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비 이야기-2
    장수(長壽) 노비 갑덕에 대하여
    [컬렉터의 서재] 과거를 보며 오늘을 생각한다
        2022년 07월 22일 11: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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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회의 글 <노비 이야기-1 순철이, 소석기 그리고 순심이의 삶>

    2편이 조금 길다. 역사의 흔적들을 살피는 마음으로 끝까지 읽기를 부탁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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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고두고 아쉬운 문서가 한 장 있다. 2020년 5월 나는 흥미로운 노비 문서 한 장을 온라인 경매에서 낙찰받았다. 이 문서는 광서 10년 갑신년, 즉 1884년 유학 이기석(李麒錫)이 ‘삼세(三稅)’를 낼 길이 없어 그 비용을 마련하고자 자신의 노비를 유학 김응수(金應秀)에게 팔면서 작성한 것이다. 이기석이 팔았던 노비는 30세 비(婢) 순절(順切)과 6세 어린 비(婢) 연월(連月) 2명으로 가격은 합쳐 65량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 문서에 주목한 것은 문서 말미에 적어놓은 특이한 약정 사항 때문이었다. 많은 노비 문서를 봤어도 이런 내용은 처음이었다.

    ‘此亦中三年內若有逃躱是去等本價還給事’

    여기에서 ‘逃躱’(도타)는 ‘몰래 도망쳐서 숨어버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만약 3년내에 도망가 숨어버리면 판 가격을 되돌려주겠다는 내용으로, 당시 노비 도망이 얼마나 빈번했는지 짐작케 한다. 아무도 응찰하는 이가 없어 나는 이 문서를 시작가 10만원에 낙찰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며칠 뒤 판매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 문서를 어디에 두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돈을 환불해 주겠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되는 바였다. 나 역시 자료 더미 속에서 원하는 자료를 찾지 못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찾으면 후에라도 연락을 달라고 했고, 그 후로도 몇 번 확인했지만 그 문서는 결국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노비가 도타한 것이 아니라 문서가 도타했고, 노비를 사들인 김응수가 아니라 이 문서를 구입한 내가 돈을 환불받은 꼴이 되고 말았다. 2년 뒤인 2022년 5월 갑자기 판매자에게서 문자가 오긴 했다. 나는 드디어 그 문서를 찾았나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지방선거에서 구의원 후보로 출마했다고 지지를 호소하는 단체 문자였다. 판매자가 정치에 발을 들인 것으로 보아 이 문서가 내게 올 가능성은 더욱 멀어지고 말았다.

    [사진] 노비 매매 후 3년 이내에 도망가면 돈을 환불해주겠다는 약속을 부기한 특이한 노비 매매 문서이다. (코베이 화면 캡쳐)

    이 문서는 지금도 많은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다시는 내가 수집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 문서는 1880년대 당시 조선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자료임이 분명하다. 순조 원년인 1801년 공노비 66,000여명이 해방되고, 고종 23년 1886년 ‘사가노비절목(私家奴婢節目)’으로 노비 세습제가 폐지된 데 이어, 1894년 결국 노비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신분제는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세금 낼 돈이 부족했던 유학 이기석은 자신이 파는 노비는 절대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만약 도망가면 돈을 물어주겠다는 약속까지 하며 자신의 두 노비를 김응수에게 팔았던 것이다.

    호구단자를 통해 본 하동의 류씨 집안

    최근에 이기석과 김응수 사이의 노비매매 문서만큼이나 흥미로운 호구단자 문서를 수집하게 되었다. 2022년 6월 말 나는 온라인 경매를 통해 옛 호구단자 10장을 수집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조선후기 호구단자 9장과 대한제국 광무 연간의 호적표 1장이다. 경상도 하동에 살던 류씨 집안의 4대에 걸친 호적 자료인데, 이는 1729년부터 시작하여 1898년까지 약 170년에 걸쳐 있다. 류우원(柳遇元)-류양권(柳良權)-류동현(柳東炫)-류원기(柳原基) 4대에 걸쳐 이어지는 10장의 호적자료는 신분제가 폐지되는 1894년을 관통하고 있다.

    이 집안의 호적자료에서 특이한 것은 4대에 걸쳐 모두 개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류우원은 원래 이름이 류기룡이었고, 류양권은 류형에서 개명한 것이고, 류동현은 원래 류재룡, 그 이전에는 류재근이었다. 류동현의 동생 류복현도 원래는 류재삼이었다. 4대 류원기도 원래 이름이 류기홍이었다. 개명은 과거 합격이나 장수를 위해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집안의 경우 확신할 순 없지만, 다른 집안에 비해 자손이 매우 귀했던 사실로 미루어 아마 아들을 낳아 대를 잇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이 호구단자를 수집한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이 집안 호구단자에 3대에 걸쳐 꾸준히 등장하는 ‘갑덕(甲德)’이라는 이름의 여자 노비 때문이었다. 류우원 호구단자에만 없고, 이후 류양권으로부터 류동현, 그리고 류원기까지 3대에 걸쳐 세습되고 있다.

    [사진] 하동의 류씨 집안의 170년에 걸친 호적 자료들이다. 첫 문서는 1729년에, 마지막 문서는 1898년 작성된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이 집안에서 일어났던 많은 변화들을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다. (박건호 소장)

    이 문서들은 온라인 경매에 한 묶음으로 올라온 것이 아니라 낱장 단위로 따로따로 올라온 것이었다. 내가 처음 접한 이 집안 호구단자는 광서 20년(1894) 자료였다. 이 자료 속에서 나는 노비 갑덕을 처음 만났다. 그녀는 당시 류원기(45세) 집에 딸려 살았는데, ‘갑진년 생’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노비 갑덕이 태어난 갑진년은 서기로 환산하면 몇 년도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1894년 이전의 갑진년으로는 1844년이 있다. 누가 봐도 갑덕이 이 해에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래야 갑덕의 나이는 51세로 적정한 나이가 되는 데 비해, 만약 60년을 더 끌어올려 1784년 갑진년생으로 보면 111세가 되니 조선시대 평균 연령을 고려했을 때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비 갑덕이 태어난 해는 놀랍게도 1784년 갑진년이었다. 1894년 당시 나이 111세가 맞다는 이야기다.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광서 20년 이전에 작성된 다른 8장의 호구단자를 통해서였다. 그녀는 1858년 류양권의 호구단자에 집안 노비로 처음 등장하는데, 이때 이미 나이가 75세였다. 그 이후 아들 류동현, 그리고 손자 류원기 3대에 걸쳐 세습되고, 해를 거듭할 때마다 81세, 84세 이런 식으로 나이가 늘고 있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나이 대신 ‘갑진년생’으로 바뀌긴 했지만 말이다. 1894년 한 장의 문서로는 알 수 없던 내용을 전체 문서 속에서 놓고 보았을 때 노비 갑덕이 태어난 연도가 1844년이 아니라 1784년 갑진년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갑덕의 나이가 이렇게 많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 호기심으로 이 집안 호구단자를 죄다 수집해서 전체적으로 검토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수집한 것이 총 10장의 문서였던 것이다. 지금부터 하동부에 살았던 이 류씨 집안의 호적 자료들을 살펴볼 것이다. 이 집안의 가족사와 함께 그 속에 있던 노비 갑덕에게도 주의를 기울여 보자.

