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도자료 뿌리지 간담회는 왜 하나”
        2007년 01월 31일 06: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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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일 한나라당 대선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의 여의도 사무실에서는 여느 때처럼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박 전 대표가 일부 기자들과 티타임으로 시작한 만남은 어느새 정례 간담회가 됐다. 이날도 수십 명의 기자들이 노트북과 수첩을 들고 박 전 대표를 기다렸다.

    대선의 해다. 더구나 임시국회도 없는 1월이다. 자연 정치의 모든 관심은 대선후보와 각 정당의 대선 준비로 가 있다. 하지만 대선주자들의 전국 특강 순례를 일일이 쫓아다녀도 후보들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기자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한 마디 건지기는 쉽지 않다.

    대선주자들의 ‘입’으로 불리는 대변인이나 특보들 역시 전화 통화 한 번이 아쉽다. 자연 일주일에 한 번 국회 코앞의 사무실에 앉아 민감한 정치 현안에 대해 대선주자로부터 직접 입장을 듣는다는 것은 더없이 좋은 기회다.

    특히 이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신 시절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판결한 판사들의 실명을 공개했다. 앞서 32년 만에 무죄를 인정받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서도 박근혜 전 대표는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자연 기자들의 관심은 이에 대한 박 전 대표의 한 마디에 모아졌다.

    한중 열차페리 공약을 배경으로 자리에 앉은 박근혜 전 대표는 “여러분께서도 궁금한 것이 있으시겠지만”이라며 교육 정책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먼저 밝히기 시작했다. 20여분에 걸쳐 그의 ‘익숙한’ 교육 구상이 이어졌다. 대학의 자율성 확대와 전교조 비판 등 기존 한나라당의 교육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교육의 ‘명품화’라는 말이 조금 낯선 정도였다.

    이어서 기자들의 질문 순서가 됐다. 박 전 대표가 발표한 교육 관련 질문이 먼저 나온다. “이른바 3불 정책인 고교등급제, 본고사, 기여입학제에 대한 입장은?”, “2월 임시국회에서 사학법 재개정 의지는?” “고교 평준화를 주민투표로 결정하자고 제안했는데” 등.

    이어서 “무조건 정권교체가 능사가 아니다, 60~70년대식 개발독재는 안된다고 말한 주자가 있는데”라는 질문이 나왔다. 한나라당 대선주자인 손학규 전 지사가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시장을 겨냥해 한 말에 대한 박 전 대표의 반박을 요구한 것이다. 이제부터 박 전 대표가 ‘하고 싶은 말’에서 기자들이 ‘듣고 싶은 말’로 질문이 옮겨간다.

    “정권교체 안하고 이런 (교육, 기업, 일자리) 문제 해결할 수 있나. 야당으로서 아무리 해봤자 안되고… 뭘 가지고 개발독재식이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리더십은 전혀 다르다.” 박 전 대표의 거침없는 답변에 정치부 기자들의 노트북 두들기는 소리가 빨라진다.

    워밍업은 끝났다. 대다수 기자들이 이날 박근혜 전 대표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을 위해 질문을 던질 차례다. 하지만 물건도 팔기 전에 파장이라니. 박 전 대표의 한선교 대변인은 한 인터넷 매체 기자가 질문을 하려는 순간, 서둘러 오찬 장소로 이동을 요구했다.

    “현안 관련이다. 이 질문까지 받아 달라”는 요청은 “식사하면서 하시라”는 박 전 대표측 답변에 묻혔다. 기자들은 서둘러 오찬 장소로 이동했다. 한 테이블만 떨어져도 박 전 대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찬 장소에서 박근혜 전 대표측이 서둘러 기자간담회를 마무리한 이유가 분명해졌다. 박근혜 전 대표가 먼저 “오늘은 국민들이 고통 받고 있는 교육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며 기자들에게 정치 현안 관련 질문을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정치와 관련한 발언만 중요하게 보도되면서 자신이 이날 발표한 교육 구상은 전혀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심지어 박 전 대표 캠프의 안병훈 선대본부장은 한 기자가 박 전 대표에게 유신 관련 최근 현안에 대한 입장을 묻자마자, “그만하라고. 다음에 하라고”라며 손을 내젓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낸 바 있는 안병훈 본부장에 대해 다른 기자가 “선배가 그러시면 기자들 사이에 (안 좋은) 말이 돌지 않겠냐”고 지적하자 안 본부장은 “말이 돌아도 상관없다”며 “다음 기회에 하라”고 말했다.

    안 본부장은 “정치부 기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며 거듭 박 전 대표의 정치 현안 발언만 기사화되고 교육 구상은 보도되지 않는 문제를 지적했다. 하지만 기자들이 “오늘 기사화할 만한 새로운 교육 정책이나 공약이 없지 않았냐”, “보도자료만 뿌리면 되지 그럼 기자간담회는 왜 하냐”고 묻자 안 본부장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했다.

    결국 박근혜 전 대표는 기자들의 거듭된 질문에 유신 시절 판사들의 실명 공개와 인혁당 재건위 무죄 선고 등에 대해 “왜 하필 지금 발표하느냐”며 “저에 대한 정치공세”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 번 말문이 열린 박 전 대표는 이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이제 그의 주장이 어떻게 해석되고 평가될지는 박 전 대표나 기자들의 몫이 아니다. 유신 시절의 아픔을 직접 거쳐 온 세대는 물론, 올해 대선에서 한 표를 행사하고 대통령 후보감으로 박 전 대표를 저울질하며 그의 입장을 궁금해 하던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판단할 문제다.

    이날 오후 언론들은 박 전 대표의 “저에 대한 정치공세”라는 발언을 주요하게 다뤘다. 박 전 대표 측의 주장대로 교육 구상은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하지만 교육 문제가 유신시절에 대한 재조명보다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박 전 대표에게 ‘지금’ 듣고 싶은 말은 후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더불어 안병준 본부장과 한선교 대변인 등 캠프 관계자들의 이날 박 전 대표에 대한 과잉 충성 혹은 과잉 보호를 보며 든 생각 하나. 이미 대중과 스킨십을 넓히며 기존의 ‘수첩공주’ 이미지를 깨고 있는 박 전 대표를 그들이 오히려 입장이나 성명을 써줘야 하는 ‘수첩공주’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걱정 하나. 박 전 대표 캠프에서 오늘의 ‘학습효과’를 잘못 독해해 그나마 박 전 대표로부터 직접 입장을 들을 수 있던 정례 기자간담회가 자칫 사라지면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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