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로츠키와 다른 한국의 ‘트로츠키주의’
        2007년 01월 29일 02: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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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읽기는 즐거워도 책에 대한 글쓰기는 즐겁지 않다. 글쓰기를 작정하고 책을 드는 순간부터 책읽기가 숙제가 되어 버리니, 소란스런 지하철이나 쾌적한 화장실에서 가끔 책 꺼내 보는 소소한 재미는 사라지고, 책상 위에 책 펴두고 밑줄 긋는 고역이 시작된다.

    더군다나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같이 두툼하고 묵직한 책은 족히 반 년 거리인데, 출판사 영업팀이나 언론 편집자의 시간 관념이 그런 ‘장구한 세월’을 용납할 리도 만무하다. 그래서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서평’이 아닌 ‘책소개’다.

    경상대 경제학과에 정성진 교수가 내놓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첫째 가는 장점은 그 필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점이다.

       
     

    한국에 트로츠키주의를 소개한 이들은 크리스 하먼, 토니 클리프, 알렉스 캘리니코스 같이 영국 사람들이었는데, 트로츠키가 영국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아는 ‘교양인’이라 할지라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들의 눈으로 번역된 트로츠키보다는 한국 사람이 쓴 트로츠키가 훨씬 손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에게는 나름의 특수성이 있어 마땅하므로 정성진의 책은 공간적 시간적 번역을 해야 하는 독자의 수고로움을 덜어 준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트로츠키』가 한국 경제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적 해석은 아니다. 부지런한 독자라면, 정성진이 ‘영구군비경제론’이나 ‘장기파동론’이라는 방법틀을 이용해 한국 경제를 분석한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2005)』를 이미 읽어 보았을 것이고,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여러 가지 주의(主義)를 다루고 있는 이 책,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먼저 읽은 후에 그 책을 보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1부에서 3부까지는, 요즘은 찾아 보기 힘든 경제사상사 책 삼아 읽어도 훌륭하다. 정성진은, 리카르도, 제2인터내셔널의 이론가들, 레닌, 포스트모너니즘과 알튀세르,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브레너의 세계경제위기론, 네그리의 『제국』, 그리고 신정완, 이병천, 장상환 같은 ‘케인즈주의’ 학자들에 비판의 칼날을 겨눈다. 19세기 초 이래 정치사회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됐던 경제이론을 일별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은 대학 학부 수준에서 정치경제학 기초를 이수한 분들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쟁점들을 공부하는 ‘고급 정치경제학’ 과정이나, 대학원 수준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과정의 교재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머리말).”

    4부는 트로츠키의 사상에 대한 소개인데, 물론 ‘트로츠키주의’의 눈으로 해석된 트로츠키 사상이다. 이를 위해 정성진은,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해에 태어나 2000년에 사망한 토니 클리프의 생애를 되짚으며, 트로츠키를 추종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열과 투쟁을 통해 ‘트로츠키주의’를 도출해낸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15장 ‘21세기 사회주의와 참여계획경제를 위하여’에서는 계산 가능성, 기술 혁신 문제 등을 다루며 사회주의 대안 경제의 원칙을 제시한다.

    정성진의 책에는 눈에 거슬리는 과장이 적지 않다. “요즘 세계 진보 진영의 화두는 …… 차베스가 제창한 21세기 사회주의”라거나 그로 인해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11장)”는 언급은 ‘국제사회주의자들(IS)’끼리의 유행인지는 몰라도, 내가 알고 있는 ‘세계 진보 진영’에서는 과히 그렇지 않다.

    “스탈린주의는 청산되기는커녕 알튀세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민주주의, 시장사회주의, 자율주의 등 ‘포스트스탈린주의’ 경향으로 변이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진보 학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머리말)”는 인식도 과장스럽다.

    그런 조류들이 스탈린주의 흥망성쇠와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내게 24시간쯤의 시간만 주어져도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시장사회주의 같은 온갖 조류들과 트로츠키 이론의 연관성도 능히 증명해낼 수 있다. 비판의 대상이 스스로 무슨 주의라거나 무슨 주의가 아니라는 관념에 묶여 있지 않는 한, 무슨 주의라는 낙인은 요즘 시류에서는 비판 논거로 별 쓸모가 없을 듯하다.