    살펴볼 호구단자를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1729년 기유년, 1855년 을묘년, 1858년 함풍 8년, 1861년 신유년, 1864년 갑자년, 1879년 광서 5년 기묘년, 1885년 광서 11년 을유년, 1891년 광서 17년 신묘년, 1894년 광서 20년 갑오년, 1898년 광무 2년 자료이다. 지금부터 1729년부터 1898년까지 약 170년간의 시간 여행을 하는데, 등장하는 사람들이 꽤 많으므로 주의를 기울여 계보를 따라 오시기 바란다.

    [사진] 1712년 기유년 류우원의 호구단자이다. 붉은색 점을 찍은 것이 이 집에 거주하는 3명이며 문서 한가운데 크게 ‘三口’(3구)라고 따로 써 놓았다. 오른쪽 붉은색 테두리에서는 류기룡이 류우원으로 개명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고, 왼쪽 붉은색 테두리 안에는 이 집에 함께 거주한 ‘10세 고공녀(雇工女)’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박건호 소장)

    첫 번째 호구단자는 1729년 기유년에 작성한 것으로 당시 국왕은 영조였다. 이때 주호(主戶; 오늘날의 호주와 비슷한 개념)는 류우원으로 그는 당시 26세였다. 원래 이름은 ‘류기룡(柳起龍)’이었으나 ‘류원우(柳遇元)’로 개명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류원우의 아내 홍씨 역시 26세였다. 그 둘 사이에 자식은 없다. 다만 이 집에는 ‘고공녀(雇工女) 10세 경자생’ 한 명이 얹혀 살고 있다. 총 3명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소녀를 ‘노비’가 아니라 ‘고공녀’로 기록한 점이 특이한데 무슨 사유인지는 모르나 이 집에 얹혀 살면서 집안 일을 도와준 여자 아이로 보인다. 고공은 남의 집에 기식하면서 집주인의 부림을 받던 사람을 뜻한다. 노비가 주인과 신분적인 지배 관계로 맺어졌다면, 고공 혹은 고공녀는 경제적 지배 관계로 맺어진 점이 다르다. ‘고공녀 10세 경자생’ 뒤에 붙여 쓴 글자는 ‘가현(加現)’으로 보이는데, 보통 ‘가현’은 호구단자에 새로 등재되었음을 뜻하는 용어이다.

    [사진] 1855년 을묘년 류양권의 호구단자이다. 6명의 이름에 붉은 점이 찍혀 있고, 가운데 ‘六口’(6구)라고 써 놓았다. 노비 72세 ‘노 갑득’에 대한 기록이 제일 끝부분에 보인다. 이후의 문서에서는 모두 ‘비 갑덕’으로 바뀌어 기록되어 있다. (박건호 소장)

    두 번째 자료는 첫 번째 호구단자가 제작된 지 무려 126년이 지난 1855년 ‘을묘년’에 작성된 자료이다. 이때는 철종 재위 6년째 되는 해였다. 이 문서에서 류양권이 주호로 나오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80세, 그의 아버지 이름은 첫 번째 문서에서 봤던 류우원으로 되어있다. 아내 이씨는 68세였다. 계산해보면 류양권이 태어난 연도는 1775년이다.

    다시 정리해보자. 첫 번째 호구단자가 1729년에 제작되었고, 당시 26세였던 류원우는 자식이 없었다. 류원우의 나이로 보아 자식이 있었다면 아무리 많아도 10세 미만이었을 것이고, 그 나이에 따로 독립해서 살았을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아들이 있었는데 누락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아들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126년 뒤에 그의 아들인 류양권이 80세다? 류양권은 1775년도 태어났으므로 류원우가 72세 때 아들을 얻었다는 뜻이다. 그건 쉽지 않다. 아내도 그때 60세로 아이를 낳기는 너무 늙은 나이였다.

    류양권은 자식이 없었던 류원우가 72세 때 낳은 것이 아니라 후사를 잇기 위해 양자로 입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중에도 나오지만 이 집안은 자손이 상당히 귀했다. 다시 문서를 보자. 문서에서 80세 류양권은 30살의 류형(柳珩)과 27살의 류경(柳璟)을 두고 있다. 장남 류형은 같은 나이의 양씨와 이미 혼인한 상태였으며 사이에 아직 자식은 없다. 그리고 문서 끝에 72세의 ‘노 갑득(甲得)’이 등장한다. 이 집에 노비는 갑득 혼자다. 이렇게 사노가 1명 있는 경우는 성별에 따라 단노(單奴), 단비(單婢)라 불렀다. 이상한 것은 이 문서에서만 ‘노 갑득(奴 甲得)’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후 문서부터는 모두 ‘비 갑덕(婢 甲德)’으로 기록된 점이다. 이름과 나이를 종합해보면 ‘갑득’을 ‘갑덕’으로 잘못 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갑득’을 ‘갑덕’으로 이름만 잘못 썼다면 이해가 되는데, ‘노(奴)’와 ‘비(婢)’ 성별을 바꿔 쓴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점이 이 집안 호적자료의 최대 미스터리다. 호구단자는 3년마다 작성해 신고했는데, 1855년 호구단자 이전의 자료를 수집해 볼 수 있다면 ‘노 갑덕’이 ‘비 갑덕’을 잘못 기록한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터인데, 아쉽게도 그 자료들은 빠져 있다.

    한편 첫 번째 문서에 나오는 고공녀와 이후 나오는 ‘노 갑득’ 혹은 ‘비 갑덕’의 관계도 궁금하지만 자료로서는 알 수 없다. 노 갑득, 비 갑덕은 ‘고공녀 경자생 소녀’와는 태어난 연도가 64년 차이가 나는데 혹시 이 고공녀의 후손으로 이 집의 노비로 살아간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만 해본다.

