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대국 국제정치의 기원,
    전쟁과 갈등 확산의 현재에 대한 함의
    [국방칼럼] 나폴레옹체제 붕괴 후 국제관계의 변화
        2022년 08월 10일 09: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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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갈등의 심화 등 국제질서의 전체적 틀이 흔들리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과거의 국제질서에 대해 배경, 구성, 유지, 위기, 평가 등에 대해 짚어보는 배인선 선생의 글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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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미∙중 상하이 공동성명’이 발표된 지도 벌써 50년이 되었다. 이 코뮤니케 탄생의 주역인 헨리 키신저는 지난 5월 스위스 다보스세계경제포럼 화상대담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 이전 상태(status quo ante)’로 되돌아가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발언하여 나이 99세에 수많은 비평가들의 성토를 받아야 했다. 그가 말한 ‘전쟁 이전 상태’는 지난 2월 24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경계선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와 돈바스지역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키신저는 이후 여러 인터뷰에서 ‘전쟁 이전 상태’는 전쟁을 시작한 곳에서 휴전선을 그어야 한다는 의미일 뿐이지 다른 뜻은 없다고 단호하게 반박했다.

    키신저의 진면목은 영국 주간지 스펙테이터와의 7월 2일자 대담에 잘 나타난다. ‘역사가 당신을 어떻게 평가할 것 같으냐’는 대담자의 질문에 키신저는 자신이 본능적으로 “미국이 많은 실패를 했지만 세계에서 선한 힘이었고, 세계 안정에 필수불가결하다는 신념의 지지자”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키신저는 기본적으로 지금의 국제질서가 국가 간 갈등으로 훼손될 위험에서 벗어나 미국이 주도하는 ‘안정적인 지속’이 계속되길 바라는 ‘현상유지론자’이다. 그는 국제질서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강대국 간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긴다. 키신저가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 문제에 대해 우려하는 것도 이 갈등이 강대국 간 직접적인 분쟁으로 증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키신저의 확신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시작된다. 1957년 자신의 학위논문을 보완하여 출간한 ‘회복된 세계(A World Restored)‘는 19세기 유럽의 국제질서였던 ‘유럽협조체제(Concert européen)’에 관한 연구서이다. 협조체제는 나폴레옹 몰락 이후 유럽의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국제질서로 평가받는다. 많은 서구학자들은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가 주재한 ‘빈 회의’에서 각국의 전권대사들이 최종 결정서를 채택한 1815년 6월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7월 이전까지 약 백년 동안 유럽이 평화의 시기였다고 주장해왔다.

    *1974년 5월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휴전협정 체결에 관여한 키신저를 뉴스위크가 슈퍼맨에 비유했다. 뉴욕타임스는 1973년 10월 그가 베트남 평화협정 조인에 대한 공로로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확정되자 캄보디아 폭격에 관여한 그를 비판하며 노벨전쟁상을 받게 되었다고 논평했다.

    유럽협조체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강대국’ 질서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기나긴 전쟁에서 최후의 승전국이 된 국가들로서 나폴레옹체제 붕괴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명분으로 1814년 3월 프랑스 쇼몽조약을 통해 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주도하게 되었다. 4개국은 이 조약에서 ‘열강’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지칭됨으로써, 유럽의 나머지 국가들보다 실질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서게 되었다. 이들 4국은 1818년 엑스 라 샤펠(현 독일 아헨) 회의에서는 프랑스도 같은 지위를 부여하는 데 합의함으로써 협조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된다.

    여기에 19세기 후반 이탈리아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과 일본이 이 대열에 가세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강대국 질서’를 만든 열강(Great Powers)’의 탄생이다. 강대국 정치는 194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이 제기한 미∙영∙중∙소가 전후 국제질서를 관리(trusteeship)해야 한다는 이른바 ‘4국 국제경찰론’(Four Policemen)과 냉전이론가인 조지 케넌이 소련을 견제하고자 독일과 일본을 재건하기 위한 논리로 삼은 미∙영∙서유럽∙일∙소 5대 중심론, 2012년 5월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 후진타오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 처음 제기한 ‘신형대국관계론’으로 이어져 왔다.