    여러 진보적 사회운동에 간여하고 있는 진보학자들이 거시적 변혁 전망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정성진의 비판은 타당하다. 민주노동당의 대표적 이론가인 장상환 교수(경상대 경제학과, 진보정치연구소장)는 “규모가 크고 복잡한 경제에서는 계획의 한계가 명확하다. 정확한 정보 수집의 불가능과 동기 유발의 어려움, 개인의 개성적 발전의 저해 등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한국경제의 위기와 민주노동당의 대안」, 2005)”라며, 전통적 시각을 고수하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정보화의 핵심인 네트워크 경제의 발전에 따라 아래로부터 참여 계획의 실행 가능성이 20세기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다(11장)”라거나, “가령 모든 기업의 재무제표를 웹사이트에 공개하는 것을 의무화한다면, 구글과 같은 검색엔진을 통해 이를 수집 분석하여 전국적 및 전세계적 규모에서 생산과 투자를 계획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15장)”는 정성진의 주장도 장상환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를 계산 가능성으로 치환한 것은 아닌가?

    트로츠키뿐 아니라, 혁명적이든 개량적이든 모든 사회주의자들은 계산 가능성 같은 행정적 요소가 아니라, 사회주의적 경제 제도의 지배적 지위에서 나타나는 자연사적 경제운동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권능을 사회주의의 요체라고 보지 않았는가?

    스탈린주의가 트로츠키를 곡해한 것처럼, ‘트로츠키주의’ 역시 읽고 싶은 트로츠키만을 읽는다. 정성진은 후기 레닌을 ‘경제주의로의 후퇴’라며, 레닌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론’과 신경제정책을 예로 든다(4장). 그런데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하에서는 – 오로지 그 밑에서만! – 민주적 문제의 사회주의적 문제로의 성장이행이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러시아혁명사」, 1932)”며 긍정한다.

    정성진은, 신경제정책이 “진지하게 장기간에 걸쳐 실시될 것”이라는 레닌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인용한다. 그런데 트로츠키도 “퇴각이되 항복은 아니(「신경제정책과 세계혁명의 전망에 대한 보고」, 1922)”라며 신경제정책을 과도단계로 인정하고, 그 과도기가 “한 세기 또는 반 세기 동안(「코민테른 강령초안 – 기초 비판」, 1928)” 계속되리라는 예측도 제시한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실천적 문제의식에서 신경제정책은 ‘과도단계, 시장요소, 유럽혁명과의 관계’로 동일하게 존재했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트로츠키주의’와 다르다.

    정선진의 책은 그가 비판하는 ‘스탈린주의 교과서’의 문법을 따른다.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배분할 수 있다 ……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신속할 수 있다 ……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귀결될 것이다(15장).” 트로츠키주의 경제이론대로 따르면 다 해결되고, 잘 될 것이다!?

    이 인용문의 ‘트로츠키’를 ‘스탈린’으로만 바꾸면 국가사회주의체제론의 자동 해결론과 본원적 우월론에 완벽하게 일치한다. 매사가 그리 잘 풀린다면야 뭔 걱정이 있겠는가?

    “트로츠키가 추구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경제학비판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방법과 마르크스주의 역사를 복원하고, 이에 기초하여 최근 우리나라 진보 진영의 지배적 경향들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머리말).”

    그래서인지 정성진은 이 책의 초교지를 ‘다함께’에 보내 조언을 구했다. 나는 ‘다함께’가 트로츠키의 주장을 잘 실천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다. 그들이 트로츠키를 잘 알고 자주 인용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주체사상파와 어울려 논다는 추문이 ‘트로츠키주의’의 반스탈린주의 투쟁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자유게시판도 없는 ‘다함께’의 독특하고 해괴한 문화가 어떤 식으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인지를 모르겠다.

    레닌이나 스탈린보다 ‘아래로부터’를 더 많이 강조한 트로츠키는 크론슈타트 반란과 노동자 파업의 파괴자이기도 하다. 또,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트로츠키는 노동조합과 평의회의 자율성에 반하는 결정과 실천을 했다. 내가 굳이 트로츠키의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은 걸출한 혁명가였던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트로츠키주의’ 교과서의 문구들을 신봉하는 것보다는 트로츠키의 실천적 굴절을 연구하는 것이 트로츠키가 꿈꾸었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살려내는 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이 글은  <프레시안>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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