    세 번째 문서를 보자. 위 문서로부터 3년이 지난 함풍 8년 철종 9년, 즉 1858년에 작성된 것이다. 3년 전과 달라진 점은 류양권의 나이가 83세, 아내의 나이가 71세 등 가족들의 나이가 세 살씩 늘어난 변화는 당연한 것이고, 제일 큰 변화는 첫째 아들 류형의 이름을 류재근으로 개명했다는 점이다. 류재근은 33세인데 아직 부인 양씨(32)와 사이에 아들이 없다. 둘째 아들 류경의 이름 밑에는 ‘고(故)’라고 써 놓은 것도 큰 변화다. 양권의 둘째 아들이 무슨 이유인가로 죽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앞의 문서에 나왔던 ‘노 갑득’은 이 문서부터 갑자기 ‘비 갑덕’으로 바뀌어 기록되었다. 갑덕은 1784년 갑진년생이었다. 1855년 72세 ‘노 갑득’은 3년 후 1858년 자료에서는 75세의 ‘비 갑덕’으로 기록되었다. 갑득과 갑덕을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은 나이가 그대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노비가 많은 집안이 아니라 한 명만 있는 집이기 때문에 노비 소유에 큰 변동이 없었다는 점도 그렇게 보는 이유이다. 당시 이 집에는 류양권 부부, 아들 류형(류재근) 부부과 비 갑덕 이렇게 모두 5명이 살았다.

    [사진] 왼쪽은 세 번째 문서인 1858년 호구단자, 오른쪽은 네 번째 문서인 1861년 호구단자이다. 붉은색 네모 테두리에서 보듯 비 갑덕은 각각 75세, 78세로 기록되어 있다. 왼쪽 문서에서 붉은색 둥근 테두리 부분에서 아들 류경이 죽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고, 오른쪽 붉은색 둥근 테두리 부분에서 ‘가솔자(加率子)’ 류재삼 부부 기록이 보인다. (박건호 소장)

    이어 네 번째 문서로 가보자. 위 문서로부터 3년이 지났다. 때는 1861년 신유년, 국왕은 여전히 철종이다. 2차 아편전쟁 결과로 체결된 1860년의 베이징조약으로 아라사(러시와)와 새로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접하게 된 직후였다.

    1861년 그해 아라사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령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아는 이는 조선에 없었을 것이다. 이 해에 주호 류양권은 86세, 아내 이씨는 74세였다. 큰아들 류재근(36)과 부인 양씨(35) 사이에는 아직 아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특이한 것은 이 문서에 ‘가솔자(加率子)’라고 하여 아들 부부 두 명을 추가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름은 류재삼이고 나이는 30세다. 86세의 류양권이 지난 3년 사이에 30세의 재삼이를 낳았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류재삼 부부는 누굴까? 양자 입양으로 볼 수도 있겠다. 큰아들이 벌써 30대 중반을 넘었는데, 아들이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새로 양자를 하나 들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도 양자로 들어온 류양권이었기에 자손을 잇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나이도 벌써 90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큰아들 류재근 밑에 양자(류양권에게는 손자)를 들이는 방법이 있었을 텐데 왜 30세 양자를 새로 들였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얼마 전에 죽었던 둘째 아들 류경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양자를 들이기로 결심한 것이었을까? 그러나 양자 입양은 통상 아들이 없는 경우 형제나 친척의 자제 중에서 양자를 들여 가계를 계승하는 것인데, 당시에는 큰아들 재근이 버젓이 있었다. 그렇다면 새로 들어온 아들 류재삼은 양자가 아니라 류양권 집에서 분가해 살다가 둘째 형인 류경이 죽자 아버지 류양권의 집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호적을 만들 때 자녀는 주호인 부모 밑에 솔거(率居)하는 자에 한해서 등재하였다. 물론 사망하거나 출가(出嫁)하거나 별도로 호를 구성해서 부모의 호에서 나가는 등 3년 전에 작성되었던 호적 기재 내용과 다른 변동 사항이 생겼을 때에는 그 사실을 호적에 부기했다. 자식들의 혼인 여부보다는 동거 여부를 우선시한 것이다. 따라서 류양권의 셋째 아들 류재삼과 그의 아내는 혼인 후 분호해 나갔다가 둘째 아들 류경이 죽은 후 다시 합호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어쨌든 ‘가솔자’로 기록된 류재삼은 당시 이미 결혼한 상태였으며 28세의 아내 송씨와 같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노비 갑덕은 이해 나이가 78세였다. 이렇게 이 가호에는 류양권 부부, 첫째 아들 류재근 부부, 그리고 새로 합호한 셋째 아들 류재삼 부부와 노비 갑덕 이렇게 모두 7명이 살았다. 붉은색으로 찍힌 점을 세어보면 모두 7군데이고, 이는 붉은 색으로 크게 ‘七口(칠구)’라고 쓴 부분과도 일치한다.

    [사진] 다섯 번째 문서로 1864년 갑자년 호구단자이다. 이해 갑덕의 나이는 81세였고, 상전 류양권은 89세였다. (박건호 소장)

    다섯 번째 문서는 다시 3년이 지난 1864년 갑자년 호구단자다. 국왕도 철종이 죽고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하던 시기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그간 폐허로 방치되어왔던 경복궁을 중건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즈음 나라 바깥에서는 남북전쟁 중이던 미리견(미국)에서 대통령 링컨이 1863년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 하지만 조선에서 이 미리견의 노예 해방 소식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이 해 류양권은 벌써 89세, 부인 이씨는 77세였다. 아직 아들을 낳지 못한 장남 류재근(柳在根)은 이름을 다시 류재룡(柳在龍)으로 개명했다. 이때의 개명도 아들을 낳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는 나이 39세였다. 아들을 낳지 못해 마음이 몹시 초조했을 것이다. 아내 양씨는 38세, 밑에 동생 재삼은 33세, 재삼의 처 송씨는 31세였다. 이들 사이에도 역시 자식이 없었다. 이해 노비 갑덕은 81세였다. 3년 전과 가호 구성은 동일하게 7명이었다.

    여섯 번째 호구단자는 1879년 기묘년 자료다. 조선이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지 3년이 지났을 때다. 옆 나라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라는 개혁을 통해 8년 전인 1871년 신분제도가 폐지되었다. 이 기묘년 문서는 앞의 호구단자로부터는 시간이 꽤 많이 흘러 15년 뒤에 작성된 문서다. 그 사이 류양권과 부인 이씨는 그 사이에 죽은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류양권이 주호로 나오는 호구단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때 주호는 54세의 류동현이다. 류동현? 처음 등장하는 이름이다. 동현은 기존 ‘류재룡’을 다시 개명한 이름이다.