    이 당시 5대 강대국 안에서도 힘의 우열이 존재했다. 폴 슈뢰더에 따르면 이 체제는 나폴레옹 격파에 가장 공이 크고 상대적으로 국력이 우세하며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영국과 러시아의 이중패권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두 국가는 강대국 지위를 독점하지 않고 자의반 타의반 경쟁국들과 기득권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전쟁터이자 화약고였던 중부유럽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함에도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한 이후부터 구심점이 없었다. 이 지역을 계속 방치한다는 것은 강대국들 간의 또다른 세력다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친나폴레옹인 ‘라인 동맹’을 해체한 후, 상대적으로 약체인 오스트리아가 이 지역 독일계 소국들의 공생 기반이 될 ‘독일 연방(Deutscher Bund)’을 수립하고 북이탈리아까지 아우르게 된 것은 새 정치적 중심이 프랑스와 러시아, 프로이센(당시 최약체) 모두를 견제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는 전후 안정된 질서 구축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국가 간 힘의 격차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질서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콘서트’ 정신에 있다. 콘서트의 어원에는 협력, 조화, 화합의 뜻이 담겨 있다. 서구 역사에서는 개인의 명예가 훼손되었을 경우 무기를 들고 일 대 일 결투를 하던 오랜 관습이 있었고, 국가도 마찬가지로 모욕을 받았다고 느낄 경우 당연히 전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

    예컨대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 6월 초 툴루즈의 일간지 ‘라 데빼쉬’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를 모욕해서는 안된다.(pas humilier la Russie)”고 말한 것을 두고 많은 언론들이 그를 과도하게 비판했지만, 이 발언에서 우리는 “다른 강대국을 위협하거나 모욕해서는 안된다”는 19세기 강대국 외교의 제1원칙을 떠올려야 한다. 이 원칙은 지금도 국제정치학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글귀로 강대국 사이에서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직접적인 도전과 대결만은 피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동의 적을 상대하면서 국가들 간에는 정서적 유대감이 커졌으며, 참전국들은 대규모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끊임없는 전쟁에 대한 피로감 때문에 종전 후에도 전쟁을 통한 문제해결보다는 상대국 입장을 진지하게 검토하려는 자세를 먼저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강대국 모두가 조약을 준수한다는 보장이 없고, 국제정세의 특성상 갈등 해결이 필요한 사안은 언제든지 생길 수밖에 없다.

    5국은 이러한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안전장치로써 평시에도 당면과제가 부상할 때마다 1815년 파리강화조약 제6조에 의거 각국의 전권대사들을 소집한 ‘회의’(Congrès)에서 합의를 도출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들은 집단적 패권을 추구한 것이다. 에릭 홉스봄은 이 방식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회의의 모태로 보았는데, 유럽협조체제가 상설기구가 없다는 점에서 G7, G20 정상회의 등도 이 흐름에 포함된다.

    19세기에 개최된 회의에서 치열한 협의를 거쳐 조약이나 규약 형태로 최종 정리된 합의는 규범과 규칙, 전례가 되었다. 1790년을 기준으로 새롭게 설정된 국경을 변경하려는 행동은 이제 각국의 권리와 체제 규범을 훼손하는 행위로 여겨짐에 따라 공동 압력을 불러일으켜 전쟁이 억제되고 체제가 안정되는 효과를 낳기 시작했다. 1853년 크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유럽 각국의 경계선은 큰 변화가 없었다. 동맹은 합의된 사항의 준수 여부를 관리하는 역할이 추가됨으로써 체제 유지의 기능이 더해졌다. 협조체제라는 틀 속에서 서로 간의 행동을 구속하려는 노력은 현대 ‘협력 안보’ 개념의 토대가 되었다.

