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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비 이야기-1
    순철이, 소석기 그리고 순심이의 삶
    [컬렉터의 서재] 사람 이름을 ‘소새끼’라고 짓던 때
        2022년 07월 15일 10: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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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렉터의 서재> 칼럼 링크

    2022년 5월 어느 경매에 조선 후기 신분제 변동에 관한 흥미로운 자료가 나왔다. 경상도 예천 김칠복(金七福)이란 인물과 관련된 총 12장의 자료였는데 그중 8장은 30여년에 걸친 김칠복의 호구 단자(戶口 單子)였다.

    여기에서 김칠복의 직역은 시기에 따라 다른데, 1837년 호구 단자에는 ‘齋奴(재노)’로, 1840년대에는 ‘墓直(묘지기)’으로, 1858년 이후부터 70년대까지는 ‘嘉善大夫(가선대부;조선시대 종2품에 해당하는 문관 품계)’로 각각 기록되어 있었다. 마지막 가선대부는 김칠복이 1858년경 공명첩을 구입해서 얻은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자료들 중에 김칠복을 정 3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삼는다는 1836년 공명첩 교지 1장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김칠복이 가선대부가 되기 20여년 전에 받은 교지인데, 문서 발급 날짜 ‘도광16년 12월’ 옆에 따로 ‘納(납)’자를 적어 돈을 납부하고 받았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렇게 김칠복은 공명첩 매입으로 30대에 통정대부, 50대에 가선대부 품계를 획득했던 것이다. 그가 나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경매 회사는 이 김칠복 자료에 대해 “노비가 양반이 되는 사례가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만, 이렇게 실제 사례로 남아있는 경우는 매우 희소하다”라고 그 가치를 부여했다. 이 자료들이 노비에서 평민 그리고 다시 양반(통정대부와 가선대부)으로 이어지는 신분 상승의 좋은 사례가 된다는 것이다.

    [사진] 경매에 나왔던 김칠복 호구단자이다. 위 왼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김칠복은 38세 때는 ‘齋奴(재노)’로, 47세 때는 ‘墓直(묘지기)’으로, 57세 때는 ‘嘉善(大夫)’로 다르게 직역이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사진은 1836년 김칠복이 받은 통정대부 공명첩으로 납속을 뜻하는 ‘納(납)’자가 보인다. (코베이 사진)

    그런데 이 자료들이 하층신분에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출발점이 노비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왜냐하면 묘지기를 한자로 적을 때는 ‘山直(산지기)’, ‘墓直(묘지기)’과 함께 흔히 ‘墓奴(묘노)’라고도 썼기 때문에, ‘묘노’라는 표현만으로 김칠복을 노비로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호구 단자에 나오는 ‘齋奴(재노)’는 ‘재실 묘노(齋室 墓奴)’를 줄여서 쓴 표현인데, 재실 묘지기는 문중의 무덤이나 사당을 관리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다. 그들이 비록 특정 문중에 종속되어 살았다고는 하지만, 모두 노비 신분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재노’ 표현이 ‘묘직’으로 바뀐 호구단자들을 놓고서는 노비가 평민으로 신분 상승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편적이다. 칠복이 원래 평민 신분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이야기다.