    이 집안에서 개명을 가장 많이 한 사례이다. 그는 처음 류형에서 류재근으로, 다시 류재룡을 거쳐 마지막으로 류동현이 된 것이다. 그 개명이 드디어 효과를 본 것일까? 아들이 하나 등장한다. 류기홍(柳基弘)이다. 그런데 나이가 30세다. 1864년과 1879년 사이에 없던 아들이 태어났는데 30살이다? 역시 기홍이는 양자로 입양된 것으로 보인다. 이 집안은 왜 이렇게 자식 복이 없을까? 류양권이 죽은 후 합호한 류재삼은 이름을 ‘류복현(柳馥炫)’으로 개명했으나 아내 송씨(48세)와 사이에 역시 자식을 두지 못했다. 이러는 사이 노비 갑덕의 나이는 95세였다. 그녀는 옛 상전 류양권으로부터 장남 류동현에게 상속된 것으로 보인다. 노비는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 집에 사는 사람은 류동현 부부와 그 아들 기홍, 그리고 동현의 동생 류복현 부부와 노비 갑덕 이렇게 해서 총 6명이었다. 특이한 것은 이 호구단자에서 죽은 아버지 류양권의 이름 위에 ‘통정대부’ 품계가 쓰였다는 점이다. 89세까지 관직이 없이 ‘유학’이던 류양권이 그 이후 ‘통정대부’가 되었다는 것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곡식을 납부하고 공명첩을 매입한 경우이고, 또 하나는 류양권이 90세 이상 오래 살았기 때문에 경로 우대로 받은 명예 품계인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호적에 ‘납속통정대부’, 후자의 경우에는 ‘노직통정대부’라고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것 없이 단순히 ‘통정대부’라고만 썼기 때문에 명확하지 않다. 정황상 경로 우대로 ‘통정대부’ 품계를 받은 것, 즉 ‘노직통정대부’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사진] 위 문서는 여섯 번째 호구단자인데, 1879년에 작성된 것으로 주호는 류동현이다. 노비 갑덕은 류양권으로부터 아들에게 세습되었다. 문서 왼쪽 끝 붉은 테두리 부분을 보면 갑덕은 나이를 직접 쓰는 대신 출생년의 간지인 ‘갑진년’에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해 갑덕의 나이는 95세였다. 문서 오른쪽 붉은 테두리 부분에 류동현의 아버지 류양권 이름 위에 ‘통정대부’라고 쓴 부분이 보인다. 아래 문서는 길주목 남면에 거주했던 유학 박범률이란 인물의 호구단자이다. 이 호구단자에 박범률의 조부 선흥과 처 최씨의 증조부 두삼 모두 ‘노직 통정대부(老職 通政大夫)’라는 품계가 적혀있다. 효(孝)와 경로(敬老)가 중시되던 시절, 장수한 이에 대한 우대의 의미로 통정대부를 내렸음을 알 수 있다. 하동의 류양권이 갑자기 ‘통정대부’가 된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박건호 소장)

    일곱 번째 문서는 6년 후인 1885년 광서 11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동안 임오군란, 갑신정변 같은 사건이 있었다. 개항 후 조선의 정국은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개화와 척사 두 힘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들어온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아주 심해 조선은 거의 청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해 호구단자 문서를 보면 류동현은 60세로 환갑을 맞았다. 아내 이씨는 59세이다. 둘 사이에 입양된 아들 류기홍(36)은 다시 류원기(柳原基)로 개명했다. 그 사이에 류원기는 전주 이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류동현의 동생 류복현 부부는 각각 57세, 54세로 아직도 자식이 없다. 이제 자식을 낳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다. 노비 갑덕은 이해 나이가 100세를 넘어 101세였다. 이렇게 해서 이 집에는 류동현 부부와 아들 류원기 부부, 동생 류복현 부부, 노비 갑덕 이렇게 총 7구가 살고 있었다.

    다시 6년이 지났다. 때는 1891년 광서 17년이었다. 여덟 번째 문서인 이 해의 호구단자에서 주호는 류원기다. 이해 류원기는 나이는 42세이고 아내 이씨는 42세였다. 그 사이에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이 해 호구단자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보면 ‘父 學生 東炫(부 학생 동현)’으로 되어 있다. 보통 ‘유학(幼學)’은 과거를 보기 위해 당분간 군역을 면제받은 자를 일컫는데 비해, ‘학생(學生)’은 유학을 직역명으로 쓰던 자가 사망했을 때 붙이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또한 류동현의 부인 양씨(류원기의 어머니)도 만약 살아있었다면 장남 류원기가 모셨을 것이고, 호구단자에는 ‘봉모(奉母)’나 ‘시모(侍母)’ 형태로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모가 모두 죽자 류원기는 그동안 아버지가 살던 하동군 팔조면 강선동에서 하동군 적량면 두전촌으로 분가했다.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작은 아버지인 류복현과 분호해서 류원기 부부가 새로 적량면 두전촌으로 이사하여 새로운 호를 구성한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노비 갑덕은 이제 나이가 107세였다. 이렇게 이 집에는 류원기 부부와 노비 갑덕 3명이 살았다. 류원기와 아내 사이에는 아직 자식이 없다. 이름을 다시 개명해야 하나? 아니면 양자를 들여야 하나? 원기의 고민은 컸을 것이다.

    [사진] 왼쪽은 일곱 번째 문서로 1885년 광서11년 류동현의 호구단자이다. 오른쪽은 여덟 번째 문서인 1891년 광서 17년의 호구단자로 류원기가 새로 분가해서 작성한 호구단자이다. 붉은색의 둥근 테두리 부분에서 동현이 ‘학생’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 6년 사이에 류동현이 죽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문서 모두에 여전히 노비 갑덕이 갑진년 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이는 각각 101세, 107세였을 것이다. (박건호 소장)

    마지막 아홉 번째 호구단자는 다시 3년이 지난 1894년 광서 20년에 작성된 것이다. 동학농민운동과 일본군의 경복궁 습격 점령 그리고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일어난 그 해다. 무엇보다 조선에서 드디어 신분제가 폐지된 해이기도 하다. 이 해의 호구단자에 류원기와 아내는 모두 45세였다. 역시 아들 기록이 없다. 노비 갑덕은 이해 111세였다. 당시 이 집에 등록된 사람은 3명이었다. 붉은색 점이 찍힌 곳이 세 군데이고, 따로 써 놓은 글씨도 ‘三口(삼구)’다.

    [사진] 아홉 번째 문서로 1894년 광서20년 갑오년 류원기의 호구단자이다. 이 문서가 작성되던 그해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폐지되고, 공사 노비제도가 혁파되었다. (박건호 소장)

    111세까지 살았던 노비 갑덕은 누구인가?

    이렇게 해서 하동에 살았던 류씨 집안의 호구단자 9장을 모두 살펴보았다. 나는 이 집안의 역사가 담겨있는 호구단자를 분석하며 자손이 귀한 이 집안에서 가계를 잇기 위해 개명과 양자 입양 등 그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주된 관심은 역시 앞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류양권, 류동현, 류원기 무려 3대에 걸쳐 세습된 노비 갑덕이었다. 그녀가 처음 기록된 것은 1858년으로 그때 나이는 75세였다. (물론 ‘노 갑득’을 갑덕과 동일인물로 간주하면 1855세 72세 나이로 처음 등장한다.) 이것만 해도 고령인 그녀는 최종 1894년 111세가 될 때까지 한결같이 이 집안의 호구단자에 노비로 기록되고 있었다.