    5국이 ‘콘서트’ 정신으로 얻고자 했던 목표는 ‘평형’(équilibre)으로 유럽의 군사적 균형이 아니라 정치적 안정이었다. 정치적 안정은 국제적으로는 전쟁 재발을 막고, 국내적으로는 혁명의 분출을 억제하는 것이다. 헨리 키신저에 따르면 안정은 평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합의된 질서의 틀을 받아들이는 데서 나온다. 그는 그것을 국제질서의 ‘정당성(Legitimacy)’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협의를 통해 이견을 해소하는 질서는 여전히 ‘정당한 지배자’인 군주의 권위에 의존했다. 군주제에 기반을 둔 협조체제는 군주제의 존속이 곧 체제 안정이었다. 그러므로 이 체제는 자코뱅이나 급진주의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와 같이 군주제와 이질적인 이데올로기를 용납할 수 없었다. 국경선의 변동을 야기하는 민족주의도 협조체제가 수용할 수 없는 이념이었다. 이 체제의 설계자인 메테르니히와 카슬레이가 반동주의자라는 오명을 듣게 된 것은 그 같은 이유에서였다.

    * 당시 프랑스인이 그린 ‘빈 회의’ 그림이다. 러시아 황제(가운데)와 오스트리아 황제(왼쪽), 프로이센 왕(오른쪽)이 빠 드 트루아라는 3인 춤을 추고 있다. 영국 카슬레이(빨간옷)는 지그라는 춤을 추고 있고, 프랑스 탈레랑(맨 왼쪽)은 바라만 보고 있다. 왕관을 움켜진 사람은 작센 왕이며, 그 옆은 여성으로 묘사한 제노바 공화국 총독이다. 오스트리아 국고가 탕진될 정도로 회의보다는 먹고 마시고, 노는 데 관심이 더 많았던 당시 상황을 풍자한 것이다.(영국박물관 소장)

    칼 폴라니와 에릭 홉스봄은 국제정치의 상대적 자율성에 입각하여 유럽협조체제를 평가한 학자들과는 다르게 자본의 발전이 국제정치 변화에 미친 영향에 주목했다. 먼저 칼 폴라니는 19세기에 전쟁이 억제된 이유를 협조체제가 아니라 그가 ‘오트 피낭스’(haute finance)라고 부른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초기 국제금융자본의 독자적인 힘에서 찾았다. 금융자본의 신용 확대와 이윤 추구의 최대 걸림돌은 강대국들의 전면전이었다. 그는 당시 ‘오트 피낭스’가 자본의 최대 위협인 대규모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우연찮게도 강대국들 사이의 갈등을 상시적으로 조정하는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평화가 왔다고 주장했다.

    에릭 홉스봄은 1848년 이전 상황은 나폴레옹체제 붕괴로 부활한 절대주의의 지배구조 속에서 ‘프랑스대혁명과 산업혁명으로 탄생한 자본주의적인 정치와 경제’(이중혁명)가 의식적으로 저항하던 시기로 생각했다. 이는 토지에 기반한 기존 귀족체제가 자본주의 발전과 자유주의 혁명을 강력하게 가로막았던 것(열강의 협조)이 역설적이게도 유럽의 평화를 지속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1848년 혁명 이후 국가는 혁명과 그로 인한 전면전의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자본주의 팽창이 본격화되면서 이 시기 유럽에서는 크림전쟁을 비롯하여 몇 차례의 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1871년 체제 재편이 끝나자 유럽이 다시 평화의 시기로 재진입했다고 보았다.