    칠복이 노비가 아닐 수 있다는 증거는 그뿐만이 아니다. 먼저 유일하게 김칠복을 ‘재노’로 기록한 1837년 호구단자에서 ‘김칠복’은 ‘김’이라는 성(姓)와 ‘김해’라는 본관을 가지고 있다. 노비라면 보통 성과 본관이 따로 없었다. 김칠복 부부의 가계는 그가 노비가 아니라는 설명에 더 큰 설득력을 부여한다. 김칠복을 ‘재노’로 기록한 1837년 호구 단자에 적혀 있는 그의 4조(四祖) 즉 부(父) 용이, 조부(祖父) 개부리, 증조부(曾祖父) 선이는 양인으로, 외조부(外祖父) 김두선은 업무(業武; 무학을 닦는 양반가의 서자)로 되어 있어 부계, 모계 모두 천민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칠복의 처로 기록된 ‘동 조이(蕫 召史)’도 평민 여성으로 볼 수 있다. 통상 여성들의 경우 호적에서 이름을 쓰지 않는 대신 성씨 뒤에 양반 여성은 ‘씨(氏)’, 중인 여성은 ‘성(姓)’, 평민 여성은 ‘조이(召史)’라는 용어를 붙여 신분이나 계층을 구분했다. 김칠복 호구 단자에서 ‘동 조이’의 4조는 심지어 모두 중인 신분인 역리(驛吏)라 되어 있어 그녀는 실제로는 중인 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큰데, 남편 김칠복의 신분에 맞추어 ‘동 성(蕫 姓)’ 대신 ‘동 조이(蕫 召史)’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김칠복 부부의 조상 계보는 김칠복이 ‘묘직’으로 기록된 이후의 호구단자에서도 동일하다. ‘재노’와 ‘묘직’이 근본적인 차이가 없고, 단지 표현의 차이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김칠복이 노비였다면 호구단자에는 주인에 대한 기록이 나와야 하고, 자신의 아버지쪽 가계뿐만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정보도 기록되었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 용이가 양인인데, 김칠복이 노비가 되려면 법적으로 어머니는 반드시 노비여야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노’로 표기된 호구단자에는 칠복의 주인이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면 김칠복 관련 자료는 노비→ 평민→ 양반의 3단계가 아니라 평민→ 양반으로의 2단계 신분상승을 반영한 자료가 되는 것이므로, ‘매우 희소한 자료’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김칠복이 원래 노비는 아니었더라도 적어도 양반 신분이 아니었던 것만은 명확하다. 공명첩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그의 부계 조상 이름들을 보면 일반적인 양반 이름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용이(龍伊), 개부리(介夫里), 선이(先伊) 등의 이름은 양반들이 통상 사용했던 한자식 이름이 아니고, 주로 평민 이하 하층민들이 사용하던 이름들이다. 특히 조부 이름 ‘개부리(介夫里)’는 흥미롭다. 이 ‘개부리’는 무슨 뜻일까? 이건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어쨌든 30여년에 걸친 김칠복 관련 자료들은 조선후기 신분제 변동의 한 단면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나는 이 자료들을 수집해 김칠복의 가족사를 재구성해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낙찰은 받지 못했다. 김칠복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여기에서 이렇게나마 간단히 논평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나의 ‘노비 컬렉션’

    나는 ‘노비’에 관심이 많다. 대학시절 같은 과 친구들은 내 이름 ‘건호’를 쉽게 발음되는 ‘거노(巨奴)’로 마음대로 고치고는 ‘큰 노비’라고 놀려 댔다. 그 녀석들은 국사학과에 다니면서도 신분제가 폐지된 지 100년이 지났는지를 몰랐던 모양이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노비 관련 자료들을 조금씩 수집하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뭔지 모를 생경함을 느꼈다. 사람이 사람을 노비로 부리던 그런 시대에 대한 놀라움이었을 수도 있다.

    노비(奴婢)는 남자 노비인 ‘노(奴)’와 여자 노비인 ‘비(卑)’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노비는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었다. 물론 조선 후기 정초부(鄭樵夫)처럼 시를 잘 지어 양반들과 교류한 아주 드문 사례도 있지만, 대부분은 천시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천시되었다고 해서 아래 인용문에 언급된 거 같이 ‘물건’처럼 인식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실학파의 이서구는 18세기 학식도 있으면서 서민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열린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다. 어느 날 이서구는 술주정하는 집안의 하인을 때려죽이라고 명하고 마침내 그 하인이 맞아 죽자 “내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니 장사를 후히 지내주라” 지시한다. 이서구는 전라도 관찰사를 두 번이나 역임했다. 전라북도에만 그를 기리는 공덕비와 불망기가 26개나 있을 민관 캐릭터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집안의 노비는 때려죽여도 되는 물건쯤으로 생각한 것이다.