    그런데 여러 장의 문서의 맥락 속에서 읽어낸 갑덕의 나이 111세는 조선시대 평균 수명과 비교해 봤을 때 너무 많지 않은가? 갑덕은 정말 111세 이상 살았던 것일까? 문서의 맥락을 읽어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역사적 맥락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문헌 기록이 중요하긴 하지만, 적어놓은 사실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 후기 호적 자료에는 이 류씨 집안의 갑덕 말고도 노비 나이가 100세 넘게 기록된 호적 자료가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150세, 200세가 넘는 경우들도 있는데 조선 후기 재령 이씨 집안의 비 계선은 나이가 무려 227세였다. 이렇게 노비의 장수시대가 열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노비들이 실제 오래 살아서라기보다는 도망 노비가 많았기 때문이다. 즉 도망 노비들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양반들은 노비들이 살아 있을 경우의 나이를 계산해 계속 호적대장에 기재했다. 나중에라도 도망간 노비를 잡았을 때 그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록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호적에 그 근거를 남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도망 노비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이만 계속 늘려 기록했던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경상도 영해 재령 이씨가의 경우 호구단자에서 도망노비를 최소 63년부터 최대 207년 동안 기재하여 계속 관리했으며, 광주의 전의 이씨가의 경우에도 도망도비를 90년에서 137년 동안 호적에 기재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만큼 조선 후기 도망 노비가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도망노비를 기록하는 것은 도망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은 경우가 많았지만, 오래 전에 도망한 경우에도 계속 기록하는 경우가 있었다. 호적에는 이들에 대해 ‘구원도(久遠逃; 오래 전에 멀리 도망감)’라고 따로 그 사실을 적기도 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도망 노비는 비록 사망하였을지라도 그 소생들을 자신에게 귀속시킬 근거를 마련해 두고자 했기 때문이다.

    도망 노비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록들도 있다. ‘도거 청주(逃居 淸州)’와 같이 어디에 도망가 사는지를 표시한 사례이다. 간혹 어느 군현의 어느 동리에 사는 것까지도 기록한 사례가 있다. 이것도 훗날에 노비 추쇄의 근거로 삼을 만한 기록이기는 하나, 어디에 사는지 뻔히 알면서도 당장 달려가 잡아오지 않고 도망으로만 처리해 두는 것이다. 도망간 노비가 어디 사는지 알아도 실제 잡아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기록에는 옛 상전이 도망가 살고 있던 노비를 찾아가 데려오려다가 폭행 당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도망 노비들에게는 도망까지 가서 얻은 자유가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다. 자유를 알지 못했을 땐 순종이 당연했지만, 일단 자유의 맛을 본 후에는 그것의 가치를 절감했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지키고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사진] 도망 노비를 기록한 조선 후기 어느 지역 유학 김덕중의 호구단자이다. 이 집안의 경우 갑자년생 노비 논덕(論德)이 노망갔는데 ‘逃亡時居興陽’이라고 해서 도망 당시 살았던 곳이 흥양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노비 논덕은 도망 당시 솔거노비가 아니라 주인집에서 떨어져 살았던 외거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양반들은 도망 노비를 잡았을 때 그 근거를 남기기 위해 도망 노비가 발생한 경우 도망 후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에도 노비에 대한 기록을 호구단자에 남겼다. (박건호 소장)

    이런 역사적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보자면 노비 갑덕은 어느 순간 류씨 집안으로부터 도망간 노비였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실제 그녀가 111세까지 살았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는 도망 노비로서 갑덕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 류씨 집안에서도 나이가 너무 많아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1864년에 갑덕의 나이를 81세로 적은 것을 마지막으로, 그 이후부터는 나이를 직접 밝히지 않고 단순히 출생년도의 간지인 ‘갑진년’만 밝히고 있다. 이렇게 이 호구단자 하나에도 그 시대 사회상과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 교과서에서 조선후기 노비가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다라고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면, 드라마에서는 이를 [추노]라는 형식으로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옛 기록물은 이런 형태의 자료를 통해 과거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해준다. 이 기록물 속의 사실을 문서의 맥락, 역사의 맥락을 가지고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오롯이 오늘날 우리의 몫이다. 특히 기록물을 다루는 이들은 더더욱 이런 기록물 속에 담긴 역사의 의미를 꼼꼼히 볼 수 있어야 한다.

    노비 갑덕을 도망 노비로 간주하는 것으로 나의 류씨 집안 호적 자료 탐구는 끝났다. 그런데 여전히 해결 안 된 문제가 남아 있다. 단순히 도망 노비로 갑덕을 보기에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는 것이다.

    첫째. 노비와 관련하여 변동 사항이 생기면 보통 그것을 호적에 기록했다는 점이다. 죽었으면 ‘고(故)’라고 하고, 도망갔으면 ‘도(逃)’, ‘도망(逃亡)’, ‘도주(逃走)’라고 기록하고 호 내의 사람 수로 계산하지 않았는데, 류씨 집안의 경우에는 갑덕이 ‘고(故)’나 ‘도(逃)’가 붙지 않은 채 그 호(戶)의 사람 수로 계속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노비가 도망을 갔을 경우 그 노비를 계속해서 기록하는 이유는 도망 노비 당사자도 그렇지만 그 노비의 소생에 대한 귀속도 중요한 이유였다. 그런데 노비 갑덕의 경우는 이미 노쇠한 나이였으므로 소생을 둘 수 없는 나이였다. 굳이 노비 소생의 소유권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노비 갑덕은 정말 111세까지 살았던 것일까?

    다시 정리해보자. 갑덕은 111세까지 기록되었다. 합리적인 추론으로 그녀는 도망 노비였을 것이다. 도망 노비의 경우 주인이 그 소유권을 법적으로 확실히 하기 위해 나이가 많더라도 계속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덕에 대해서는 도망갔다는 사실도 기록하지 않았고, 그 호구의 사람 수로 계속 집계하고 있다. 나이도 많아 갑덕이 도망 후 후손을 낳았을 가능성도 없다. 그러므로 도망간 갑덕을 111세까지 계속 기록할 이유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갑덕의 나이 111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나는 다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도망갔을 가능성 70프로, 실제 111세까지 살았을 가능성 5프로 정도라고 하자. 그렇다면 나머지 가능성은 없을까? 이유를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나는 매우 설득력 있는 내용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게 양반 행세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손병규의 [호적] (휴머니스트, 2007년)에 나오는 내용인데, 조금 인용해보자.

    양반 행세를 하려면 노비를 반드시 소유하여야 했다. 19세기 호적에 노비가 등재되는 양태에는 사실 약간의 비현실적인 경향도 없지 않다. 호마다 노비 한두 명을 등재하는 것이 호적의 양식인 것처럼 유행하고 허구의 인물을 노비로 등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노비를 소유한 상전이 증가함으로써 해당 지역 노비 총수도 증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호적상 노비가 증가한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비 기재를 행하게 된 사회문화적인 요인은 양반 지향에 있다.