    19세기를 영국의 평화, 이른바 ‘팍스 브리타니카’로 보기도 한다. 자유주의 국제정치학을 대표하는 학자인 존 아이켄베리는 유럽에서 나폴레옹 체제가 붕괴한 1815년에 영국의 패권이 확립됨으로써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기원이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이 해석은 영국의 힘으로 평화가 온 19세기와 ‘팍스 아메리카나’의 힘으로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현 국제질서가 유사하다는 논리에 기반하여 21세기 미국 주도 세계질서를 공고하게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패권안정론’ – 자유주의 국제질서 유지에 단일 패권국의 강력한 지도력은 필수 – 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팍스 브리타니카’는 빅토리아 시대(1837~1901년)를 상징한다. 이 당시 영국은 해상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각 지역에 자유무역을 관철하고, 자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19세기 말이 되자 세계 주요 항로와 해협에서 영국 해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영국의 단독 패권으로 보는 관점은 많은 허점과 한계가 있다.

    첫째 푸랑스와 쿠르제는 ‘팍스 브리타니카’가 신화이자 현실로써 유럽의 평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협조체제 수립 이후 유럽에서 전쟁의 위험이 낮아지고 정세가 안정되면서 자국의 장점인 해군력을 다른 목적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영국의 군사력은 압도적이지 않았다. 위르겐 오스터함멜에 따르면 해양패권에 주력한 영국은 상대적으로 육군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상비군 비보유 원칙’을 지속적으로 지켜나갔다. 따라서 영국은 지금의 미국처럼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치명적인 군사력과 개입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셋째 영국은 유럽의 정세를 주도하지 못했다. 폴 슈뢰더는 영국이 협조체제에서 ‘자애로운 균형자’를 자처하다가 나중에는 ‘무책임한 방관자’로 돌아섰다고 비판했다. 영국에서 자유주의가 확산되고, 자국 정치체제가 유럽의 전제군주국들보다 우월하다는 선민의식이 퍼지면서 협조외교가 영국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이 대두했고, 유럽 열강들끼리 알아서 잘 견제하면서 평화를 유지할 것이라는 ‘자유방임’(laissez-faire)에 기댄 낙관적인 정세 인식 때문에 유럽대륙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팍스 브리타니카’는 푸랑스와 쿠르제가 말한 것처럼 유럽 바깥에 만들어졌고, 유럽이라는 벽을 뚫지 못하는 한계를 가졌다.

    * 폴란드 크라쿠프 자유시(1815~1846년)를 그린 그림이다. 비엔나 회의 후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도시국가로 폴란드의 마지막 영토였으나, 1846년 오스트리아에 귀속되었다. (크라쿠프 국립 기록 보관소)

    유럽협조체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약소국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평등한 체제였다는 사실이다. 협조체제에 대한 소국의 협력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고, 강대국 간의 평화가 약소국의 생존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마티아스 마스는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강대국들이 대립에서 협력으로 기조를 바꿈에 따라 약소국들의 운신의 폭이 줄어들었다. 둘째, 강대국들이 소규모 국가의 출현을 억제했다. 셋째 협조체제가 민족주의 열기를 통제하지 못함에 따라 이탈리아, 독일의 국민국가가 출현하여 소국들을 대거 흡수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면 19세기 중후반 자본의 발전으로 더 큰 시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약소국의 운명은 체제의 안정과 유지에 기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폴란드, 베네치아, 제노바가 사라졌다. 예컨대 4국은 벨기에의 작은 군사력으로는 프랑스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독립을 불허하였다가, 네덜란드연합왕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다시 커지자 1830년 벨기에 독립을 사실상 승인했다. 작센은 영토의 40%가 프로이센에 귀속되었지만 살아남았다. 4국은 프로이센의 서부 진출이 프랑스를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고, 프랑스는 친나폴레옹이었던 작센을 작게라도 생존케 하여 프로이센의 성장을 제한하려고 했다.

