로 기사의 초점 또한 재판 결과에 맞춰지는 경우가 많고, 이때 판사는 마치 모든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책에 따르면 ‘솜방망이 처벌’을 논할 때 이야기되어야 하는 이들은 판사만이 아니다. 부실한 재판 뒤에는 수사와 재판의 여러 단계가 존재하며, 그 과정에 다양한 주체들과 제도들, 관행들이 자리 잡고 있다. 사법 시스템의 ‘현실’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저자가 ‘또 다른 톱니바퀴’로 먼저 꼽는 이들은 경찰과 검찰이다. 이들의 수사와 기소가 부실하면 재판에도 영향을 주며, 판사가 “유죄 심증이 있어도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흔히 이런 과정에서 비롯된다. 더욱이 피해자는 형사재판의 당사자가 아니라서 증인신문에 출석하는 경우가 아니면 방청석에 앉아 있어야 하는 등 수사와 재판 과정의 전반에서 소외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검경수사권 조정 이후 역할과 권한이 커졌음에도 ‘고소장 쪼개기’ 등으로 피해자의 고통을 더하는 경찰의 사례, 가해자의 범죄를 입증할 책임이 있고 피해자를 대변할 수 있는 ‘당사자’임에도 피해자 보호와 공판 준비를 소홀히 해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기는 검사의 사례 등은 여전히 현실에 넘쳐난다.

    이들뿐인가. 열악한 제도의 현실 속에서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지 못하는 피해자 국선변호사들, ‘피해자에게 고통 주기’를 전략화한 성범죄 전담전문 법인을 비롯한 피고인 측 변호인들, 피해자와 연대자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한 보복성 고소 등의 ‘방법’을 인터넷 카페에서 공유·학습하는 가해자들, 부적절한 인용과 묘사 등으로 추가 가해에 동참하는 언론의 성범죄 보도 관행 등은 사법 시스템의 문제가 판사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특히 군의 성범죄 수사·재판에서는 이 모든 톱니바퀴들이 한데 얽혀 피해자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갔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군 바깥의 민간 재판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고 이 책이 모두가 문제라는 식의 양비론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문제들은 그 자체로 하나하나가 피해자의 회복을 심각하게 방해하며, 일상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갉아먹고 있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따라서 경중을 따지기 어려우며 반드시 함께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수많은 주체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감시하고, 때로는 직접 목소리도 들으면서 ‘사법 시스템’이라는 거대하고 견고한 실타래를 구성하는 실들을 하나씩 풀어 보여준다.

    피해자는 어떻게 생존자, 그리고 연대자가 되었나
    “살아남은, 그리고 살아남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

    2010년, 성폭력 피해를 입은 후 경찰서 앞에서 망설이며 돌아섰던 저자는 도저히 ‘포기’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고소를 결심한다. 고소 이후 가해자로부터 “여섯 종류의 보복성 고소를 여덟 건 정도” 당했다는 건조한 고백은 그의 싸움이 짐작조차 어려운 고통의 시간이었음을 보여준다. 4년간의 길고 고된 법정 싸움을 거쳐 성폭력 피해를 인정받았지만, 그 끝에 남겨진 것은 “무너진 언어 체계, 악화된 건강 상태, 단절된 경력, 끊어진 인간관계, 추락한 경제 상황, 출소한 가해자의 보복 위협, 그리고 승소했다는 판결문”뿐이었다. 계속되는 후유증 속에서 생각을 완성된 문장으로 표현하고자 시작하게 된 트위터에서, 그는 가해자가 자신을 조롱하며 불렀던 명칭 ‘마녀’를 닉네임으로 정한다. 이 책에는 그 후의 이야기, 즉 고통의 기억을 연료 삼아 사법 시스템이라는 높고 단단한 벽을 일일이 만져보고 두드리며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해나갔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의 활동은 여러 영역을 넘나든다. 그가 연대한 사건은 일반 성폭력 사건부터 디지털 성범죄 사건, 피해자들과 연대자들이 당하는 무고와 명예훼손(한국에서는 사실을 밝혀도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 등 보복성 고소 사건, 공동체 안에서의 해결을 모색했던 사건, 가해자가 사망한 사건, 우리가 기사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유명인 가해자들의 사건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점차 연대의 영역을 넓혀 일반 시민들을 위한 재판 모니터링과 판결문 읽기 등의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싸움이 끝난 후에도 웅크린 채로 또 다른 싸움을 이어나가는 피해자들을 밖으로 불러내기 위한 파티를 열기도 하며, 사법 시스템 내외부의 사람들을 잇는 등 다양한 단계와 장소에서 활동해왔다. 홀로 고립되어 싸움을 이어갔던 자신에게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면 덜 고통받았을 거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연대였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원칙을 만들고, 성찰을 바탕으로 오류를 수정해나가며 진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것을 경계한다. ‘불필요한 잡음’을 만들고 싶지 않아 본업을 유지한 채 원조 없이 모든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개인의 시간과 비용과 건강을 갈아넣는 방식은 문제가 많다고 여러 차례 지적한다. ‘자신의 회복을 위해’ 기한을 정해놓고 시작했던 그의 여정은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만남들과 이별들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지속 가능한 연대’와 ‘연대자로서의 책임’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면서 각성하게 된 그는, 이윽고 ‘마녀’에서 ‘디(D)’로 활동명을 바꾸며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고자 결심한다. “연대는 일방향이 아니며 책임은 공동의 몫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누구보다 치열하게 ‘그림자’가 되어갔던 저자의 성실한 궤적이 책속에 그려져 있다.

    ‘잊히기 위한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시스템을 바꾸는 연대, 연대의 시스템화를 향하여

    흔히 ‘법대로’는 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방법을, 판결은 그 ‘끝’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재판의 결과는 중요하다. 그러나 저자는 피해 이후 판결에 이르는 구체적인 과정들, 즉 제대로 된 수사와 재판의 과정이 그 자체로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법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사법 시스템을 향한 촘촘하고 구체적인 비판들로 가득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사실 누구보다 변화를 믿고 시스템을 신뢰하려는 저자가 보여주는 애정의 시선이기도 하다. 그가 당사자로서, 또 연대자로서 겪은바 시스템이 망가지면 누구보다 피해자부터 타격을 입고, 피해자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피해자부터 타격을 입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 이후 홀로 사법 시스템 속에서 싸우는 동안 마주했던 고립감과 고통이 다른 피해자들에게는 결코 되풀이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그는, 그렇기에 비판과 신뢰, 결과와 과정이 모두 중요하다고 믿으며, 구체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감시와 기록과 목격이 필요하다고 본다. 비중이 크진 않지만 그런 이유로 이 책에는 저자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목격한 ‘좋은’ 판사와 검사, 경찰과 변호사의 사례들도 들어 있다.

    이 책은 구체적인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감시의 길을 안내한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n번방’과 ‘박사방’ 사건을 포함해 2020년 이후 전국적으로 진행된 디지털 성범죄 사건들의 재판 과정을 따라가며 주의 깊게 써내려간 방청기, 꼼꼼히 축적한 범죄자별 재판 결과, 범죄자들의 형량과 보안처분들에 관한 통계, 수사·재판·연대의 과정을 한데 모아놓은 연대표 등은 그 자체로 방청연대 기록의 모범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독자들도 재판 방청을 시도해볼 수 있도록 재판 절차와 기록할 사항 등을 안내하는 ‘재판 모니터링 수첩’도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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