    로마 시대의 귀부인들은 노예들이 보는 앞에서 목욕도 하고 속옷도 갈아입었다. 이서구나 로마 귀부인들에게 있어 하인이나 노예는 배려해야 하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귀부인들은 노예 앞에서 알몸으로 목욕을 해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김석환, [고인돌에서 인공지능까지](산지니, 2021) 중에서

    노비가 물건 정도로 인식되었는지, 물건과 사람의 중간 정도로 인식되었는지, 그도 아니면 약간 덜떨어진 사람 정도로 인식되었는지, 그리고 서양사의 노예와 우리의 노비가 어떻게 달랐는지에 대한 논의는 이번 글의 중심 주제가 아니므로 이건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번 글에서는 내가 수집한 노비 관련 자료들을 몇 가지 소개하려고 한다. 이런 자료들은 자료 자체도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이런 자료들을 자꾸 보다 보면 그 속에 노비들의 삶과 처지가 드러날 것이고, 그것들이 모이면 당시 양반과 평민들이 노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첫 번째 소개할 자료는 노비 호패이다.

    노비들도 호패를 패용했을까?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에 이런 질문을 한다. 학생들은 대답을 제대로 못한다. 교과서에서 노비 호패를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호패는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것으로 일종의 신분증이다. 계급사회였던 조선에서 어떤 계급의 사람들이 이 호패를 패용했을까? 천민인 노비도 호패를 차고 다녔을까?

    [경국대전] 규정에 따르면 양반에서 노비까지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는 호패를 차야 했다. 양반들은 상아나 사슴뿔 등의 재료를, 평민들은 나무를 썼고, 그리고 기재 내용도 다소 달라서 2품 이상의 관리는 관직과 성명을 기록했고, 3품 이하의 관리나 공이 큰 관리의 아들은 관직과 성명, 거주지를 기록했다. 일반 백성들은 이름과 사는 곳 외에 얼굴빛과 수염이 있는지 없는지를, 노비는 연령, 거주지, 얼굴빛, 키, 수염이 있는지 없는지 외에도 주인의 이름을 기록했다. 호패의 길이는 평균 ‘3치 7푼’(약11㎝)이며 폭은 ‘1치 3푼’ 두께는 ‘2푼’으로 직사각형 모양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호패를 보면 그 길이와 폭, 두께가 불규칙하고 그 기재 내용도 제각각이라 실제의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호패의 관할 기관은 서울은 한성부, 지방은 관찰사 및 수령이 관할하고, 이정(里正) ·통수(統首) ·관령(管領) ·감고(監考) 등이 실제사무를 담당하였으며, 그 지급방법은 각자가 호패에 기재할 사항을 단자(單子)로 만들어 제출하면 2품 이상과 3사(司)의 관원은 관청에서 만들어 지급하고, 기타는 각자가 만들어 제출하면 관청에서 단자와 대조한 뒤 낙인(烙印)하여 지급하였다.

    [사진] 노비 순철의 호패로 왼쪽은 앞면이고, 오른쪽은 뒷면이다. (박건호 소장)

    내가 수집한 호패는 20여점 정도 되는데 그중 노비 호패는 유일하다. 이 호패의 원래 주인은 노비 순철(順喆)이었다. 호패 재료는 잡목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호패보다 나무는 매끄럽지 못하고 매우 거칠게 마무리되었다. 사각형 형태의 이 호패 규격은 가로 3.5센티미터, 세로 10.5센티미터이다. 앞면에는 먹으로 ‘龍興里 第一統內 第二戶 李奴順喆’로 써 놓았다. 용흥리 1통 2호는 순철의 주소이며, ‘李奴順喆’은 이씨의 노비 순철이라는 뜻이다. 노비의 경우 다른 것은 몰라도 주인은 반드시 기록했어야 했다. 이름 순철에서 ‘순(順)’은 순하다는 뜻이고, ‘철(喆)’은 똑똑하다는 뜻이니, 시키는 일을 똑똑하게 잘 순종하라는 의미로 주인이 붙여준 이름일 것이다. 호패 뒷면 왼쪽 아래에는 사각형의 낙인이 찍혀있다. 그리고 가운데 윗부분과 가운데 아래부분에 구멍이 뚫려있고 여기에 줄이 묶여있어 휴대에 편리하게 되어있다. 줄은 맨들맨들하게 손때가 묻어 있어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뚜렷하다.

