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동원정치’를 넘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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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1월 31일 03: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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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사회, 아니 진보진영은 ‘죽은 이론가의 사회’라고 할 만하다. 언제부터인가 이론적 논쟁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점에서 최근 최장집 교수의 논쟁적 문제제기, 이에 대한 조희연 교수의 비판적 논평은 손뼉을 쳐 반가워해야 할 경사이다. 조교수는 최교수의 논지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다.

최교수의 인식의 근저에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정치의 활성화와 정상화라고 하는 문제의식이 존재한다. 민주주의의 공고화의 핵심적 과제라고 할 수 있는 ‘대표체계의 민주화’를 포함하는 ‘제도정치의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그리고 참여정부는 이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 최교수 인식의 근저에 놓여있다.

최교수는 ‘사회의 광범위한 갈등이나 이해관계가 정당에 의해 대표되고 의회가 민의의 대표기구로 구실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인데, 참여정부는 “정당정치를 통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수렴하지 못하고 대통령이 당과 국회를 우회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려면 사회적 갈등들이 제도정치 내로 수렴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거리의 정치가 지배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운동의 동력에 의한 민주화’가 진전되어 왔지만, 이제 시대가 전환되었음에도 사회운동 나아가 제도정치에 진입한 운동 출신 민주진보세력(그 일부로서의 386 정치인들)이 관성적으로 운동에 기대는 방식으로 행위하고 있기 때문에, 정작 민주주의의 공고화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교수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위기’, 즉 제도정치의 정상화를 위협하는 운동정치의 과잉을 우려하고 있다

이런 인식 위에서 사회적 갈등을 흡수하는 제도정치의 안착이 중요하고 그 제도정치적 룰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참여정부의 실패를 인정하고 정권교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운동정치 과잉 탓으로 보는 건 잘못

우선 위기의 원인으로 운동정치의 과잉과 제도적 정당정치의 무시로 보고 있는 최교수의 입장을 비판한 조교수에 동의한다. 운동정치와 제도정치를 배타적으로 보는 것도 문제지만 현재의 위기를 운동정치의 과잉의 탓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문제는 운동정치의 부족이다. 최근 반핵반김모임, 뉴라이트 등이 보여주듯이 냉전적 보수세력의 운동정치가 활성화되면서 자유주의진영의 운동정치, 진보진영의 운동정치를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운동정치의 위기, 운동정치의 힘의 관계의 역전이 위기의 원인일 것이다.

물론 화염병으로 상징되는 기동전의 시대는 끝났는지 모른다(물론 기동전과 진지전을 배타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러나 거리의 정치, 운동정치가 기동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기동전이냐 진지전이냐가 아니라 시민사회(운동정치)냐, 정치사회(제도정치)이냐이다.

다시 말해, 최교수는 시민사회는 문제가 없는데 그 같은 시민사회의 힘이 정당정치가 제대로 제도화되지 않아 그리고 정당과 국회를 우회하는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스트적 정치행태에 의해 민주주의의 위기가 온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 손호철 교수
 

운동정치 힘 관계 역전이 문제의 핵심

그러나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현대정치에서 정당이 중요하고 정치사회가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의 참호인 시민사회이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은 시민사회에서의 힘의 관계, 운동정치의 힘의 관계인데 그것이 역전된 것이다. 이 점에서 답은 조교수의 지적대로 사회의 급진화(를 통한 시민사회의 힘의 관계의 재역전)에 있다.

그러나 최장집 교수의 문제제기 중 경청해야 할 부분이 있다. 최교수는 정당과 정치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는데 그같은 문제의식의 핵심은 오히려 제도정치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에 있다.

구체적으로, 최교수는 정당과 제도정치를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의 균열을 반영해 이를 조절하고 풀어나가야 하는데 우리의 경우 진보정당의 부재와 보수정당의 독점으로 정치사회가 시민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제멋대로 움직여 온 것을 비판하기 위해 정치사회에 주목해 왔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의 경우 당정분리, 열린우리당의 창당, 임기 초기의 이라크 파병으로부터 시작된 보수적 정책 등을 통해 정권과 열린우리당이라는 집권당을 시민사회의 지지세력(개혁세력과 호남)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개혁도 실패하고 지지층도 잃어버렸다는 것이 최교수의 비판 중 경청해야 할 합리적 핵심이다.

다시 말해, 최교수의 논지의 합리적 핵심은 조교수가 주목한 제도정치 중심적 시각에 기초한 제도정치의 후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정치(노무현정부와 열린 우리당)의 시민사회(개혁지지세력)로부터의 분리에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세력 대안 없으면 한나라당에 정권 내줘야

두 번째 핵심적인 쟁점은 노무현 정부라는 개혁세력이 실패했으니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 같은 정권교체가 반복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최교수의 주장이다. 이 문제 역시 개인적으로 최교수와 조교수의 중간 입장이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공감하는 것은 최교수의 주장 중 정권교체가 반복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부분, 즉 집권당의 책임을 묻는 정권교체의 제도화가 민주주의의 공고화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함의가 아니다. 오히려 “권력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면 열린우리당이든, 새로 만드는 정당이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최교수의 주장이다.