    ‘팍스 브리타니카’로 평화가 왔다는 것이 지나치게 앵글로 색슨적 관점이라면, 협조체제로 평화가 왔다는 것도 유럽중심주의적인 해석이다. 이 같은 주장은 비서구인 입장에서는 도저히 수용하기 어렵다. 웨르겐 오스터함멜은 19세기를 유럽은 평화로웠던 반면에,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전쟁으로 찢겨졌다고 평가했다. 협조체제는 제국주의∙식민주의와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 이 체제는 유럽에서는 국가 간 경쟁을 억제한 반면, 비서구권에서는 그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이 시기 국제관계는 전쟁수행능력이 국가 간 위계를 결정했다. 예컨대 1837년부터 1901년까지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영국은 약 60차례의 식민지 전쟁에서 400회가 넘는 전투를 치렀다. 로렌스 프리드먼은 이 전쟁들을 일컬어 유럽인들이 군사적 기술과 조직을 갖추지 못한 민족들을 겨냥한 정복전쟁이었다고 정의했다.

    *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78∼1880년)에서 개틀링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군. 에릭 홉스봄은 개틀링 기관총(1861년)과 근대적인 폭약(1866년)의 발명을 비롯한 화기의 대량생산이 전쟁형태를 바꾸고 공업경제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초래했다고 평가했다.(히스토리이즈나우)

    이와 같이 19세기 유럽협조체제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기반한 다극체제로서, 중견국, 약소국, 비서구 지역 입장에서는 매우 차별적인 체제였다. 협조체제 하에서 국내정치 시스템 또한 자유주의를 억압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이 체제에 대한 당대 인식은 결코 좋지 않았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 두 차례의 전대미문의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핵전쟁으로 인류가 공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커지게 되었다. 20세기 서구인들은 19세기를 상대적으로 전쟁이 없고, 세계를 주도했던 ‘유럽의 세기’라고 불린 향수 어린 시기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변함에 따라 이들은 강대국들 간의 전면전을 가로막고, 유럽 팽창의 기반이 된 협조체제의 장점에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규모 전쟁에 대한 반성 아래 설립된 국제기구인 국제연맹과 유엔(국제연합)은 상임이사국 회의라는 협조체제 방식을 공식적으로 도입했다. 국제기구가 전쟁 방지와 평화 정착을 목적으로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특정 국가나 집단이 힘의 우위를 내세워 상임이사국 회의를 장악해서는 안된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도 그같은 이유에서 도입되었다. 그런데 국제기구에서 강대국 간의 권력 분점을 위한 메커니즘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국제질서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길핀에 따르면 강대국들은 ① 어느 국가가 국제체제를 지배할 것이며, ② 국제체제 안에서 어느 국가의 이익을 먼저 보장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권력 배분’(distribution of power)을 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국제체제의 ‘권력 배분’ 방식은 독점(일극체제), 복점(양극체제), 과점(다극체제) 형태로 이루어져왔고, 강대국은 이 같은 모델을 활용하여 다른 국가들에 대한 통제를 추구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그때까지 열강으로 불리던 강대국(Great Power) 간에도 분화가 이루어졌다. 1943년 국제정치학자인 윌리엄 TR 폭스는 미국, 영국, 소련을 지칭하는 ‘초강대국’(Super Power)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폭스는 초강대국을 강대국들 중에서도 ‘전세계에 걸쳐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great mobility of power)로 정의했다. 데릭 리베어트는 1957년 10월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위성 발사 성공을 기점으로 영국이 초강대국 대열에서 탈락했다고 주장했다. 일부 강대국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인류가 그다지 경험해 보지 않은 양극체제, 일극체제가 등장했고, 이에 초강대국은 국제기구를 통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자국의 영향력을 관철할 수 있었다.

    국제기구의 활동이 강대국 정치로 인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휴 화이트는 제도에 집착하지 말고, 강대국들 간에 합의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방안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협조체제 방식을 통한 국제문제 해결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이른바 ‘비공식 강대국 운영위원회’(steering group)를 만들어 이 틀에서 이견을 효과적으로 조율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 중국, 러시아, EU, 인도, 일본 등을 중심으로 일부 지역강국과 지역기구를 참여토록 하는 형태의 새로운 조정 그룹을 구상해왔다.