    모양은 비록 볼품없이 생겨 초라하지만, 이 호패는 이래 봬도 굉장히 귀한 몸이다. 노비 호패는 지금 현존하는 것이 거의 없다. 30년 이상 수집을 했지만 노비 호패는 이것 외에는 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노비 호패는 노비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운 물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는 빨리 없애 버려야 될 대상이었다. 최고위직 양반들이 패용한 상아 호패가 조상의 공덕을 기리려는 후손들에 의해 귀하게 보존되어 현재 꽤나 많이 남아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노비 호패는 호패계의 귀족이고 양반이다. 이렇게 노비 호패가 귀한 대접을 받게 되었으므로, 노비 순철은 죽어서라도 천대받던 한을 풀 수 있게 된 것일까?

    두 번째 소개할 자료는 몇 개월 전에 수집한 전답 매매 문서 한 점이다. 전답 매매 문서야 워낙 많이 남아 있어서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내가 수집한 문서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이 문서는 광무 3년(1899년) 김씨 집안의 노비가 주인을 대신하여 전답을 판 문서이다. 보통 양반들은 자신의 노비에게 위임장인 배지(牌旨)를 써 주어 대신 거래를 하게 했는데, 이는 양반이 직접 나서서 거래하는 것을 명예스럽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답 매매 문서에 적힌 노비 이름이 ‘小石只(소석지)’였다. 이 문서를 수집한 이유도 이 노비 이름 때문이었다. 소석지? 소석지는 무슨 뜻일까? 보통 ‘只’는 ‘기’로도 읽었는데, 그래서 여기서 ‘小石只’는 ‘소석기’로 읽어야 한다. 소석기라? 그렇다. 이는 ‘소새끼’를 한자로 쓴 것이다. 조선시대 노비 문서에서 ‘강아지’라는 이름은 매우 흔한 편인데, ‘소새끼’는 이 문서에서 처음 보았다. 사람 이름을 ‘소새끼’라고 짓던 그런 시대가 실제로 있었다.

    [사진] 광무 3년 기해년(1899년) 전답 매매 문서이다. 붉은색 테두리 부분에 ‘金 奴 小石只’라고 쓴 부분이 보인다. (박건호 소장)

    노비 이름을 보면 노비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노비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 이름들이 있었다. 영화나 사극의 단골 이름인 갑돌이와 갑순이, 돌쇠, 마당쇠, 언년이, 간난이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위에서 소개한 호패 주인공 순철도 저 정도면 좋은 이름이다. 노비 이름을 동물에 빗댄 경우가 많았다. 강아지(江阿只, 江牙之), 도야지(都也之, 道也知), 두꺼비, 송아지, 망아지, 소새끼, 개노미(介老未) 등이 그런 예들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동물 똥이나 동물 생식기를 이용한 이름도 있었다. 개똥이(介同, 介屎), 소똥이(牛同, 小同), 말똥이(唜同,馬同), 개부리, 개불알이(介佛), 소부리, 개조지(介助之), 분녀(糞女), 똥산이(屎山) 등이 그것이다. 글 앞머리에서 김칠복의 조부 이름이 ‘개부리’였던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개부리는 ‘介夫里’나 ‘介不里’로 표기했는데, 통상 ‘개불알’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이름이 ‘소불알’일 경우에는 ‘소부리’라하여 한자로는 ‘牛夫里’나 ‘牛不里’ 등으로 적었다. 사람 이름을 정말 저렇게 험하게 지었을까 의심이 들겠지만, 그런 이름들을 실제 사용했던 걸 어쩌겠는가? 돌맹이(乭夢), 귀이개(貴仁介)처럼 아예 물건에 빗대 이름을 짓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계열의 이름 중 ‘광자리(光自里)’는 흥미롭다. 빛 광자를 썼는데, 그것을 뜻으로 읽으면 ‘빛자리’가 된다. 빛자리, 즉 빗자리는 빗자루의 경상도 사투리다.

    신체 특징을 아예 이름으로 쓴 경우도 흔했다. 얼굴에 점이 있다고 소점(小點)이, 대점(大點)이, 키가 작으면 쪼깐이(足間伊), 작은년(自斤連, 小斤連), 작은노미(自斤老未, 小斤老未), 키가 크면 큰년이, 얼굴이 넓으면 넙덕이(汝邑德), 어리면 어린년(於仁連), 무섭게 생겼다하여 무섭이(戊西非), 고으면 곱단이(古邑丹), 어여분(於如分) 등등.