    단성현 유학의 비율이 17세기 후반 10퍼센트 정도, 18세기를 거치면서 급격히 증가, 19세기 중엽에는 급기야 50퍼센트에 육박. 사회 현실에 호적에 등재된 그대로라면 모든 인민의 반수가 지배층인 셈이다. 그러나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호적을 작성한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이미 그 19세기 호적은 실제로 양반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 양반을 지향하는 자들이 증가한 결과를 보여준다. 호적상에 양반이 즐겨 쓰는 직역명을 붙이고 그 호의 부녀에게 씨 호칭을 쓰며, 노비까지 한두 명 등재하는 호 구성이 일반화되어 갔다는 사실은 바로 양반 흉내를 내는 호적 기재가 정형화된 것임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대목이다. 양반 지향의 문화 때문에 노비를 한두 명 등재하는 것이 호적의 양식인 것처럼 유행했다는 대목. 그렇다면 갑덕은 실존 인물이긴 했을까? 혹시 허구의 인물은 아니었을까? 앞에서도 살폈지만 1855년 72세의 ‘노 갑득’이 3년 뒤인 1858년 75세의 ‘비 갑덕’으로 갑자기 바뀌는 것도 이상했다. 1855년과 58년 사이 노 갑득이 노환으로 죽자 이 류씨 집안은 이후 비슷한 이름의 갑덕을 가공의 인물로 만들어 1885년 75세부터 나이를 추가해 간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이가 너무 많아지니 81세 이후부터는 그냥 ‘갑진년’으로 바꿔 나이가 지나치게 많다는 사실을 숨기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이 가능성도 25프로 정도 있다고 생각한다.

    111세 장수 노비 갑덕의 정확한 실체는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정말 류씨 집안에서 111세까지 살았던 인물일까? 아니면 도망 노비로 류씨 집안의 추쇄 대상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는 류씨 집안이 그 지역 사회에서 양반 행세를 하기 위해 노 갑득이 죽자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었던 것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노 갑득’과 ‘비 갑덕’은 같은 해에 태어난 쌍둥이였을까? 그래서 원래는 노 갑득만 기록하고 갑덕은 호구단자에서 누락시켜왔는데, 노 갑득이 사망한 후 쌍둥이 비 갑덕을 대신 그 자리에 기록한 것이었을까?

    이 의문은 미완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그러나 아직 보지 못한 류씨 집안의 10번째 호적문서가 하나 남아 있다. 이 자료는 1898년 이제는 호구단자가 아니라 갑오개혁 이후 새로 도입된 ‘호적표’라는 문서이다. 이것은 1896년 제정된 호구조사규칙에 의해 새로 작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기존의 호구단자가 3년에 한 번 신고하게 한 것이라면, 이는 1년에 한 번 신고하게 했다. 1898년 광무 2년 호적표에서 류원기는 이제 49세이다. 할아버지 류양권 이름에 붙어있던 ‘통정대부’도 사라졌고, 이전에 자신과 4조 이름 위에 붙이던 ‘유학’이니 ‘학생’이니 하는 직역도 더 이상 소용없는 시대가 되었다. 류원기는 새로 신설된 직업란에는 아예 ‘農(농)’이라고만 썼다. 신분을 표시하는 대신 ‘직업’을 기록하게 한 것은 1894년 신분제 폐지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신분제 폐지와 함께 노비제도도 사라졌다.

    류원기는 이 호적표에 ‘고남(雇男)’, ‘고녀(雇女)’ 인원수를 기록하는 란을 빈칸으로 남겨 두었다. 노비제 폐지 이후 여전히 집에 딸려 잡일을 했던 이전의 노비들을 당시에는 보통 고남, 고녀로 파악됐는데, 갑덕은 드디어 여기에서 빠졌다. 처음 호구단자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 지 무려 40여년만에 호적에서 이름 혹은 사람 수 계산에서 빠진 것이다. 신분제, 노비제가 폐지된 마당에 류원기는 더 이상 갑덕을 이 문서에 기록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하여 장수 노비 갑덕은 그 무거운 노비 신분 혹은 ‘도망 노비’의 무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 류원기의 1898년 광무 2년 호적표이다. 신분제 폐지를 반영하여 새 양식의 직업란에는 ‘농(農)’이라고 썼다. 붉은색 테두리 부분은 잘 보이지 않지만, 고남·고녀의 수를 기록하는 부분이다. 보통 노비제 폐지 이후에도 그 집에 딸려 사는 노비들은 고남·고녀로 파악되었다. 류씨 집안의 호적표에 더 이상 갑덕은 없다. 오랜 세월 호적자료에 기록되던 갑덕은 신분제 폐지와 함께 이렇게 호적자료에서도 해방되었다. (박건호 소장)

    노비제 폐지 이후의 노비제

    노비제도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노비가 바로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수의 노비는 이후 상당기간 동안 주인집에 얹혀 살았다. 독립해 나가봐야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다수는 계속 주인집에 딸려 살면서 그들의 잡일을 해주고 경제적 보상을 받으며 살았다. 그러니 신분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되었다고 해서 신분제 질서나 관념이 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신분제의 완전한 소멸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 역사에서 신분제 관념을 없애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역설적으로 식민지배와 전쟁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유덕희의 증언을 들어보자.

    나는 제2차 세계대전이 우리 마을의 신분 질서를 통째로 뒤집어 놓았음을 알아차렸어요. 우리 삼촌네는 하인이 많았고 그들은 모두 제 직분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모든 젊은이들이, 하인이고 양반이고 가리지 않고 모두 일본군에 징병되자 위계가 불분명해졌어요. 누구나 같은 운명이었고 그러니 다들 평등해진 거지요.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하인들이 삼촌네 집을 나와서 다른 도시로 이주했어요. 구질서가 붕괴된 거지요.

    – 유덕희 증언, [검은우산아래에서](정선태,김진옥 공역, 산처럼, 2011) 중

    식민지배는 이렇게 기존의 신분 질서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크게 신분 질서와 관념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기존의 향촌 공동체에 강고하게 남아있던 신분제를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지역 사회에서 하층민 출신으로 인식되던 사람들은 혼란한 전시 상황에서 멀리 떠나 버리면 그만이었다. 또한 어제까지 노비, 머슴, 소작인들로 살던 이들이 완장 차고 옛 상전, 지주들을 반동분자로 몰라 공격하는가 하면,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부잣집 자식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동무’라고 연대를 표시하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피란했고, 다양한 출신 지역과 계급을 가진 사람들은 비빔밥처럼 뒤섞였다. 이제 사람들은 서로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고, 굳이 따져 묻지도 않았다. 당장 눈앞에 닥친 가난을 해결하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

    기존의 농촌 공동체는 해체되고, 새로운 사회 질서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전쟁은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리셋(re-set)했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으므로 모두는 가난 속에서 평등했다. 그리고 모두 비슷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했다. 비록 배는 고팠지만, 배 아픈 시대는 아니었다. 누차 말하는 것이지만 전쟁은 파괴만 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도 전쟁이다. 몽골 침략은 황룡사를 불태웠지만, 팔만대장경을 탄생시켰듯, 한국전쟁은 구 신분질서를 뒤엎어버리고, ‘평등사회’의 신질서를 창출했다.