다시 말해, 나 역시 최교수와 마찬가지로, 아니 최교수보다 한 발 더 나가, 열린우리당이건 통합신당이건 자유주의세력(소위 개혁세력)이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에 따라 자신들이 군사독재시절보다 더 악화시켜 놓은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차라리 집권을 하지 말고 정권을 한나라당에게 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김대중, 노무현 정부처럼 사회적 양극화를 가속화시키고 민중들을 생존의 위기에 몰고 갈 바에는, 차라리 국정책임을 한나라당에 떠넘기고 자신들은 책임이 적은 야당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한나라당 집권의 역설적 긍정성

이와 관련, 우리의 민중들이 한나라당과 그 전신인 냉전적 보수세력 하에서 경험한 것은 개발독재일 뿐 신자유주의는 아니라는 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 국민들은 신자유주의, 그 폐해인 사회적 양극화하면 한나라당과 냉전적 보수세력이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정부와 자유주의 개혁세력을 연상하고 있다.

또 오히려 박정희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고 박정희를 그리워하고 있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집권해 한나라당식의 신자유주의정책에 의해 사회적 양극화와 민중생존의 파탄을 경험하고 문제의 핵심이 김대중, 노무현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있다는 것을 민중들이 직접 체험해야 한다.(그럴 리가 없지만 ‘일자리 창출이 최고의 복지이고 분배’라는 한나라당식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나의 예상과 달리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고 민중들을 파탄하게 구할 수 있다면 한나라당 집권은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될 때, 한국정치는 단기적으로는 후퇴할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는 발전할 수 있다.

이를 두 가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것은 지난 해 지방선거 그리고 잇따른 재보궐선거의 결과이다. 기록적인 열린우리당의 참패의 핵심에는 노무현정부의 신자유주의정책에 의한 민중생활을 피폐화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민중들은 그 대안으로 반신자유주의 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또 다른 신자유주의 정당인 한나라당을 선택했다. 이같은 정치의식의 한계를 깨기 위해서는 민중들이 한나라당의 신자유주의와 한나라당의 사회적 양극화를 직접 경험해 봐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 연정을 제의하면서 한 발언이다. 즉 일반적 통념과 달리 한나라당과 열린 우리당이 그리 차이가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사실 맞는 이야기로 그 말이 맞다면 열린 우리당과 별 차이가 없는(둘다 신자유주의 세력이라는 점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한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는가?

한나라당 집권 호들갑 떨 필요 있나

물론 노대통령이 주목하지 않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냉전문제이다. 그 때문에 자유주의적인 보수세력인 열린 우리당과 달리 한나라당은 냉전적 보수세력이다. 그러나 현 정세에서 신자유주의가 주전선이고 냉전문제는 부차적인 전선이다.

그리고 김대중 전대통령과 노대통령이 잘 지적했듯이 한나라당이 집권한다고 한반도에 전쟁이 나고 큰 틀의 햇볕정책의 기조를 포기하고 북한을 고립시켜 붕괴시키는 전략으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특히 사회적 양극화 등 실정에 대한 자기반성과 이에 대한 대안적 처방을 제시하지 않은 채 기간당원제냐, 기초당원제냐 하는, 국민들이 관심도 없는 말단지엽적인 문제 등을 가지고 탈당 등 소동을 벌리며 신당창당으로 상황을 반전시키거나 허구헌 날 가만히 있다가 선거를 1년도 채 남겨 놓지 않고 갑자기 개헌을 제기해 이를 중심으로 반한나라당전선을 만들어 볼까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최교수의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또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내에서까지 한나라당에 권력이 넘어가도 좋으냐는 식으로 윽박질러(최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려움의 동원”으로) 문제를 풀려는 것은 한마디로 코미디이다. 이제 유치한 ‘두려움의 동원정치’는 끝내야 한다.

차라리 반개혁국민후보가 답이다?

이와 관련, 최근 시민운동 내에서 한나라당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반(反)수구 국민후보 운동이 일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아직도 한국에서 초계급적인 국민후보가 가능한지 모르지만 설사 가능하더라도 현 정세에서 필요한 것은 반(反)신자유주의 국민후보, 반(反)사회적 양극화 국민후보, 반(反)부동산 폭등 국민후보이지 반수구 국민후보가 아니다. 아니 신자유주의가 (경제) 개혁이라는 이름하에 진행되어 온 점을 고려하면, 필요한 것은 반수구국민후보가 아니라 ‘반(反)개혁국민후보’인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조교수가 지적한 대안문제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고자 한다. 물론 대안은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정당이 아닌 진보진영(진보적 학계, 진보적 운동단체들)의 주된 임무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최근 유행하고 있는 지나친 대안에 대한 강조는 마치 진보진영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서 위기인 것과 같이 문제를 단순하고 왜곡할 우려가 있다. 사실 많은 경우 문제는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대안도 관철시킬 수 있는 사회적 힘이 없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그러하고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체근무제가 그러하다. 경제문제도 마찬가지다. 민주노동당이 제안한 부유세는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많은 대안을 생각할 수 있다. 97년 경제위기 당시에도 일방적인 정리해고 대신 민주노총과 진보진영은 일자리 나누기를, 한전 등 공기업의 민영화(사유화) 대신에 국민대표들로 구성된 공기업개혁위원회를 통한 공기업 개혁을, 재벌개혁에 대해서도 소액주주운동 대신에 노동자 경영참여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새로운 대안을 생각하기에 앞서 민중운동과 진보진영이 이미 제시한 대안들만이라도 관철시킬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백배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소수 지식인들에 의한 지적 기획에 대한 대중의 힘의 우위, 지적 기획에 대한 사회적 힘의 관계의 우위를 믿는다.

대안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대안이 아니라 기존의 대안이라도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의 급진화에 의한 사회적 힘의 관계의 전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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