    노비가 맡은 일을 가지고 작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광자리, 귀이개도 크게 보면 이쪽 부류에 속한다. 물 긷는 물담사리, 소 기르는 쇠담사리, 똥 푸는 똥담사리, 붙어산다는 더부사리, 집 담에 붙어 있다는 담사리, 마당을 쓴다고 마당쇠 등이다. 마당쇠와 광자리는 결국 같은 뜻인 셈이다. 아예 별뜻없이 아무개를 지칭하는 ‘거시기’로 짓거나, 밑도 끝도 없이 썩을년(石乙年), 버러지(伐於之)로 짓는 경우도 있었다.

    [사진] 옛 문서 속에서 노비 이름으로 쉽게 발견되는 것이 ‘강아지’와 ‘도야지’다. 그래도 ‘개새끼’, ‘돼지새끼’나 ‘소새끼’보다는 상대적으로 낫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위 과부 이씨의 호적 자료에서 사노 강아지(江牙之), 아래 유학 조운우의 호적 자료에서 사노 ‘도야지(道也知)’의 이름이 보인다. (박건호 소장)

    이런 이름들이 사용됐다는 사실을 책 속에서 글로 읽었을 때는 그러려니 하는데, 그 이름이 쓰인 옛 문서를 보면 또 다른 느낌이 든다. 막연한 노비 이야기가 매우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다가온다. 내가 마치 모독을 당한 듯한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한다. 좋게 불러도 시원찮을 텐데 어떻게 이름을 저렇게 막 지었는지 지금 관념으로는 이해가 안된다. 물론 이름을 험하거나 더럽게 지어야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기는 했다. 또한 저런 이름을 쓴 사람이 모두 다 노비라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정서에서는 지극히 낯설다. 이런 동물이나 물건 등의 이름으로 평생 불리다가 죽었던 그들의 삶이 참으로 애잔하다.

    세 번째로 소개할 자료는 노비 매매 문서이다. 노비는 재산으로 간주되어 사고 파는 대상이었다. 이런 매매 사실을 문서에는 일반적으로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인적 사항,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매매하는 노비의 부모, 노비의 나이나 가격 등이 기록된다. 사람이 물건처럼 매매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한때 노비 문서와 관련하여 전설적 이야기가 유행한 적이 있다.

    언젠가 [TV 진품명품]이란 프로그램에 어떤 의뢰인이 집안에서 오랫동안 내려온 가보라며 옛문서를 문서를 들고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자기 집안의 노비계약청산 확인 문서로 밝혀졌고, 이로써 의뢰인은 자신의 집안이 노비 집안이었음을 전국적으로 커밍아웃한 꼴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 황당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 진품명품 측은 1000회 특집 방송에서 이것이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해명한 적도 있다. 노비 문서는 진품명품에 총 3번 나온 적이 있는데, 노비계약 확인 문서는 나온 적이 없었다. 또한 노비 문서는 노비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노비의 상전이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 자체가 성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노비 매매 문서는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다. 그만큼 노비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주로 양반집 문서를 들춰보면 그 속에는 어김없이 토지 매매 문서, 분재기 등과 함께 노비 매매 문서가 들어 있다. 그런데 이런 노비 매매 문서 중에는 특이하게 ‘자매문기(自賣文記)’라는 것이 있다. 자기 스스로를 노비로 팔면서 작성한 문서이다. 나는 자매문기를 여러 장 소장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짠한 것이 소녀 순심의 자매문기이다. 이 문서는 가경10년(1805년)에 작성된 것으로 소녀의 어머니가 아기를 낳은 직후 가난한 처지로 아사지경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어 부득이 자신을 ‘7관’의 가격에 유학 이성원에게 자기를 팔고 오른쪽 손도장을 그린 것이다. 이런 자매문기 속에는 그 시대의 가난과 생활고, 그리고 그 밑에서 신음했던 당대 서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팔려야만 했던 노비들, 그리고 먹고살기 힘들어 자기 스스로를 양반 집에 팔아야만 했던 가난한 평민들의 이야기가 이런 문서 한 장 한 장 마다에 깃들어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조선시대 수많은 하층민들의 사연과 눈물들을 만날 수 있다. 역사는 아름다운 이야기보다는 슬픔과 고통이 훨씬 많다. 이 문서들이 특히 그렇다.