    이런 급격한 변화를 거치며 전후 대한민국에서 신분제도는 사라졌고, 노비 없는 세상이 펼쳐졌다. 그리고 경제 성장과 과학 기술 발달로 현재 우리는 조선시대 양반보다도 안락하고 편리한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예전으로 치면 노비 열 명 이상을 부리고 살고 있는 것과 같다. 김병희의 다음 글을 읽어보자. 이 글을 읽노라면 우리는 양반 부럽지 않은 호사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조선시대에 비유하자면 현재 우리는 집집마다 하인을 열명 이상 부리며 살고 있는 셈이다. 양반댁 하인들은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구들장을 덥히려고 군불을 때고, 호롱불을 켜고, 온갖 일을 도맡아 했다. 이제는 가전제품이 그런 일을 다 해준다. 전기밥솥은 밥 짓는 부엌데기고, 세탁기는 빨래하는 행랑어멈이며, 청소기는 청소하는 마당쇠고, 전기보일러는 군불을 때는 돌쇠고, 냉장고는 얼음을 배달하는 행랑아범이다. 이 밖에도 우리네 집에는 버튼만 누르면 알아서 척척 시중드는 하인이 열 명을 넘는다. 지금 우리는 조선시대의 양반들이 누렸던 호사를 그대로 누리며 살고 있다.

    김병희, [정부 광고로 보는 일상생활사](김병희, 살림출판사,2017년) 중에서

    그런데 급격한 경제 성장은 빈부 격차를 키웠고 기존의 평등한 질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모두가 가난했으므로 모두가 평등했던 대한민국에 새로운 신분제도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새로운 신분제도의 이름은 ‘갑질’이다. 2013년 이후 대한민국 인터넷에 등장하기 시작한 이 용어는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우월한 신분, 지위, 직급, 위치 등을 이용하여 상대방에 오만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며 제멋대로 구는 행동을 뜻하는 말로 주로 쓰이고 있다. ‘갑질’은 영어로는 ‘gapjil’로 표기되어 외국에서도 한국의 독특한 사회 병폐를 지적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gapjil(갑질)은 chaebol(재벌), chunse(전세), kkondae(꼰대), hwa-byung(화병) 등과 함께 정식 등재되어 ‘K-영어단어’로 국위를 선양하고 있다. 갑질은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심화된 경제 양극화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돈과 지위가 주인이자 상전인 시대가 되었다. 아파트 경비원, 백화점 판매원, 주차 안내원, 배달 노동자, 하청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노비 취급을 받고 있다. 갑질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2013년 이후 언론에 보도된 갑질 사례 몇 가지를 살펴보자. 대한민국이 신분제 사회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다.

    2014년에는 유명한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이 있었다. ‘땅콩 회항’ 사건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맏딸인 조현아 당시 부사장이 2014년 12월 일 뉴욕발 인천행 항공기에서 기내 땅콩 제공 서비스를 문제 삼고 수석 승무원(사무장)을 하기시키면서 논란이 된 사건이다. 당시 항공기는 이륙을 위해 게이트를 떠나 이동 중이었으나 조 전 부사장 지시로 되돌아갔고, 이로 인해 출발이 24분 가량 지연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 과정에서 조 전 부사장은 박창진 사무장과 여승무원 김모씨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해 이륙 점검 업무 및 승객 서비스를 방해하고 박 사무장을 비행기에서 강제로 내리게 한 혐의도 받았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 H아파트에서 경비원 이만수 씨(53)가 분신을 시도했던 것도 2014년이었다. 이만수 씨는 주차 관리와 아파트 주민과의 계속되는 갈등과 폭언에 지쳐 갔다. 어떤 주민은 베란다에서 음식물을 던지며 “주워 먹어라” 는 등 모욕적인 말을 일삼으며 하대하기도 했다.  경비원 이만수 씨는 더 이상의 삶을 연장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주민들에 의해 발견되어 얼마간의 치료를 받다가 결국 싸늘한 주검으로 생을 마감했다.

    2015년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는 경비원들에게 출근하는 주민들에게 90도 인사를 강요해 문제가 되었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에서 다른 아파트는 출근 시간에 경비원들이 서서 인사하는데 왜 우리 아파트는 안 하느냐는 지속적인 항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경비원들은 아파트와 지하철이 연결된 진출입로에 오전 7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서서 출근 혹은 등교하는 주민들에게 인사를 한 것이었다. 이 아파트 경비원 A씨는 “우리는 최하층민인데,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그대로 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2015년 10월 16일에는 S백화점 인천점에서 점원들이 무릎을 꿇고 고객에게 사과하는 영상이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다른 고객이 찍어 인터넷에 올린 이 영상에는 한 여성고객이 의자에 앉아 있고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점원 2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이 고객은 귀금속의 무상수리 여부를 놓고 점원들에게 고객 응대법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며 따진 것으로 전해졌다. 백화점 측은 “고객 항의가 1시간 정도 이어지자 사태를 빨리 해결하려는 마음에 점원들이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고 밝혔다.

    [사진] 왼쪽은 2015년 부산의 어느 아파트에서 주민들이 출근할 때 경비원들이 90도 인사를 하는 장면이다. 오른쪽은 2015년 10월 S백화점 인천점에서 점원들이 무릎을 꿇고 고객에게 사과하는 장면이다. 우리 사회의 ‘갑질’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2016년 광주의 한 아파트에서는 입주민인 53세 된 남성이 경비원의 뺨을 담뱃불로 지진 사건이 발생했다. 지하 1층 주차장에서 한 손에는 담배, 또 한 손에는 전화를 들고 굉장히 시끄럽게 전화를 하자 경비원이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니까 작은 소리로 통화해 달라고 하자 격분한 입주민이 경비원의 뺨에 3번에 걸쳐서 담뱃불로 지진 후 주먹질을 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경비원에게 하찮은 경비원 주제에 까분다면서 입주민 회장에게 얘기해서 옷을 벗기겠다. 여기에서 일을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2019년에는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 입주민은 수년간 경비원들에게 사적 업무를 지시하는가 하면 일 처리가 늦다고 폭언을 했으며, 심지어 일부 경비원에게는 ‘개처럼 짖어보라’고 말하며 모욕감을 주는 일도 있었다. 아파트 경비원은 그들의 종(從)에 불과한 존재였다.