    * 1822년 8월 자살한 카슬레이의 초상화이다. 유럽협조체제 설계자 중 한 사람인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무장관 중 한 명이었다. 카슬레이는 아일랜드 독립을 무산시키고, 사회개혁 요구를 가혹하게 탄압한 토리당 정권의 핵심으로, 유럽외교를 둘러싸고 휘그당과 갈등을 겪었다. 자살자의 안장을 금하는 성공회법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그의 부고를 들은 급진주의자들은 환호와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Liam McBurney/PA)

    협조체제방식을 통해 21세기 문제를 해결한다는 구상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강대국 간에 대타협을 일으킬만한 공통분모가 없다. 19세기 협조체제의 주역들은 모두 각국의 왕과 귀족이었다. 이들은 혁명이 국경을 넘는 순간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공유했고, 혁명으로부터 지배계급의 기득권을 지켜야 한다는 데에 이심전심이었다. 그런데 현재 강대국 사이에는 즉각적인 해결이 요구되는 절실한 당면과제가 없어 보인다.

    둘째,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와 같다. 협조체제 내의 강대국들은 서로 대등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 강대국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강대국 스스로 전략적 경쟁을 포기하고, 자국의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결국 특정사안에 대한 개별 강대국의 양보가 필요하지만, 이 같은 행위는 강대국 권위, 다시 말해서 주변국들이 그 강대국의 힘이 쇠약해진 신호로 받아들이게 되고, 이후 협상에서도 계속해서 불리한 처지에 놓일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강대국 스스로 자국의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셋째, 중견국과 약소국의 희생이 담보될 가능성이 높다. 19세기 협조체제가 조화와 협력의 ‘콘서트정신’에 바탕을 두었다고 하는 것은 역사가들이 너무 아름답게만 해석한 것이다. 합의에 이르는 과정은 협력과 포용뿐만 아니라 암묵적인 강압과 노골적인 강요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상이한 이해관계는 전후 처리과정에서의 영토 분할로 무마됐고, 유럽 이외 지역에서의 경쟁은 큰 문제가 없는 한 간섭 배제가 원칙이었다. 21세기 협조체제도 이와 크게 달라지기 어렵다.

    넷째, 현대의 법적, 제도적 절차를 통한 문제해결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법과 절차를 준수하는 민주적 원칙에 기반해서 국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이상주의가 탄생한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과정이 매우 비효율적이고, 성과가 지지부진하다고 해서 19세기로 되돌아가 강대국만의 밀실외교에 의존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고는 너무 낡은 관념이다.

    약소국 입장에서는 강대국들 간의 협력과 갈등 구도 모두 자국의 이해관계와 상충될 여지가 크므로 항상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약소국의 정책이 주변 강대국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렇기에 약소국은 언제나 국제법(규범 기반 국제질서가 아니다) 준수의 원칙을 가져야 하며, 강대국들이 각종 국제기구와 국제제도를 무력화시킬수록, 이에 휩쓸리지 말고 국제기구의 강화와 참여를 강조하는 전략을 견지해야만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앞으로 미국이 주도하지 않는 국제기구(예를 들면, 브릭스플러스)에 가입하여 국제기구 가입의 균형을 맞추는 것도 필요하다. 이것을 ‘초월’(transcend) 정책이라고 부르며, 미국이 외면한 국제연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1930년대 멕시코 등의 외교정책에서 이와 같은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 때로는 불편하더라도 강대국에 편승(bandwagon)하기도 해야 하며, 교류와 협력을 통해 상대가 변화할 수 있도록 관여(engagement)하는 것도 필요하고, 상대의 힘에 힘으로 맞서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 <국방칼럼> 연재 링크

    필자소개
    국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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