    [사진] 위는 가경 10년(1805년) 소녀 순심이 가난 때문에 자기를 노비로 판다는 내용의 자매문기이다. 순심이 이름 밑에 우장(右掌)이 그려져있다. 아래는 가경 21년(1816년) 안동에 살던 유학 권호(權琥)의 호구단자 속 노비들 속에는 가난 때문에 노비가 된 ‘구활비 복열(救活婢 卜烈)’이 보인다. 구활노비(救活奴婢)는 양반이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줄 경우, 쌍방간의 합의 하에 도움을 받은 사람을 노비로 인정해 주는 제도였다. 당시 복열은 9세였다. 복열 이름 뒤에 ‘父 夫之’라고 썼는데, ‘夫之’는 ‘不知’와 같은 뜻으로 쓰인 관용어로 아버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이런 복열과 같은 구활노비들도 가난이 만든 노비들이다. (박건호 소장)

    네 번째로 내가 수집한 노비 자료로 양반들의 호구 단자가 있다. 그 속에 많은 노비들이 주인 집에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호적은 3년마다 한 번씩 작성하였다. 호에 포함된 개별 인구의 변동을 그때그때 수시로 기록하는 것은 번거로웠기 때문에 3년마다 한 번씩 그 동안의 변동 사항을 호구 단자 형식으로 신고하게 하여, 일제히 호구를 재정비했던 것이다.

    호적제도는 일종의 주민등록제도이다. 경제 생활을 함께하는 동거 세대를 한 호로 규정하여 작성하였는데, 이런 호적 자료들 속에 기록된 노비의 수는 생각보다 훨씬 많다. 그래서 조선후기 전체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보통은 30프로 정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어떤 이들은 40프로 심지어 50프로로 보기도 한다. 과장하면 인구의 절반이 노비였다는 주장이다. 정확한 비율까지는 모르겠으나 옛 호적 문서를 보면 노비가 많기는 많았다. 호적에서 그들은 ‘천구(賤口)’로 기록되었다. 이런 노비들은 그 호에 딸려 잡일하는 노비인 솔거노비 혹은 앙역노비, 따로 독립해 사는 외거노비, 또는 도망노비 등으로 분류하여 기록되기도 한다. 이런 호구단자를 보다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 모습들을 상상해보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최근에 수집한 호구단자를 하나 보자.

    이 문서는 어느 군에 속한 수곡면 평지리의 유학 이용구의 호구 단자이다. 이용구 집에는 세 명이 살고 있었다. 이용구의 나이는 올해 32세였다. 그리고 아들 병만이는 나이가 8세였다. 이용구가 24살 때 낳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집에 아내는 기록이 없다. 아마 사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문서의 끝부분에는 노비 금단(今丹)이 기록되어 있다. 그녀의 나이는 36세였다. 젊은 나이에 혼자된 이용구는 8살짜리 병만이를 혼자 키우는 상황이었다. 8살이면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나이이다. 그리고 이용구는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비슷한 나이대의 상전 이용구와 노비 금단은 한 가정 내에서 어떤 관계를 유지했을까? 남녀 관계는 신분 관계를 뛰어 넘을 수 없었을까? 오로지 주종관계의 신분 질서만 존재한 것이었을까? 둘 사이에 정분이 나지는 않았을까? 이 둘의 관계는 오늘날 직장 상사와 부하의 관계 비슷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더 엄격하게 군대에서 장교와 졸병 같은 관계였을까? 호구단자 한 장을 보며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이 문서를 통해 나는 과거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런 호적 자료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사진] 유학 이용구의 호구 단자다. 그는 32세로 8세 아들을 두고 있다. 아내는 이미 죽은 것 같고, 36세의 노비 금단이 같은 집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생활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붉은 테두리 부분을 보면 오른쪽에서 순서대로 상전 이용구, 그의 아들 병만, 그리고 노비 금단의 이름이 보인다. (박건호 소장)

    – 노비이야기(2)에 계속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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