    2020년 5월에는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입주민으로부터 지속적인 폭언과 폭행을 당한 경비원 최희석 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아파트 주차 문제로 주민과 갈등을 빚은 뒤 억울하다는 유서를 남긴 채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그의 유서 한 대목이다.

    엄청 많이 맞았습니다. 바지에다 오줌 싸 이 **야. 너 남자 **냐? 이 ****야, 그래가며 **** 때렸습니다….경비하는 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나 빌어도 봤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나 진짜 작은 딸, 큰 딸 챙기려면 돈 벌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요 없어 이 **야.

    그는 억울하게 죽으면서도 유서 마지막을 “이 세상, 정말 행복했습니다. 아이 러브 유,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끝맺었다. 정말 아파트 경비가 무슨 죄란 말인가? 이 사건을 계기로 소위 ‘경비원갑질금지법’이 제정된 것이 한 몸을 던져 갑질을 고발한 고인에게 자그마한 위안이 되었을 것인가? 최희석 씨 사건을 계기로 경비원 실태를 보도한 [월간조선] 2020년 7월호의 ‘한 아파트 경비원의 죽음을 통해 본 경비원의 삶’이라는 현장 취재 기사에서 한 경비원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노예가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원래는 (고등학생) 흡연 단속을 안했다. 그런데 주민들이 신고하고 관리실에서도 경비원에게 단속하라고 한다. 청소와 택배, 쓰레기 분리수거, 주차 단속까지 하면 잠시 앉아 쉴 새도 없다. 그런데 학생들 흡연 단속까지 하려고 수차례 순찰을 해야 한다. 이건 뭐 경비원이 아니라 거의 노예 수준이다. 나는 아파트 경비원이지 노예가 아니다.

    [사진]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 최희석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막내딸에게 남긴 봉투 (민중의 소리 사진)

    아주 최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2022년 7월 서울 천호동 한 아파트에서 만취한 입주민이 경비실에 들어와 다짜고짜 60대 경비원 가슴과 어깨 부분을 발로 걷어찼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었는데 경비원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CCTV 확인결과 엘리베이터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입주민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을 경비원에게 분풀이를 했던 것이다.

    CNN은 2022년 7월 4일 “한국에서 다시 직장인들이 출근을 재개하면서 갑질이 돌아오고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갑질을 “한국의 고질적인 직장 문화”라고 지적했다. 2021년에는 과로와 괴롭힘 등 직장 갑질로 사망한 이가 98명이었다는 통계도 있다. 한국의 갑질 문화는 이렇게 외국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갑질은 이렇게 우리의 고질적인 문화로 자리잡은 것일까? 인도에 카스트제도처럼, 갑질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신분제도가 되고 만 것인가? 우리는 만인이 만인에게 갑질하는 그런 정글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인가?

    잠잠해질 만하면 터지곤 하는 이런 갑질들을 보노라면 과연 대한민국이 평등한 사회인지, 신분제도가 폐지된 나라인지 의심이 든다. 이런 갑질 이야기를 보면 조선시대 상전과 노비 이야기를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그래서 조선시대 노비 이야기는 결코 옛날 이야기가 아니며, 내가 노비 자료를 수집하는 것 역시 고루한 행위가 아니라 현재와 관련된 것이다. 앞으로 100년 200년이 지난 후 우리 시대는 어떻게 기억될까? 노비 이름을 ‘소석기(소새끼)’, ‘개부리(개불알)’로 짓던 것에 오늘날 우리가 화들짝 놀라듯이, 100년 후 200년 후 우리 후손들이 보고 화들짝 놀랄 이야기를 우리는 매일 매일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옛 노비 이야기를 단순히 흥밋거리로 볼 수 없고 불편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 시대 노비제도가 사라졌는지 다시 묻는다. 갑질 이야기를 반복하자는 것이 아니다. 갑질과 관계없이 사람들 다수는 노비(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2020년대 대한민국에 여전히 노비(노예)들이 존재한다. 나는 두 가지 종류의 노비(노예)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경제적 노예들이다. 가난하고 부유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과 관계없이 스스로 황금만능주의,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부를 창출할 수 있고, 사유재산은 적극적으로 보호된다. 그러나 돈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다른 의미이다. ‘잘 산다’는 것은 꼭 부유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진대 우리는 부자가 되는 것을 ‘잘 산다’고 한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못사는’ 것은 아닐진대 우리들은 가난한 이들을 무조건 ‘못산다’고 규정해 버린다. 사람의 인격, 품위, 문화적 소양, 건전한 가치관 이런 것들을 제쳐두고 경제력을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말은 그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는 그릇이다. ‘잘산다’, ‘못산다’의 의미는 훨씬 확장되어야 한다. 부유한 자들 중 못사는 이들도 있고, 가난한 자들 중 잘사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사람 범려는 이런 말을 했다. 범려는 다수가 돈을 추종하고,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2020년대 대한민국 사회를 무려 2500년 전에 예견한 듯하다.

    무릇 사람은 자기보다 열 배나 되는 부자에 대해서는 헐뜯지만 백 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 사람의 일을 대신해주고 만 배가 되면 그 집 노예가 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다.

    [사기], 권 129, 화식열전 중

    또 하나는 정치적 노예이다. 다르게 말하면 정신적으로 굴종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를 어떤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개돼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언론이 정권이 선전해주는 대로 생각하고 또 그것을 신념화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자유인들은 그렇지 않다. 자기의 다리로 서고,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당한 권력과 압제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맞서 싸운다. 스파르타쿠스처럼 만적처럼 그들은 부당한 압제에 맞서 싸운다. 자유인을 포기하고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찍이 1960년대 뉴욕에서 극작가로 활동했던 리로이 존스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지적한 바 있다.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 있지 않는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과거의 노예는, 자유인이 힘에 의하여 정복 당해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돼버렸다. 그들은 일부 특혜를 받거나 한 자를 제외하면 노예가 되더라도 결코 그 정신의 자유까지 양도하지는 않았다. 그 혈통을 자랑하고 선조들이 구축한 문명의 위대함을 잊지 않은 채, 빈틈만 생기면 도망쳤다. 혹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노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육체로 살찐 주인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 그러나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 노예의 옷을 입고 목에 굴욕의 끈을 휘감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랍게도,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라는 자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예인 것을 스스로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기까지 한다.

    돈과 지위가 상전 노릇 하는 시대, 검찰 등 공직자가 국민 위에 상전 노릇 하며 자신의 기준으로 상식과 공정을 말하는 우울한 시대, 우리는 자유인인가? 우리는 혹시 스스로 노예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질문은 던지며 길어진 노비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컬렉터의 서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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